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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6(수) ◈ 눅 7: 1-17 겸손한 믿음을 칭찬하며 우는 자에게 은혜 베푸신 주님
7: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7: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7: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7: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7: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7: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7: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7: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주 해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서 복된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셨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님을 위하여 미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떠나는 자”가 누구인지도 말씀해 주셨다.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자, 나쁜 열매를 맺는 자,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함으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 하나님은 죄인에게조차, 불신자에게조차 인자하시다. 예수 생명으로 살아가는 제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삶으로 나타내게 되어져 간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셨고, 또한 그분의 사역(치유와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신다.
2.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자, 소중히 여기는 종이 거의 죽게 된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다.
1) 유대인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와서 “그 백부장은 선생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백성을 사랑하여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종을 고쳐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 유대인의 장로들은 회당의 주요직에 있으면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했지만 유대 장로들은 이방인인 백부장의 선의와 그가 회당을 지어준 것을 높이 평가하여 백부장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로 추천한다.
3. 예수님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기 위하여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며 그의 집에 가까이 이르셨다. 그러자 백부장은 자기의 친구들을 예수께 보내어 이 말을 전하게 하였다.
눅 7: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 7: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 7: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 백부장이 장로들을 보내고, 친구들을 보낸 것은 백부장이라는 높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편하게 예수님을 초청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2)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너무나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여서 감히 자신은 자신의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감히 주님을 만나 뵈올 자격조차 없어서 장로와 친구들을 보낸 것이었다.
4. 백부장의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생각나게 한다. 표적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가 죄인임을 깨달으면 “주님 앞에 자신이 설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된다. 백부장도 동일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이다.
1) 죄인 된 자신이 어찌 감히 주님 앞에 서며, 주님을 집에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며 자신을 더욱 낮추며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한다.
2) 백부방은 예수님이 집에 와서 종에게 손을 대거나, 명령하지 않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종이 치유될 것”을 믿을 만큼, 예수님의 존귀와 능력을 믿었다.
5. 그러면서 백부장인 자신과 종과 군인의 관계를 예로 든다.
1) 자신이 종이나 군인에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하면 한다는 것이다.
2) 백부장은 예수님이라는 주인 앞에서 “종과 군인”에 불과한 존재이니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이 가진 죽을 병도 예수님 앞에는 “종과 군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 백부장의 믿음의 중심에는 겸손이 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도 종류가 있다.
2) 겸손한 믿음, 사랑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은 기복적인 믿음, 자신의 성공을 위한 믿음, 소원성취와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심지어는 이기적인 믿음, 자신의 탐심과 집착이 이뤄진다는 믿음도 있다. 또한 사역의 성과나 자화자찬을 통하여 자신을 과시하는 믿음도 있다.
3) 백부장은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믿음 즉 겸손하고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예수님 앞에서는 겸손한 믿음을, 종을 향하여서는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4) 가장 큰 죄는 교만이고,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이다.
- 믿음, 역사, 성취, 열매, 은사 등을 가진다 해도 그로 인하여 교만해 지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만다.
7. CS루이스는 “겸손”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자라고 하였다.
1)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영광으로 인한 기쁨은 곧 “자화자찬”이라는 치명적인 독, 즉 교만으로 변하게 된다(영광의 무게, p24).
2)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에 속한 기쁨과 땅에 속한 기쁨으로 충만했던 성도들이 그 후에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주장하게 되는 것을 흔하게 본다.
3) 그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자랑하는 자화자찬이라는 교만에 빠진다. 물론 자신은 하늘의 기쁨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지 교만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4) 그리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처럼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라고 촉구하거나 가르친다.
8.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 치유, 은사, 기쁨을 충만하게 받고도 겸손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 비결은 무엇인가?
1)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기쁨, 치유, 은사, 열매)보다 크고, 은혜가 선물을 압도해야 한다.
2) 바울처럼 “나의 나됨”이 위해다고, 자신의 수고와 열매가 엄청나다고 해도, 주님의 은혜가 그보다 훨씬 크면 교만하지 않게 된다. 기쁨을 누리면서도 겸손하다.
3)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빈이 강조한 “전적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깊은 은혜는 겸손은 물론,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누리게 한다.
9. 백부장이 친구들을 통하여 전하는 믿음의 고백을 들은 주님은 기뻐하면서 말씀하셨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 여호와이신 예수님이 백부장의 고백과 믿음을 보고 “놀랍게” 여기신다. 이것이야 말로 놀라운 일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믿음”을 보고 놀랍게 여긴 것이 몇 번이나 될까?
2) 예수님이 놀란 것은 그의 “믿음”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기적도 믿은 이들이 있었다.
3) 예수님이 놀란 것은 “그의 겸손”에서 나오는 “믿음”이었다.
4) 겸손한 믿음이 가장 존귀한 믿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서는 이만한 믿음, 이렇게 겸손에서 나오는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셨던 것이다.
10. 가장 놀라운 믿음, 가장 겸손한 믿음이 구약을 믿어온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있었다 것이 또한 놀랍다.
1) 그런데 어쩌면 유대 전통과 율법을 지켜오지 않은 것이 바리새인들이 빠진 교만의 덫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일 수도 있다.
2) 예수님은 겸손한 믿음, 자신을 낮추는 믿음을 가장 칭찬받는 믿음이라고 하신다.
3) 겸손한 자가 주님과 그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이 놀랍게 여기며 칭찬하는 믿음이 된다.
11. 물론 그 종은 치유되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여 주신다.
1) 믿음대로 되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은 없다. 주님의 은혜로 종은 치유된 것이다.
12. 11-17절은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적이다.
1) 과부의 외아들이 메여 나오는 것을 본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자,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13. 예수님은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죽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1) 6장 21절에서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말씀대로 “우는 자를 위로 하시며” 우는 자를 웃게 하신 주님이시다.
2) 예수님은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면 낫게 하신 것처럼, 시체를 만지면 율법에서는 부정해진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시고 메시아적 행위로서 죽은 자를 살리신다.
3)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자를 살려낸 것이(왕상 17:17-24; 왕하 4:18-37) 메시야를 증거하는 사역이었음을 보여 준다.
- 나인성의 과부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은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14.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한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 6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7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친히 경험하게 해 주신다. 백부장과 나인성의 과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친히 경험하였다.
15. 둘의 차이점은 백부장은 가장 겸손하고 놀라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누리게 된다.
16. 한편 나인성의 과부는 예수님께 구하지도 못하였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에 함몰되어 심히 슬퍼하였고, 죽은 아들을 예수님이 살릴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1) 그러나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 예수님은 남편과 아들, 즉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황폐하게 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믿음조차 가질 수 없는 과부에게 일방적으로 찾아가셔서 전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2) 과부는 나인성으로 찾아와 주시고,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살려주신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받고 웃는 자가 되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할 때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누리게 되기도 한다.
17. 백부장과 과부는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경험하였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
1)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과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통하여 두 사람 모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 나의 묵상
창조주이시며, 여호와이신 주 예수님, 사람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시며 그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셨다고 하심이 참으로 놀랍다. 예수님이 우리의 겸손을 보시면 놀라시며 기뻐하신다. 아, 그런데 나는 복음을 믿는 믿음, 성령의 역사로 치유와 은사가 주어지는 믿음 등은 배우고 경험한 적이 있지만, 겸손한 믿음에 대해서는 배우지도 못했고, 경험한 적도 없다.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 인하여 하늘을 날것 같은 기쁨을 맛 보았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한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쁨은 곧 교만이 되어져 갔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기쁨을 맛본 수많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이 교만하게 된 것을 목도하였다.
복음을 만난 사람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 그 훌륭해 보이고 헌신의 본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이 교만해지며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를 속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 CS루이스이 통찰이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 찾아오는 기쁨은 곧 교만이 된다. 구체적으로는 자화자찬을 하게 되어져 있다. 자신을 성령충만한 사람,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라며 자랑하고, 남들은 나같이 않다고 여기는 교만에 빠지는 것을 수 없이 보았다.
나는 백부장의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여 두려워 떨며 “말씀하시면....그대로 됩니라.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하는 겸손한 믿음,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겸손한 믿음이 없다. 사역 적인 믿음, 경험적인 믿음은 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자아 보호와 자기 자랑에 매여서 겸손한 믿음이 되지 못하였다. 기쁨이 교만으로 변하였지만, 번아웃으로 인한 비참함으로 인하여 그나마 지나친 교만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주님은 나를 광야로 보내심으로 교만에 중독되지 않게 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백부장의 겸손의 믿음을 어떻게 얻고 누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주님의 은혜, 전적인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어거스틴과 칼빈처럼 알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과부에게 주어진 믿음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저 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과부,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철저한 절망 가운데 슬퍼하는 과부에게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녀에게 웃음을 주시고, 무엇보다 귀중한 하늘에 속한 믿음을 주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완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도 없고, 미움을 변하여 사랑할 수도 없고, 화를 변하여 용서할 수도 없고, 슬픔을 변하여 스스로 웃을 수 없는 나다. 심지어 과부의 믿음도 없다. 그녀처럼 철저히 절망하고, 철저히 포기하고, 철저히 아무것도 아닌 자로 낮아지지도 못한다. 그녀는 백부장의 믿음은 없었으나, 백부장처럼 낮아져 있었다. 그 낮아짐이 은혜를 입은 한 요인일 것이다.
그래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만이 아니라, 과부처럼 절망하는 자를 찾아와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소망을 두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이미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6:35)”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말씀해 주셨다. 그 주님이 나를 인자하심으로 대하시며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이신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나에게 생명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은혜를 입었지만, 그 은혜가 모자란 듯이....더 은혜를 구하는 자다. 감정적인 은혜, 관계적인 은혜, 환경적인 은혜를 구하고 있으니...“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다. 감사와 찬양이 합당함에도 나는 그저 요구하고 간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그 인자하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다. 나의 수치를 가리워 주신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하여 주신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백부장처럼 경배하지 못하는 자, 탄식하며 과부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과부요, 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전적인 은혜, 주권적인 은혜를 바라며 “죽은 자요 과부”임을 고백한다.
부정한 나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하실 주님을 바라본다. 일정한 빛같이 다가오시는 주님을 힘써 알기를 원한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복음을 통해 생명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 땅에 매여 있던 나의 영혼이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원한다. 주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 두셨으니, 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알기 원한다. 이미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십자가에서 발견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한다. 백부장에게도, 과부에게도, 나에게도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묵상 기도
주님,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부의 절망, 과부의 탄식, 과부의 없음, 과부의 눈물을 구합니다. 이 땅에서 모든 헛된 소망을 끊고 사람에 대한 모든 기대가 소멸되게 하여 주십시오. 더 이상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에 대한 모든 자랑을 완전히 버리게 하옵소서. 남편도 아들도 잃어 탄식하는 과부가 되어 주님을 만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이미 베푸신 은혜, 아들을 내어 주신 은혜, 생명 주신 그 은혜를 알며 감사하게 하소서. 주님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인 성의 과부를 찾아와 주셨듯이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제가 주님을 찾아가야 마땅하지만 주님이 찾아와 주셔야 하는 죄인입니다. 전적인 은혜, 주권적인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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