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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보기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매바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9년작 영화 <BEN-HUR (벤허, 1959)>에 대한 해설 및 리뷰, 배경 지식입니다.
본문 중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영화 정보 :
- 제목 : BEN-HUR (벤허, 1959) (* 1925년작 동명 영화의 리메이크)
- 감독 : William Wyler 윌리엄 와일러
(Director of
- 원작 : Lew Wallace 루 월레스의 동명 소설 『Ben-Hur (1880)』
- 출연 : Charlton Heston 찰턴 헤스턴 (쥬다 벤허)
Stephen Boyd 스티븐 보이드 (멧살라)
Jack Hawkins 잭 호킨스 (퀸투스 아리우스_집정관)
Martha Scott 마샤 스콧 (미리암_벤허 母)
Cathy O"Donnell 캐시 오도넬 (티르자_벤허 妹)
Haya Harareet 하야 하라릿 (에스더)
Sam Jaffe 샘 자페 (시모니데스_집사_에스더 父)
Hugh Griffith 휴 그리피스 (일더림_아랍 부족장)
Finlay Currie 핀레이 커리 (발타자_동방박사)
Frank Thring 프랭크 드링 (폰티우스 필라트_쥬다야 총독)
George Relph 조지 렐프 (티베리우스 시저) 外
- 제작년도 : 1959년
- 러닝타임 : 212min. (Overture / Intermission 포함)
■ 영화 줄거리 및 포토
서기 26년, 로마 제국 티베리우스 황제 제위 시대.
쥬다 벤허(찰턴 헤스턴 분)는 예루살렘의 명망있는 유대인 귀족의 장자이다.
어느 날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쥬다야 지방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신임 총독의 주둔 사령관으로 벤허의 옛 친구인 멧살라(스티븐 보이드 분)도 함께 부임해 온다. 그러나 멧살라는 유대 민족의 지배를 공공히 할 생각으로 벤허에게 동족을 배신하라고 종용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벤허는 멧살라와의 절연을 선언한다.
다음날 신임 총독의 입성식 중에 벤허의 여동생 티르자(캐시 오도넬 분)의 실수로 총독의 머리에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멧살라는 벤허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벤허 가족을 반역으로 몰아 잡아들이고 재산을 몰수한다.
결국 어머니 미리암(마사 스콧 분), 누이 티르자, 연인 에스더(하야 하라릿 분)는 감옥에 보내지고, 벤허는 갤리선의 노예로 팔려 간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고 예수는 목마른 그에게 물을 준다.
그로부터 4년 후, 벤허는 로마 갤리선에서 노젓는 노예로 지내고 있다. 마침 신임 집정관 퀸투스 아리우스(잭 호킨스 분)는 지중해에 출몰하는 메써도니아 해적 소탕작전에 나서는데, 전투 중 그와 벤허가 탄 배가 해적선의 격돌을 받고 침몰하게 된다. 벤허는 이때 함대 사령관인 아리우스의 생명을 구하고, 이를 계기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그의 양자가 된다.
로마에서 화려한 귀족 생활을 하게된 벤허이지만 그의 마음 속은 가족의 생사와 멧살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평온을 찾지 못한다. 마침내 벤허는 아리우스에게 작별을 고하고 로마를 떠나 쥬다야 지방으로 향한다. 고향 집에는 살아남은 예전 노예들과 에스더가 어렵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에스더는 벤허에게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벤허는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멧살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아랍인 부족장 일더림의 지원을 받은 벤허는, 멧살라가 출전하는 전차 경주에 함께 출전하여 그와 자웅을 겨룬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차 경주가 시작되고, 승리를 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던 멧살라는 결국 말과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멧살라는 죽음에 직면해서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아직 살아있으며 나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골짜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멧살라는 죽는 순간에까지도 벤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 It goes on, Judah. The race... The race is not over.
계속된다, 쥬다. 경주는...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나병 골짜기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 간 벤허는 그 슬픔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에스더는 예수가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벤허를 데리고 간다.
그러나 신임 총독 폰티우스 필라트(프랭크 드링 분)는 유대 민족의 반란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에 처한다. 벤허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예수에게 물을 떠다주려는데, 예수의 얼굴을 보고 그가 노예로 팔려가던 중에 나자렛에서 자신에게 물을 떠주었던 사람임을 알고 놀란다.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을 지켜보며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숨지자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나병이 깨끗이 낫는 기적이 일어난다.
벤허는 에스더에게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며, 비로소 자기의 마음속에서 복수심이 사라졌음을 알려준다.
I heard Him say,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그때 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다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저지르는 일을 모르나이다.")
And I felt His voice take the sword out of my hand.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내 손의 칼을 거두어가는 걸 느꼈소.)
■ 영화 해설 ( - 네이버 영화)
고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대인 청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신의 섭리를 그린 대작 영화로, 찰턴 헤스턴 주연, 감독은 <ROMAN Holiday (로마의 休日, 1953)>로 유명한 명장 "William Wyler 윌리암 와일러"가 맡았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 달러를 투입, 10년의 제작 기간과 10만명의 출연 인원, 1년여 촬영 기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필름을 소모했다. 대사가 한 마디 이상인 등장 인물만도 496명, 하이라이트인 15분간의 전차 경주 장면을 위해 1만 5천명이 4개월간 연습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카데미에서 무려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해상전과 전차 경주장면은 영화사에 빛나는 명장면이자 압권이다.
이 영화의 원작자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Lew Wallace 루 월레스. 188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곧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었고, 1925년 프레드 니블로 감독의 무성영화 (벤허)가 발표됐다.
| 1925년작 <BEN-HUR (벤허)>의 포스터
1,500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천문학적 제작비를 놓고, 그 많은 돈을 들이고도 제작비를 회수하고 수익을 낼 수가 있을까라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1958년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벤허"의 촬영이 시작됐을 때 제작사인 MGM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대단한 흥행을 기대했던 뮤지컬 <Gigi 지지>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벤허>의 제작은 MGM社의 파산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MGM도 이만한 도박을 시작할 때는 믿는 바가 있었다. 흑백무성영화를 리메이크해서 짭짤한 재미를 봤던 MGM은 그들이 1925년에 만들었던 <벤허>를 컬러판 와이드스크린에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분석했다. 프레드 니블로가 연출한 오리지널 <벤허>는 당시 제작비 400만 달러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MGM은 1951년 "Mervyn LeRoy 머빈 르로이"가 연출한 <QUO VADIS (쿼바디스, 1951)>의 성공사례에도 주목했다. 제작비 850만 달러를 들인 이 작품은 1,250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벤허>의 프로듀서 "Sam Zimbalist 샘 짐발리스트"는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쿼바디스>를 찍은 경험이 있는 제작자였고, 그는 <쿼바디스>에 사용된 시설, 세트, 의상을 <벤허>의 촬영에 재활용하는 한편, 필요한 인력 역시 <쿼바디스> 제작진에서 끌어들였는데, 영화음악을 맡은 "Miklos Rosza 미클로스 로짜", 촬영의 로버트 서티스, 세트 디자이너 윌리엄 호닝과 에드워드 카르파그노가 그들이다.
주인공 쥬다 벤허 역에 "Charlton Heston 찰턴 헤스턴"만한 배우는 없었다.
그는 "Cecil B. DeMille 세실 B.드밀" 감독의 1956년작 <THE TEN COMMANDANTS (十 誡, 1956)>에서 모우지스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십계>는 당시 <Gone With The Wind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다음 가는 흥행수익을 기록한 작품으로, 찰턴 헤스턴은 서사극의 영웅이 견지해야 할 강인한 육체, 불굴의 의지, 근엄한 아버지 이미지 등을 고루 갖춘 적임자였다. 그는 서부영화에서 존 웨인이 했던 임무를 서사극에서 수행했고, 많은 영화에서 가부장제와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Mrs. Miniver (미니버 부인, 1942)>과 <The Best Years of Our Lives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탄 인물이었지만, 스펙타클한 서사극 분야에선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후대의 평가는 영화 <벤허>에서의 감독의 공은 그리 크지 않다는 쪽이다.
해전과 전차경주로 대변되는 놀라운 스펙타클이 사실은 제2 제작진 연출자였던 앤드루 마튼과 야키마 가누트의 작품이라는 것.
심지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오, 신이시여, 과연 이게 내가 만든 작품입니까?"라고 했다던 윌리엄 와일러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벤허>가 갖는 의미를 줄이려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윌리암 와일러), 남우주연상 (찰턴 헤스턴), 남우조연상 (휴 그리피스_일더림 역), 촬영상 (로버트 L. 서티스), 미술상 (윌리암 호닝 외 2명), 녹음상 (MGM 녹음 스튜디오), 음악상 (미클로스 로짜), 특수효과상 (아놀드 길레스피 외 2명), 의상디자인상 (엘리자베스 하펜든), 편집상 (랄프 윈터스 외 1명) 등 모두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이 기록은 <TITANIC (타이타닉, 1997)> 및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2003)>의 11개 부문 수상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다.
■ 영화 리뷰 및 배경 지식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의 기독교적인 색채와 관련된 논쟁은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어차피 서양의 역사와 문화는 [신화]와 [종교]라는 두 가지 토대를 빼고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기때문에, 단지 기독교적인 색채가 있다 해서 매체를 거부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 무신론자입니다.
"벤허" 역을 맡은 배우 "찰턴 헤스턴"의 총기 허가 관련 논쟁도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제게 있어 그건 영화 외적인 문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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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으니 저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요... 가족 단위로 감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영화인지라 대한극장(이었을 겁니다)에서 가족관람을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십계>도 극장에서 처음 봤다구요! ^^v)
특히 클라이맥스인 전차경주 장면에 이르자,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제가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화면에 몰입을 하며 보더랍니다. 확실히 긴장하긴 했었어요. 지금도 극장에 가서 좋아하는 영화를 볼라치면 온몸이 마치 영화보는 기계라도 되는 양 몹시 흥분되고 긴장한 상태에서 영화를 봅니다.
좋아하는 영화의 타이틀이 대형 화면에 떠오르는 순간, 내가 얼마나 이 영화를 기다려 왔던가... 하는 기억들이 퍼뜩 지나가면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죠...
그리고 재미난 기억은... "멧살라" 역을 맡은 배우 "Stephen Boyd 스티븐 보이드"는 턱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는데, 그걸 보고 저 사람은 턱에 배꼽 같은게 있다... 라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
여담이지만 1999년도에 <STAR WARS: Episode I - The PHANTOM MENACE (스타워즈 에피소드 I - 보이지 않는 위협, 1999)>을 세계 시사회 첫 타임으로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무척 기다려왔던 영화이건만 정작 이 영화의 포드 레이싱 장면에서는 긴장하긴 커녕 하품을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이제 이 영화 <벤허>의 면면을 살펴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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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인 제작비]
1,5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이긴 하나, 1963년 제작된 20세기 폭스社의 <CLEOPATRA (클레오파트라, 1963)>의 제작비는 무려 6,000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300 (2007)>의 제작비가 바로 6,000만 달러였다고 해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배우와 화려한 볼거리에 비해서 <벤허>만큼의 평은 받지 못한 영화였어요.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에 비하면 <벤허>는 제작비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쿼바디스>와 <벤허> 등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1950~60년대를 풍미했던 대작 시대물은 바로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시작하여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무래도 시대물이다보니 일정 규모 이상의 과도한 지출이 발생하는 데에 비해 관객의 관심은 그만큼 감소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듬해에 개봉한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로마 제국의 멸망, 1964)>의 흥행 참패는, 마침내 리들리 스콧 감독의 <GLADIATOR (글래디에이터, 2000)>가 현대적 감각의 시대물로 흥행 신기원을 이룰 때까지 이후 한동안 헐리우드의 시대물 제작 시도를 주춤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1,5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일단 그리스나 로마 등 고대를 배경으로 한 대형 서사극의 예산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에요. <글래디에이터>의 예산이 1억 달러가 조금 더 들어갔고, 현재 제작 중인 빈 디젤 주연의 <HANNIBAL - The CONQUEROR (정복자 한니발, 2008)>의 예산은 5천만 달러로 잡혀 있다고 합니다. (시대극으로서는 좀 적은 예산이 아닌가 싶군요.) 얼마 전 개봉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Marie Antoinette (마리 앙투아네트, 2006)>의 예산도 4천만 달러였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2003)>의 제작비가 마케팅비를 포함하여 180억원이였다고 하는데, 이는 달러당 1,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2,000만 달러가 조금 안되는 금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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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o Domini]
영화 시작에 나오는 "A.D: Anno Domini" 라는 단어는 서력 원년(The Year of Our Lord)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원전을 뜻하는 B.C는 "before Christ" 약자구요.
다 아실테지만 그냥 확인차 적어보았어요.
이 영화 <벤허>가 크리스마스 방영 영화의 단골손님이 된 것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날 방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지요. 실제로 이 영화 <벤허>와 그 원작에는 "A Tale of the Christ (그리스도 이야기)"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직도 크리스마스나 명절 때에 공중파에서 이 영화를 틀어주면 전 꼬박 꼬박 챙겨보는 편입니다만, OVERTURE나 INTERMISSION은 당연히 빠져있고, 중간에 CF도 흘러나오기 때문에 산만하게 보게 됨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를 다룬 영화로, 최근에는 <The Nativity Story (네티비티 스토리 - 위대한 탄생, 2006)> 이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이 영화 역시 2006년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했더랬어요.
| The NATIVITY STORY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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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P Q R]
용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짚고 넘어갈까요?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다보면 [SPQR] 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 영화 <GLADIATOR>의 몇 장면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도 심심치않게 이 문장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보이는 [SPQR]은 "Senatus Populus - Que Romanus (세나투스 포풀루스 쿠에 로마누스), 즉 "원로원 및 로마 시민"을 뜻하는 네 단어의 약어입니다.
"원로원"을 뜻하는 라틴어 "senatus"는, 아직도 양원제 의회제도를 채택한 나라에서는 "senate (상원)"과 "senator (상원의원)"이라는 단어로 살아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제정 이전의 공화정 로마에서는 국가 최고 결정기관으로서의 민회가 존속했지만 (민회의 대표는 호민관) 실질적인 결의기관인 원로원의 유연하고 민주적인 결의를 통해서 사실상의 모든 정책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SPQR"이라는 문장은, 로마의 정치제도는 비록 오늘날의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사상으로 향하는 과도기적 형태이지만, 로마의 힘이 곧 로마 시민과 원로원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천명한 상징적인 문장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맥시무스의 팔뚝에 새겨진 이 문장을 보고 "그게 자네 신의 문장인가?"라고 묻는 주바의 물음에 맥시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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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풍습]
영화 <벤허>를 보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어갔던 장면인데요, 시오노 나나미의 『ロ-マ人の物語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나자 이 부분이 눈에 띄더군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하는 식사는 당시 로마의 일반적인 식사 자세였다고 합니다. 특히 손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후, 침대형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주제를 정하여 토론하며 음식을 먹는 것이 당시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식사 예법이였습니다.
따라서 전시 등의 아주 급할 때가 아니면 현대처럼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경우는 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자세는 먹을건 너무 많고, 움직일 일은 별로 없어 걱정인 현대인의 생활습관을 고려해보면 몸매 관리에 치명적인 자세입니다. 식곤증에 곧바로 잠이라도 자버리면 다음날 얼굴이 붓지 않겠습니까? 괜히 따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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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sseum 콜롯세움]
영화 <벤허>와 <글래디에이터>를 본 몇 몇 관객들이 갖는 의문입니다.
<벤허>의 전차 경주장면에 나오는 콜롯세움은 굉장히 컸는데,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콜롯세움은 왜 이리 작은가?
아이구 답답해라~ 그거야 같은 경기장이 아니니까 그렇죠!
영화 <벤허>에 나오는 경기장은 당시의 쥬다야 지방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방)에 지어진 전차 경주 전용 경기장이고,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검투 경기장은 로마에 있는 지금의 "Colosseum 콜롯세움" 입니다.
<SPARTACUS (스파르타쿠스, 1960)>에 나오는 검투 경기장은 좀 작은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콜롯세움은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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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고증]
이제 <벤허>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가 아닌데 무슨 수로 직접 알아보겠어요? 그래서 또 시오노 나나미 여사님의 글에서 도움을 구해봅니다...
시오노 나나미님은 이 영화 <벤허>에서 로마가 "악의 축"으로 그려지고 있는게 상당히 섭섭했던 모양인지, 영화 <벤허>에서의 시대상과 관련해서 지면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로마인 이야기』 제 6권 중에서 발췌.)
"편년체 방식으로 역사를 더듬어간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이르러), 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기원전과 기원후의 경계에 있는 이 무렵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실시한 국세 조사를 위해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은 아름다운 에피소드지만, 사실 이 무렵에는 국세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정확한 현상 파악이야말로 통치의 기본자료임을 알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본격적인 국세조사를 세 번 실시했다. 그 당시 유대는 아직 동맹국이었으니, 동맹국까지 범위를 확대한 국세조사였을 것이다.
이 세 차례의 국세조사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기록한 『Res gestae divi Augusti 업적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그 자신과 아그리파가 집정관이었던 기원전 28년.
두 번째는 가이우스 켄솔리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가 집정관이었던 기원전 8년.
세 번째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섹스투스 아폴레이우스가 집정관이었던 서기 14년.
로마에서는 건국 몇 년이라는 식으로 해를 나타내는 일은 거의 없고, "누구와 누구가 집정관이었던 해"라는 식으로 표기했다. 기원 표기를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후세의 표기법이다. 그거야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헤아리는 "기원" 편년 방식에서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기원 1년을 전후해서는 로마의 국세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속국이니까 시간차가 있었다 해도, 8년의 차이는 너무 크다. 또한 유대의 독자적 조사였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당시 유대는 헤롯 대왕이 죽은 뒤 내분 상태에 있어서 국세조사를 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의 이런 소박한 의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준 연구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긴 하지만, 이 무렵 예수가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나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왜 기독교가 로마인 사이에 널리 보급될 때까지 30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실마리가 된다."
로마 갤리선의 노젓는 노예. (『로마인 이야기』 제 6권 중에서 발췌.)
"악티움 해전을 끝으로 전투보다는 수송을 주로 담당하게 된 로마 해군은 구성원의 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육군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휘관만 로마 시민이고, 선원이나 노잡이는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 노잡이는 적어도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었다는 게 정설이다.
어쨌든 복무 기간은 28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동안의 급료나 만기 제대한 뒤의 대우를 알려주는 사료는 없지만, 노예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었다면 따로 복무 기간을 정할 리가 없다..."
로마인과 유대인 (『로마인 이야기』제 7권 중에서 발췌.)
"순수한 유대인도 아닌데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유대의 주권을 장악한 헤롯 왕은 대왕이라고 불릴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폼페이우스가 승리자인 동안은 폼페이우스 편에 붙고, 폼페이우스를 이긴 카이사르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카이사르에게 달려가 율리우스라는 가문 이름을 받고 카이사르의 "부하"로 변신한다. 그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동방에서는 브루투스 일파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편에 붙는다.
뒤이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권력투쟁을 벌였을 때는 또다시 동방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안토니우스 편에 붙는다.
이를 고맙게 여긴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아무리 간청해도 유대 왕국만은 여왕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을 정도다.
안토니우스가 패하자마자,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로 이름을 바꾼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서둘러서 로마를 방문한 헤롯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다.
약소국의 주권자로서 상황 변화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바꾼 헤롯은 그야말로 연명책의 표본 같은 존재다. 또한 헤롯은 카이사레아(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고, 그의 두 아들을 로마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가 헤롯의 주권을 인정한 것도 그의 이같은 친로마 정책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이용가치를 냉철하게 파악한 뒤에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정책이었다.
첫째, 헤롯은 완전한 전제군주였다.
유대에서 전제군주라는 것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국정엔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로마인은 독립된 사제계급을 두지 않았던 만큼, 종교의 정치 개입에는 항상 불신을 품고 있었다.
둘째, 헤롯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오리엔트에 주둔하는 로마 군단의 후원이 필요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리엔트 일대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로마의 직할령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잇는 선상에 자리잡고 있는 유대가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피차 냉철하지 않으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호혜관계"가 성립한 것이다.
셋째, 현대식으로 말하면 다국적 기업의 본사 회장인 아우구스투스는 특수한 사정이 많은 유대 현지법인의 사장에는 현지인을 앉히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헤롯은 헬레니즘적인 동방인, 즉 서방적인 동방인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이 정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넷째, 아우구스투스는 오리엔트 일대에 널리 퍼져 살면서 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 민족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대교도는 어디에 살든, 예루살렘 신전에 일정한 헌금을 바칠 의무가 있었다. 예루살렘 신전에 돈이 모인다는 것은 그 돈을 한손에 틀어쥐고 있는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민족주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유대교 제사장들을 강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예루살렘만 안정되면, 오리엔트 일대의 유대인 사회도 안정되기 때문이다. ... (중략)
(헤롯왕의 사후) 이리하여 서기 6년부터 예루살렘과 유대 정부는 로마의 속주로 바뀌었다. 하지만 속주로는 B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장관(프로쿠라토르)으로 파견된 사람은 로마의 제 2계급인 "기사계급" 출신이고, 직속상관도 다른 속주 총독처럼 황제가 아니라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된 셈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중부를 B급 속주로 만든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을 경시했기 때문은 아니다. 아우구스투스도, 그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도 적당한 후계자가 없을 때는 일단 속주로 만들어놓고, 다음 후계자가 자라기를 기다리곤 했다. 일단 본사에서 책임자를 보내놓고, 현지인 가운데 적임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업무를 인계하는 느낌이다.
유대 통치는 유대인에게 맡긴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유대 담당 장관의 관저도 예루살렘에 두지 않고, 그리스계 주민이 많은 교역도시 카이사레아에 두었다.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도 온건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군사력도 3천 명 정도밖에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것도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아니라, 시리아에서 모집한 그리스계 지원병이어서,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이 많은 유대인과 접촉할 때도 의사소통에는 장애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을 자극하기 않기 위한 배려임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지역을 속주화하면, 로마인은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인구나 재산을 조사한다. 이런 일을 하는 관습이 없는 유대인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런 조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속주세를 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낸다면 모르지만, 멀리 있는 황제에게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다른 민족의 안전까지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야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왜 우리 유대인이 로마인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것은 유대교 신전에 내는 돈 이외에 로마에도 돈을 내야 하느냐는 뜻이다.
종교가 안전 보장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대인이 얼마나 적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속주화가 진행되는 이 어려운 시기에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로마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 유대 민족은 바윗돌처럼 단단히 단결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항구도시의 유대인과 농민이나 예루살렘 하층민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유대교도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유대인은 대부분 공업이나 금융이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로마의 직할 통치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들은 또한 인구조사와 속주세의 필요성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유대를 속주화하는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아우구스투스가 등용한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는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온건파 유대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구도시의 자치권을 재확인한다. 이리하여 유대 중부에서는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이 내정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이 정책의 목적은 우선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로마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급진파와 온건파를 분리하는 것이 이 정책의 목적이었다.
퀴리누스 총독은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권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종교인이 사법에까지 개입하는 데 있다. 신이 내려준 율법에 따라 인간이 재판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로마는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을 맡는 것을 인정해주었다. 물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로마법에 따를 의무가 있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다. 하지만 로마 시민권을 갖지 않은 유대교도는 유대법을 따르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유대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했다. 모세의 십계도 그 절반은 살인, 간음, 절도, 위증, 가택침입을 금지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로마법에서도 금지되어 있으니까, 유대법에 맡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형 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 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예루살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을 받고, 당시 유대 장관인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필라투스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보이면서, 너희(유대측)가 결정한 일이니까 나(로마측)는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말로 예수의 처형을 허락했다.
만약 필라투스가 유대측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기가 구현하고 있는 로마법에 따라 행동했다면,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의 이름을 간단히 입에 올리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극형을 당해 마땅한 죄지만, 많은 신을 섬기는 로마에서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도, 실제로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라면 로마법에서는 추방으로 끝날 문제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 죽지 않고 흑해 같은 곳으로 추방되었다면, 나중에 기독교 확대의 발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필라투스는 조국 로마에 해를 끼쳤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는 필라투스가 유대 장관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대인 대책은 유대인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로마의 보편성도 지키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동전 주조권은 제국에 속해 있으면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도시가 갖고 있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같은 "자유도시"들도 동전 주조권을 가졌고,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도 동전 주조권만은 원로원에 속해 있었다. 다만 로마의 직할 통치를 받는 속주에는 동전 주조권이 없었다. 속주에서 쓰이는 금화와 은화 및 동전은 모두 로마 통화였다. 따라서 거의 모든 돈에는 당연히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속주가 된 이상, 유대에서도 헤롯 시대처럼 왕이 주조하는 통화가 아니라 로마에서 주조된 통화가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 모세의 십계에도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퀴리누스 총독은, 유대 속주에서는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동전에 한하여 황제의 옆얼굴이 새겨지지 않은 통화를 만들게 했다. 금화나 은화는 일반 서민이 만져볼 기회도 드물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퀴리누스는 유대교도가 비유대교도의 예루살렘 신전 참배를 금지하고 있는 것도 존중하여, 이것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오리엔트의 모든 종교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예루살렘 신전에만큼은 아내 리비아와 함께 봉납품을 바쳤다.
속주민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인을 자극할 수도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지배자 로마를 상징하는 군사력인데, 그 병력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서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카이사레아에 주둔시켰다. 카이사레아에 기지를 둔 로마군 병사가 예루살렘으로 출동해야 할 경우에도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기는 카이사레아 기지에 놓아두고 출동하도록 규정했다.
시리아 총독 퀴리누스가 진두지휘하여 실시한 아우구스투스의 유대대책은 티베리우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아니,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더욱 철저하게 실시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황제가 티베리우스로 바뀐 뒤에도 퀴리누스는 여전히 시리아 총독 자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예루살렘 신전에 바쳐진 로마의 봉납품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것조차도 신격이 된 선황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카이사레아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예루살렘 신전이 비유대교도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교도가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또한 유대교 대제사장이 의식을 치를 때 입는 제의는 로마측이 예루살렘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유대측에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때까지는 종교 의식을 치를 때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의를 빌려와야 했고, 이교도인 로마인들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한 일주일의 "정화" 기간을 두어야 했다.
퀴리누스가 죽은 뒤에도, 티베리우스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은 탓도 있어서 유대 민족에 대한 통치는 대체로 무사히 진행되었다. "대체로"라고 말한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인과 직접 접촉한 유대 장관들 중에는 유대 민족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티베리우스에게 알려지면 당장 해임될 뿐 아니라, 본국으로 소환되어 재판까지 받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서기 26년부터 10년 동안이나 유대 장관을 지낸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좋은 예다.
그가 해임된 첫번째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주민의 소요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불만 원인이 반드시 로마측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항상 약자의 처지에 있었던 민족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런 유형의 사람들은 의지할 거라고는 피해의식밖에 없기 때문에 강자에 대해서는 과민 반응을 보이기 쉽다. 다른 속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끝날 일도 유대인과의 사이에서는 문제가 되고는 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유대 민족 대책을 예루살렘과 유대 중부의 유대인만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 전체로 확대하여 실시했다. 그것도 단순히 확대한 것이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환경 차이를 고려하여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대처했다. ... (중략)
티베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마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위와 같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가 로마 제정을 그렇게까지 칭찬한 것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로 이어진 한 세기 동안의 로마 통치가 제국 안에 사는 유대인의 처지에서도 만족스러웠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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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가 발췌한 위 글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는 걸 방지하고 싶어요.
제가 이 글을 발췌한 건 유대인이나 기독교 신자분들을 능멸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구 싶구요, 전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에 실린 위 견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이 책이 과연 훌륭한 책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면 제가 직접 조사에 나서거나 다른 역사책과 비교를 해봐야 하는데, 둘 다 저에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이 책은 제가 로마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데에 거의 유일한 참고서로 쓰이고 있습니다.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에는 저자가 부단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있기 때문에, 없는 역사를 지어내 쓰고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저는 영화 상에서 그려지는 여러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변형 ("왜곡" 이라 하지 않고 "변형" 이라 하겠습니다) 에는 상당히 너그러운 입장입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300 (2007))에 관해서도 역사 왜곡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들이 제기되었었는데요, 영화에서의 역사적 사실의 변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시는 분은 백이면 백, "이렇게 왜곡된 내용을 관객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며 관객들을 걱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영화" 라는 상품은 1차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문화 소비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해보자면, 저는 역사 왜곡이나 변형보다도 재미없는 영화가 나오는게 더 싫군요.
대신 "영화" 라는 매체가 특정 이데올로기의 노골적인 전도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만큼은 위험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딱히 두 주제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은 나와있지 않지만, 현명한 관객이라면 실제와 허구를 구분할 줄도 알아야죠.
게다가 저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여 보자면, 저는 배경지식의 공부에 충실한 타입이라서 영화는 즐기고, 배경지식 및 역사는 따로 공부해서 그 갭을 극복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에게 침 튀기며 영화의 문제점을 설파하거나 배경지식을 주입할 생각도 없구요.
영화가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면 보러 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영화는 영화일뿐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의 논쟁은 영화가 가진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주제입니다.
영화사의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 <The BIRTH of NATION (국가의 탄생, 1915)>
이 주제에 대한 심도깊은 고민은 제가 후에 영화 <300 (2007)>의 리뷰를 올리면서 다시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선은 이 포스트를 읽으신 분들이 재미와 지식을 함께 얻어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긴 포스트를 닫습니다. ^^
출처 : 네이버 영화 hayan_111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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