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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세 신유정(辛有定) 편안도안무사(정_3품)애 대하여
[정의] 1347(충목왕 3)∼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내용]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아버지는 판개성부사 부(富)이다.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고 용맹이 뛰어났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의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그는 곧 태조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제가 된 방원(芳遠 : 후의 태종)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趙涓)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
제11세 신부(辛富)에 대하여
제11세 신부(辛富) : 축산군(鷲山君),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_정3품)/ 초당공파
제10세 신원경(辛原慶) 호 초재(號 草齎), 좌정승, 도첨의,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의 자로
제11세에 신예, 신부, 신순, 신귀등의 4형제중 2남으로
고려 충숙왕 을해 1355년(공민왕4년)생, 축산군(鷲山君)으로 판개성부사
1359년 홍건적의 난 때 출전하여, 이듬해 함종 전투에서 전사
[자료/ 01] 제12세 신유정(諱,有定, 諡_武節公) 평안도안무사(정3품)에 대하여 辛有定을 判江陵大都護府事 兼兵馬都節制使로 삼다. 태종 006 03/08/20(을축) /1 273면전 도안무사 신유정(辛有定)이 졸(卒)하였다. 유정은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사람인데,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의 아들이었다.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되었다가 여러번 옮겨 정용 호군(精勇護軍)에 이르렀다. 병인년에 족형(族兄) 충청도 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을 따라 왜구를 쳤는데, 승원(承源)이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전진하기를 주저하니, 유정이 칼을 빼어 승원이 탄 말을 겨누면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원수(元帥)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으니, 국가에서 장수를 보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싸워야 합니다." 하니, 승원이 분격(奮激)하여 적과 싸워서 크게 이겼다.
또 남원(南原)의 싸움에서는 유정이 혼자서 말을 타고 적을 추격하다가 말이 넘어졌다. 그때 왜적이 유정의 배 위에 걸터앉아서 칼을 빼어 찌르려고 하니, 유정이 왜적의 불알을 움켜잡고 몸을 뒤쳐서 칼을 빼앗아 도로 찔렀다. 승원을 따라다닌 지 4, 5년 동안에 적과 싸운 것이 25번이나 되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니, 유정의 공이 많았으므로 용감하다고 이름이 났다.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시종(侍從)하여 여러 해가 되었는데, 후에 왕위에 오르자 원종 공신권(原從功臣券)을 내리고 겸하여 토지와 노비까지 내렸다.
계유년 가을에 삼사 좌자의(三司左咨議)로 옮겼다가 형조 의랑(刑曹議郞)으로 전직되니, 어떤 중이 회암사(檜巖寺) 삼강(三剛)의 인신(印信)을 위조했는데, 전의 관원이 사죄(死罪)로 논단하였으나, 유정이 혼자서 의심하기를, "인(印)도 경중(輕重)이 있으니 죄도 차등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닐까." 하고, 다시 위조관율(僞造關律)에 의하여 따져, 인신(印信)을 위조한 율(律)로 곤장 1백 대에 유(流) 3천 리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후 병조 의랑으로 옮겼고, 정축년에 국가에서 각도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15진(鎭)의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을 때에 지혜와 용맹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제수(除授)하게 되었는데, 유정이 맨 먼저 선발되어 이산진(伊山鎭) 첨절제사가 되었다. 무인년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가 9월에 파직되었다.
경진년에 태종이 동궁(東宮)이 되니 유정을 천거하여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로 삼고, 공조 예조 형조 삼조(三曹)의 전서(典書)에 역임(歷任)되었다. 계미년에 왜적이 강원도에 침구(侵寇)하니, 임금이 유정을 불러서 말하기를, "일이 심히 급하므로 유사(有司)의 천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바로 경(卿)을 보내니 속히 떠나라." 하여, 곧 그날로 길을 떠났다. 왜구가 물러가니 그대로 판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다.
임기(任期)가 차서 좌군 동지총제로서 조정으로 돌아오니, 강릉부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힘을 모아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다시 승녕부 윤(承寧府尹)으로 천직되었다가 정해년에 나가서 의주도 병마사(義州道兵馬使)가 되었다. 칙사(勅使) 황엄(黃儼)이 북경으로 돌아갈 때에, 요동 지휘 천호(千戶)의 군인들이 황엄을 맞이하려고 의주(義州)에 이르러 한 달 남짓 머무르면서 사물(私物)을 강제로 팔므로, 유정이 금지하니 듣지 않았다.
황엄이 강을 건널 때 객관(客館)에 깔 자리[鋪席]를 빼앗아 사물을 싸는 자가 있으므로, 유정이 장사(壯士)를 시켜 주먹질을 하니, 그 사람이 피를 흘려 얼굴에 뒤덮어 쓰고 울면서 황엄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유정이 황엄의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유를 상세히 알리니, 황엄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도 무례한가." 하니, 유정이 관대(冠帶)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소방(小邦)에 의관(衣冠)을 내리시어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였는데, 지금 관인 등이 변경을 침요하여 멋대로 놀아나니, 이제는 의관과 예의로써 그들을 대우할 수 없습니다.
먼저 관인을 죽인 후에 내가 관인이 범한 것을 글로 써서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도 죽겠습니다." 하며, 눈을 똑바로 뜨 고 급히 장사(壯士)를 불러 말하기를, "허리에 찰 칼을 가지고 오라. 먼저 한 사람의 머리를 베고 강을 건너가겠다." 하니, 황엄이 얼굴빛이 변하더니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드디어 울면서 호소한 사람을 매질하고는 술을 놓고 즐기다가 작별하며 말하기를, "변장(邊將)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될 것이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경원진 도병마사(慶源鎭都兵馬使)로 옮겨졌는데, 조정에서 사조하는 날에 임금이 이르기를, "경원(慶源)은 곧 선조께서 처음 일어난 땅인데, 내가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을 덜게 하는 일에 경(卿)을 버리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다른 재능은 없고, 다만 적심(赤心)이 있을 뿐이오니, 어찌 힘을 다하여 진(鎭)에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몇 달 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다.
경인년 봄에 야인이 경원(慶源)을 침범하여 병마사 한흥부(韓興富)를 죽이니, 국가에서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을 보내어 도원수를 삼고, 유정을 발탁하여 좌군 도총제로 임명하여 부장(副將)으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11월에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옮겼다가 임진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갑오년에 평안도 도안무사가 되었다가 을미년에 병 때문에 하직하고, 한가로이 있은 지 10여 년만에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 74세이었다.
유정은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어, 남의 실수를 보고는 용납할 줄을 모르고 반드시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한 집안 사람이 궁핍(窮乏)함을 알리면 안색을 엄정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씩 먹는다고 속언(俗諺)에 말하지 않았는가. 걸인이 죽어도 남는 옷은 있다고 하니,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였다.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은근히 학문을 권면(勸勉)하며 일찍이 스스로 탄식하기를, "젊을 때에 배우지 않은 것이 바로 일평생의 한이다." 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내관(內官)을 보내어 조위(弔慰)하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부의(賻儀)를 내리고 무절(武節)이란 시호를 내리니, 강강(剛强)하고 곧게 다스림을 무(武)라 하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아들은 하나인데 인손(引孫)이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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