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왕후"(莊烈王后)는 인조(仁祖) 2년(1624년)에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태어나
"인조"(仁祖)의 정비(正妃)인 "인렬왕후"(仁烈王后)가 1635년에 승하(昇遐)하자,
"인조"(仁祖) 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왕비(王妃)에 책봉(冊封)되었다.
그러나 후세를 남기지 못하고 입궁11년 만인 1649년에 26세의 나이에 "인조"를 먼저 떠나보내고,
법적인 아들 17대 "효종"(孝宗)을 1659년에, 18대 "현종"(顯宗)을 1674년에 먼저 보내고,
19대 왕인 "숙종"(肅宗)14년(1688년)에 64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하여 1688년12월에 동구릉에 안장(安葬)되었다.
인조(仁祖)의 정비(正妃)인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죽은후,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정식 책봉된 때가 "인조"는 43세였으니, 무려 29살 차이였다.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 "봉림대군"보다도 더 어렸고, 손자인 "현종"(顯宗)과도 겨우 17살 차이였다.
"중전"(中殿)으로 입궁했을 때는 이미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後宮)인
"소용 조씨"(昭容 趙 氏)가 악녀같이 모략을 일삼으며 궁중을 쥐락펴락하고 있을 때였다.
"조 소영"(趙 昭容)은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투기와 이간질까지 심했기 때문에,
"장렬왕후"(莊烈王后)는 자연히 "인조"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인조"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고, 왕비(王妃)자리는 그냥 허울 뿐이었다.
왕비 시절 소생이 없고 권력 기반을 형성하지 못한 것은
이후 그녀가 대비(大妃) 자리에 올랐을 때도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배경이 되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에게
어머니 소리를 듣고, 효도를 받으며 비교적 나은 생활을 했다.
그러나 왕비로서 생애 6번이나 "상복"(喪服)을 입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였다.
"남편", "의붓아들"(효종), "의붓며느리"(인선왕후), "의붓 손자"(현종), 손자 며느리(현종 비), 증손 며느리 등등,,,,
상복을 입은 일이 많다 보니, 현종(顯宗)때는 "효종"과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서 논란이 인 적도 있는데, 이것이 조선 역사에서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효종"(孝宗)이 재위 10년만에 승하하자 36세에 할머니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顯宗)까지 젊은 나이에 단명하자
족보상 증손자가 되는 "숙종"(肅宗)이 왕으로 즉위하며 51세의 나이로 왕실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장렬왕후"는 무려 4세대에 걸친 국왕의 치세를 본 셈이다.
평생을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가 한 궁녀를 총애하여 처소로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훗날의 "희빈 장씨"(禧嬪 張氏)이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는 곧 "숙종"의 눈에도 띄어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가까워졌다.
그런데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행동이 매우 방자한데다 출신도 미천하며
"남인"이었기 때문에 "서인 세력"의 중심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곱게 보지 않았다.
"명성왕후"(明聖王后)는 "현종"(顯宗)의 정비(正妃)이자 "숙종"(肅宗)의 어머니로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서인들의 핵심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이지만 성격이 담대해서 남편인 "현종"(顯宗)이 후궁을 못 뒀다는 말이 있고, 정사(政事)에 관여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중종(中宗)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거론하며 "명성왕후"(明聖王后)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강한 성격을 지녔던 "명성왕후"(明聖王后)는,
기어코 시할머니가 아끼는 궁녀 "희빈 장씨"(禧嬪 張氏)를 가차없이 내쫓아 버렸다.
시할머니가 아기는 궁녀를 내쫓는 것은 지금에 봐도 무례한 행동인데,
조선 시대 당시에 그랬으니 "명성왕후"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훗날 "장렬왕후"가 "희빈 장씨"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명성 왕후" 사후의 일이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장렬왕후"는 말년에는 손자 며느리에게도 치인 것으로 보인다.
평생 자식 없이 정쟁과 궁중의 암투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고,
젊은 시절 앓은 "풍증"(風症, 통풍)으로 거동도 불편했던 그녀는,
1688년 9월20일 "창경궁"의 "내반원"(來般院)에서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장렬왕후"가 세상을 떠난 "내반원"(來般院)은 내시들의 처소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에 의문이 있다.
"장렬왕후"의 능은 "단릉"(單陵)이다.
남편인 "인조"(仁祖)와 정비(正妃)인 "인렬왕후"(仁烈王后)가 먼저 세상을 떠
"파주 장릉"(坡州 長陵)에 합장(合葬)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홀로 쓸슬하게 지내고 죽어서도 홀로 뭍혀 있는 것이다.
"휘릉(徽陵)"의 특이한 점은 정자각(丁字閣)에 익랑(翼廊)이 있다는 점이다.
"맞배지붕"에 풍판(風版)이 있는 정자각으로 익랑이 있는 곳은 "동구릉"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비각"(碑閣)
비의 앞면.
비의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