1편에 이어 계속....
브와뱅의 두번째의 고공 활공의 도전 대상은 남미 대륙 최고봉 아콩카구아(Acongagua 6,960m)였다. 브와뱅의 라이벌이며 클라이밍의 파트너인 이반 지랄디니와 팀을 갈라 도미니크 마샬과 함께 1월 13일에 정상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도미니크를 태우고 아콩가구아 베이스 캠프까지 활공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행글라이딩에는 바람 조건이 중요했다. 브와뱅은 지랄디니가 남쪽으로 사흘 걸려 단독으로 올랐을 때 우연히 날씨가 호전됨을 알았다. 장 프랑크 샤를레와 지랄디니를 그대로 기다릴 수 없어 그는 마샬을 가이드하여 베이스 캠프까지 무사히 활강하였다.
세계 최초의 가이드 활강 기록이었던 것이다. 27킬로그램이나 되는 행글라이더를 끌어 올리는 중노동을 벌였던 며칠후 영국의 노먼 크라우처는 무릅 아래가 잘린 두 다리를 이끌고 팔꿈치로 1,800미터를 기어 올라 등정에 성공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브와뱅은 그 후 파타고니아로 내려가 요트를 타고 아르헨티나의 마르텔 플라타에서 출발해 험악스럽기로 이름높은 빙산의 표르드(Fiord)로 덥힌 남쪽의 콘티넨탈 아이스캡까지 횡단하는 모험에 참가하였다.
일행은 필립 파크(Philip Farques)의 총지휘로 1982년 말에 출발하여 칠레쪽 해안을 돌아 리조패트론으로 오르려했다. 그러나 사고로 실패하여 돌사태 지역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이번에는 어줍잖은 낙석으로 티에리 르르와가 10미터를 추락하여 척추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는 등 모진 고생 끝에 철수하고 말았다. 브와뱅은 그래도 도미니크 마샬과 베르나르 브르돔과 장 루이 에티앙을 독려해 계속 전진했다. 결국 10일 만에 피츠로이 지역에 예정대로 건너갈 수 잇었다.
틸만(William Tillmann)dl 1955년 1956년에 통과한 이래 그 험악한 지역을 네번째로 지나갔다.
포트 윌리암스(Port Williams)로 귀환한 브와뱅 일행은 이번에는 남미의 끝 게이프혼으로 가 그곳 최고봉의 남벽(고도 600미터)을 클라이밍하기도 했다. 브와뱅은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회상한다. “탐험과 클라이밍을 겸하는 것은 아주 신선한 맛이 있었습니다. 고국 멀리 남미의 그 황량한 대지의 끝에 나의 숨결이 존재한다는 야릇한 흥분 속에 클라이밍을 리드할 수 있었죠”
늘 창조적이고 신선한 충격을 맛볼 수 있는 클라이밍을 향유하는 브와뱅 그는 오랜 파트너로 갸바루와 디아 페리아, 알레상드르를 손꼽는다. 알프스의 등반 조건이 좋지 않을 경우 이를 테면 슈퍼 꿀르와르의 결빙상태가 나쁘면, 그는 해맑은 그랑카푸셍(Grand Capucin 3,838m)을 찾아 따스한 햇살 아래 미등의 틴라인(Thin Line)을 찾아 나선다. 그는 확보 지점이 불안하기만 한 빙벽에 비해 암벽은 확실한 확보 지점이 있어 기분 좋다고 한다. 그는 갸바루와 함께 로아장에서 몸서리치는 위험한 상황에 빠졌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빙벽을 피해 자신의 힘으로 오른 암벽 루트는 10여 개 정도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40여 개의 암벽 루트 가운데 30개에 육박하는 루트를 등반했다.
오히려 빙벽 루트의 초등은 그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매일 30여 미터짜리 루트가 초등되고 있는 요세미티 계곡과는 견줄 수 없으나 브와뱅 자신은 마이크 피올라와 같은 젊은 클라이머들과 발맞추어 순수 암벽 등반도 게을리 하지 않은다.
그는 알프스에서 새로이 개척해야 할 루트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클라이멍의 과제가 자라지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이로 인해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장르의 크라이밍과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 누가 ‘알프스는 끝났다’는 성급한 망언을 던지고 있는가? 아직도 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브와뱅은 알프스의 진수를 표방하는 등반을 모두 이룬 다음 알파인 스타일로 히말라야에 진출하겠단다.
지난날 서부 알프스의 가이드는 산정에 오르기 무섭게 하산 길을 재촉해야만 안전하게 산장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완전히 달라 오르는 속도도 빨라야겠지만 하산속도가 절대적인 열쇠가 된다.
1985년 프랑스 산악전문지 <버티칼(Vertical)> 창간호에서는 브와뱅을 들어 ‘스키를 이용해서 몽블랑 주변 4,000미터급 빙설암의 암등과 꿀르와를 등반하고 재빨리 하강하는 방식은 브와뱅에게서 비롯된다.’고 극찬한 바 있으며 또한 익스트림 스키분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격찬했다.
이제 세계 산악인들은 장 마르크 브와뱅이 펼치는 스피디 클라이밍의 기록을 접하면서 찌들은 도시 생활에서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게 되었다. 우선 3대 북벽에 연속으로 오른 그의 기록 즉, 그랑드조라스 랑셀에서 2시간 반, 마터호른에서 4시간 반, 7시간 반만의 아이거 북벽 등정, 모두 합해 14시간 반, 세인의 상상력을 초월한 진기록이 아닌가? 물론 진기로이라 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3대북벽의 등정을 하루에 등반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점이 중요하다. 북벽으로 이동하는 시간만 줄일 수 있다면 크리스토프 프로피(Christophe Profit)가 세운 23시간30분의 기록을 능가하지 않을까 한다.
익스트림 스키와 스피디 클라이밍이 갖는 조화는 이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얇게 얼어붙은 위험천만한 수직의 꿀르와르를 무난히 타고 넘는 브와뱅, 알프스 꿀르와르의 북축 사면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브와뱅이다. 또 북벽 사이를 이동하기에 편리한 방법인 파라팡트(패러글라이더) 북벽의 거리가 5킬로미터 이내일 경우와 또 바람 조건도 최상의 조건이라야 쓸 수 있다. 3.5킬로그램이나 되는 짐을 계속 지고 오를 수는 없으므로 미리 저장해 놓아야 한다.
브와뱅은 던롭사의 주문으로 콜롬비아의 리타쿠바(Rita Cuba 5,200m) 정상에서 던롭 광고 지점까지 정확히 착지하는 데 성공하여 다시 한번 자신을 얻게 되어 7월 14일에 8,000미터 자이언츠 가셔브롬 Ⅱ봉(8,035m)에서 행글라이딩에 도전하여 정상에 세 차례나 오른 끝(하나의 기록)에 25분만에 베이스 캠프에 무사히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히든피크의 정상에서 나는 4~5시간 동안 파뭍힌 행글라이더를 아이스 해머로 파내야 했습니다. 아주 지겨운 일이었지만 끈질기게 파낸 끝에 50Cm 정도 부러진 날개로 활공 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세계최초의 고공기록을 세울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설명하는 장 마르크 브와뱅이다.
그의 도전은 늘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1986년 3월 17일 새벽 4시 30분에 에귀유베르트 북면을 등반하기 시작하여 2시간 후에 4,121미터의 정상에 도달했다. 그는 곧 행글라이더의 날개를 펴 드르와트 북벽으로 이동했다.
등반고도 1,300미터의 빙설면을 오르는 데에는 3시간 5분이 소요되었고 다시 4,000미터 정상에서 행글라이딩으로 레쿠르트 북벽 하단에 착지하였다. 그 600미터의 빙면을 2시간 정도로 끝내고 다시금 행글라이딩으로 그랑드조라스 북벽 아래에 이르렀다. 3개의 북벽을 끝냈을 때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랑셀의 4,208미터 정상으로 향해야 했다.
해가 있을 때 등반을 시작했으므로 그는 그랑드조라스의 정상 능선에 이를 때까지 낙빙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신없이 사지를 움직였다. 결국 밤 10시 30분에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1986년 3월 17일 그는 밤의 한기를 가르며 한 마리의 페가수스와 같은 거대한 박쥐가 되어 행글라이더에 매달린 채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그랑드조라스의 빙하 위에서 낄낄대며 발포르로 비행해 나갔다.
이것이 브와뱅의 퍼포먼스 익스트림(Perfomance Extreme)이다. 1986년 3월에는 세 차례에 걸친 진기록을 세웠다. 즉 5일에 몽블랑드따귈, 몽모디(Mont Maudit 4,465m), 몽블랑(4,807m), 이어서 4일 후에는 피리에딩글 세 시간 반에, 꿀르와르를 네 시간에 그리고 무르드라코트로 스키 활강을 모두 하루에 마치기도 했다. 그의 모험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4월 17일에는 5봉 연장 활강 즉 르모앙(3,412m), 르드류(3,754m) 르꿀르와르 윔퍼 아레귀유베르트(4,121m), 레쿠르트 그리고 그랑드조라스를 단 하루만에 끝냈다.
장 마르크 브와뱅이 모험을 통해 세운 업적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퍼포먼스를 장식하는 메달의 수를 세는 일조차 번거로울지 모른다. 브와뱅은 히말라야 자이언츠 14좌를 등정하는 의미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지겹게 오르내리는 일을 되풀이 하기 보다는 클라이밍하는 나라와 지역을 바꾸면서 분위기를 색다르게 느끼고 싶어집니다. 열대에서 한대에 이르기까지 황량한 지역의 사람들고 함께 지내며 등반하는 것이죠. 난 4년 전에 아마존에서 아라티티요프에 오를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신선한 충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인디언들고 함께 낚시를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필자는 지난 88년 7월 그에게 짤막한 서한을 내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 주기를 요청했으나 그가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에 가있다는 비서의 답장이 1개월 만에 도착했다.
지난해 가을, 프랑스 에베레스트 등정 10주년 기념 원정에 참가한 익스트림 알피니즘의 기수 장 마르크 브와뱅은 푸른 창공에 활짝 날개를 편 한 마리의 페가수스가 되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파라팡트(패러글라이더)에 몸을 싣고 세계 최고의 활공기록을 수립하는 대업적을 이룩했던 것이다. 끝
그 후 브와뱅은 자신의 최후마저 ‘브와뱅답게’ 마감했다. 1990년 2월 17일, 그는 베네수엘라에 있는 세계 최대 높이의 폭포 ‘살토 델 엔젤’(엔젤폭포)에서 뛰어내렸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위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가 펼치려던 파라팡트가 작동하지 않아 그대로 추락사했다. 혹자들은 그가 지나치게 매스컴을 의식하는 연예인 같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소년 같이 해맑은 미소만을 기억하고 싶다. 브와뱅은 언제나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요? 당신도 해보세요. 정말 짜릿해요. 온몸의 세포와 신경들이 곤두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고요!”
옮긴이 탑앤에어 Doowo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