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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리 전경 / 운주산(806m) |
인비리 암각화 고인돌 |
인비리 암각화 고인돌 (확대) |
ㆍ뒤짝골 뒤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강(康)씨이고, 그 후 하(河)씨와 경주 김(金)씨가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는데, 늦게 들어온 김씨의 세도가 강해지자 강씨와 하씨는 떠나 버렸다. 나중에 마을이 번창하여 일장동(一場洞)과 대사동(大寺洞)으로 나뉘어지고, 장터가 생기고, 역(驛)이 생겨나자,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민들의 심성이 거칠어지는지라 당초에 살던 어진 사람들이 숨어 버렸다 하여 인비(仁庇)라 했다 한다.
인비 하면 운주산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운주산은 예로부터 기계현의 진산(鎭山)이다. 산이 높아 늘 구름이 머물러 있다 하여 운주산이라 불렀다 하는데, 이 산의 지맥이 힘차게 뻗어내린 곳에 인비리가 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일지라도 멀리서 보면 북서쪽의 남계리 뒷산과 남쪽의 봉계리 뒷산을 ‘좌청룡우백호’ 로 하는 ‘명당’ 임을 느끼게 한다.
인비리를 말할 때마다 명당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명산 밑에 큰 인물 난다’ 는 조상 전래의 믿음 때문이다. 이 마을은 근래에 장성만 4명이나 배출했다. 2군사령관을 지낸 진종채 장군을 비롯, 최경남, 최선식, 최석구 장군 등 4명의 장군에게서 9개의 별이 나왔다. 단 한 명의 장성도 배출하기 어려운 터에 4명이 탄생시킨 마을이다보니 사람들은 흔히 이 마을을 ‘별들의 고향’ 이라 일컫는다.
ㆍ대기터 기계에서 죽장, 청송으로 이어지는 국도와 기북, 상옥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의 갈림길에 있어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조선시대에는 역(驛)이 있었으며, 장이 섰다 한다. 대기터란 명칭은 기북, 상옥 등지에서 온 장꾼들이 고갯마루에서 호환(虎患)을 당하는 일이 가끔 일어나 이 곳에 사람들이 모일 때가지 대기했다는 데 유래한다. 작은 마을이 능선을 경계로 하여 대곡리와 기계면 인비리로 나뉘어 있다. 이 마을 앞에는 15기 정도나 되는 지석묘군이 있는데, 그 중에는 윗면에 성혈(性穴)이 새겨져 있는 게 있고, 옆면에 돌칼모양의 암각화가 있는 게 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 미현리 美峴里
미현리(美峴里)는 기계에서 손꼽히는 산간오지이다. 남쪽으로 달리는 비학산(762m)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형성된 골짜기에 당골(堂谷), 안재내미(內峴), 바깥재내미(外峴), 중재내미, 옥골, 미노리(美老里), 부남 등의 자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 때 미노리의 ‘미’ 와 내현, 외현의 ‘현’을 따서 미현(美峴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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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운재 / 기계유씨 시조인 유삼재를 추모하는 재실 |
미현리 전경 |
현내리에 있는 유삼재 유허비 |
ㆍ당골(堂谷) 미현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마을어귀에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ㆍ안재내미(內峴) 한갓골재 안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산촌이다. 월성김씨 재실이 있다.
ㆍ바깥재내미(外峴) 안재내미 입구에 위치한 마을이다. 월성이씨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와서 일군 마을이라 한다.
ㆍ중재내미 안재내미와 바깥재내미 중간에 위치하며, 임진왜린 때 안동권씨와 여강이씨가 들와와 일군 마을이라 한다.
ㆍ옥골 미노리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곳에 월성이씨 기계 입향조인 이말동(李末仝)을 기리는 옥동재(玉童齋)가 있어 옥골이라 불렀다 한다.
ㆍ미노리(美老里) 예로부터 장수 마을로 이름난 곳으로 건강한 노인들이 많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 한다.
ㆍ부남 어원은 ‘부운암(富蕓庵)’ 인데, 현재 부운재(富蕓齋)가 있는 곳에 있었던 절 이름이라 한다. 근년에 새로 화려하게 단장한 부운재는 기계유(紀溪兪)씨 시조인 유삼재(兪三宰)를 추모하는 재실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흔히 유태사(兪太師)라 부르는 유삼재는 신라말에 아찬을 지낸 분으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스스로 항복하자, 그의 아들 유의신(兪義臣)이 이에 불복했기 때문에 왕건이 유의신으로 하여금 이곳의 호장(戶)長)으로 복속케 하고, 그에게는 태사(太師)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후손들이 여기게 살게 되고, 본관을 기계((杞溪)라 하였다 한다. 이리하여 유삼재는 기계유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유삼재는 기계에 입향한 후 지금의 문성리에 있던 현기를 현내리로 옮겨 왔는데, 현재 현내리 장터 안쪽에는 이를 기념하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부운재는 그의 후손 유명홍(兪命弘)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인 1714년 원래 절이었던 신라 때의 고찰 부운암을 헐고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역시 같은 경상도관찰사로 있던 유명응(兪命凝)과 유척기(兪拓基)에 의해 몇 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화봉리 禾峰里
기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비학산 골짜기를 따라 약 2km 정도 가면 만수면적 20ha나 되는 큰 못이 골짜기를 가로막는다. 이 못이 1955년에 만든 기동지(杞東地)라 한다. 화봉리는 이 못 주변에 거리말, 망봉(望峰), 윗마을(上(里), 야리(野里) 등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흩어져 있는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화봉리(禾峰里)라 하였다.
ㆍ거리말 계전리와 미현리로 들어가는 삼거리 지점이 되므로 ‘거리말’ 이라 불렀다 한다. 화봉 저수지를 만들면서 농토가 많이 수몰되어 동세가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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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봉재 |
거리말 전경 |
야리 전경 |
ㆍ야리(野里) 약 80년 전 김씨(金氏) 집안의 한 가구가 망봉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일제말엽 인구조사 때 이장이 마을 이름을 야리(野里)로 기재한 뒤부터 야리(野里)라 불렀다 한다.
기동지 못둑 위에 올라서면 호수의 물빛 너머로 용궁처럼 아담한 재실이 여러 채의 건물과 함께 눈에 성큼 다가오는데, 이 곳이 기계신씨의 시조인 신태사(辛太師), 즉 신몽삼(辛夢森)의 묘가 있는 화봉재(禾峰齋)다.
태사는 태부(太傅), 태보(太保)와 함께 고려 때 삼사(三師)의 하나로 정일품에 해당하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따라서 태사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당시로선 최고의 영예였다. 신몽삼이 받은 공식 관직은 고려태사보문각대제학검교령원부원군(高麗太師寶門閣大提學檢校靈元府院君)이다.
신(辛)씨는 본래 중국 성씨인데, 당나라 때 신시랑(辛侍郞)이 사신으로 신라에 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게 되면서 씨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다. 그는 파악사(波樂斯)란 벼슬을 지냈지만 이름도 전하지 않을뿐더러 세계(世系)도 잃어 버리자,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金紫光錄大夫門下恃中平章事)를 지낸 경(鏡)을 1세조(世祖)로 하여 내려왔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경의4세손인 몽삼(夢森)의 비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태사공영주신공지묘(太師公寧州辛公之墓)라 명기되어 있어서 원래는 영주신(寧州辛)씨였음을 알게 되었다.
◎ 성계리 星溪里
동쪽은 경주시 강동면과 접하고, 남쪽은 경주시 안강읍과 경계를 이루는 어래산(魚來山)이 휘감는 곳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기계천이 흐른다. 1리에 해당하는 아인골, 2리에 해당하는 화댕이(花堂), 방구뱅이, 싯집매, 화계(花溪)와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아인골을 흔히 칠성(七星)이라고도 부르는데, 1914년 칠성(七星)의 ‘星’과 화계(花溪)의 ‘溪’를 취하여 성계리(星溪里)라 하였다.
ㆍ아인골 3백여 년 전 신유효(辛裕孝)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로 원래는 안강으로 넘어가는 노당재 아래 형성되어 안인곡(安仁谷)이라 부르다가 7개의 고인돌이 있는 칠성암(七星岩) 언덕으로 이주해온 후 칠성리(七星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의 공신 고언백(高彦伯) 장군을 추모하는 사당인 성강사(星岡祀)가 1851년 이 마을에 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1965년에 화대리로 옮겨 성강서사(星岡書社)란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노당재 고갯마루, 마을 안, 마을쉼터 등 마을 곳곳에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노당재 고갯마루의 것은 길이 4.0m, 폭 3.4m, 높이 4.8m 규모로 남한 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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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계리 전경 |
노당재 고인돌 |
아인골 마을 쉼터에 있는 고인돌 |
ㆍ화대이(花堂) 면소재지에서 성계교를 건너면 왼쪽에 나타나는 첫 번째 마을로 옛날 살구나무가 많아 집들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는 데에 유래한다.
ㆍ화계(花溪) 어래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3백여 년 전 월성김씨가 개척했다 하여, 개울 주변에 꽃나무들이 많아서 불려진 지명이라 한다.
ㆍ방구뱅이 화당과 화계 사이에 있는 마을로 고인돌인 큰 방구(‘바위’의 사투리)가 있어 불리어진 지명이다. 고인돌은 1966년 교회가 설립되면서 파손되고 말았다.
ㆍ싯집매 화당 동쪽에 있는 마을로 세 집만 살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성계리에는 고인돌이 많으면서 노당재, 아인골, 성계1리 마을쉼터, 성계2리로 이어지는 일직선 상에 배치되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옛날 마고할미가 이 바윗돌들을 이고 와서 하나씩 놓은 것이라고도 하고, 옛날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돌을 모은다는 애기를 들은 어느 장수가 이 바위들을 지고 중국으로 가다가 성이 완성됐다는 소문을 듣고는 하나씩 내려놓은 것이라고도 한다.
◎ 문성리 文星里
기계면 소재지 남서쪽으로 2km 정도 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문성(文星)과 탑골(塔谷)2개의 자연부락이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성리(文星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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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리 고인돌 |
박정희대통력각하사찰기념비, 새마을사업발상기념비, 문성양수장설치기념비 |
기성현(杞城縣)으로 불렸던 신라 때 기계 지역의 중심지로 현기(縣基)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마을이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마을 입구 들판엔 거대한 고인돌이 서 있다. 문성리 고인돌은 크기가 길이 4.8m, 폭 2.7m, 높이가 3.9m나 되고, 무게가 자그마치 1백톤이나 된다. 이 고인돌은 높이가 자그마치 3.9m나 되다 보니 마치 ‘선돌’같이 보인다 하여 ‘선돌바위’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하여 흔히 ‘선두바위’라 불려지고 있다. 곁에 기대고 있는 아름드리 팽나무와 함께 신성히 하여 매년 정월 보름에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ㆍ탑골(塔谷) 문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 절터에 탑이 있었다고 탑골이라 불렀다 한다.
기계면을 일컬어 흔히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 하는 건 문성리로 말미암는다. 1970년대초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 될 무렵 이 마을이 전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새마을사업 성공 사례지로 인정받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시장, 군수회의를 이곳에서 개최하였다.
문창성이 이 때쯤 다시 나타난 것일까? 이로써 문성리는 영일군 지역에서 가장 먼저 농촌 근대화를 이룩한 마을로 기록되었고, 대통령 시찰을 기념하여 ‘박정희대통령각하시찰기념비’를 세웠는데, 오늘날까지 이 마을 주민들은 ‘새마을운동 발상지’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 봉계리 鳳溪里
봉좌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어리재를 넘으면 영천 수성(守城)으로 통한다. 1리에 해당하는 봉계(鳳溪), 동지뱅이(童子洞), 설내(鋤川), 2리에 해당하는 관평(灌坪), 이동(伊洞)과 같은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이들 부락을 합하여 봉계리(鳳溪里)라 하였다.
ㆍ봉계(鳳溪) 봉좌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에 위치한 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김씨 기계 입향조인 김언헌(金彦憲)이 칡숲을 쳐내고 마을을 일구었기에 벌치동(伐致洞)이라 하던 것을 치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어귀 당산목(堂山木)주변에 여러 기의 지석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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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 |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태사의 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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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계리 전경 |
봉계리 설내숲 |
봉좌암 |
ㆍ설내(鋤川) 치동 어귀에 위치하며, 고려 공민왕 때 홍수로 황폐해진 전답을 호미(鋤)로 복구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좌산에서 발원한 개울 둑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설내숲이 있다.
ㆍ동지뱅이(童子房) 1530년경 월성최씨와 진주강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에서 보면 봉좌산 정상의 봉좌암(鳳座岩)이 동자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ㆍ관평(灌坪) ‘물대기 좋은 들’이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으로 파평윤씨 시조 태사 윤신달(太師 尹莘達)의 묘와 사당인 봉강재(鳳岡齋)가 있다. 파평윤씨 시조에 대해서는 이런 설화가 전한다.
경기도 파평(현 파주)에 용연(龍淵)이라는 못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 못 가운데서 흰구름이 피어오르더니 며칠을 두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쳐대는 것이었다. 마을에 혼자 살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주민들의 마음을 모아 분향하고 친지신명께 빌었더니 천둥 번개가 멎고 한 줄기 빛이 용연으로 내려와 앉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못으로 가 보았더니 옥함이 하나 떠 있었다. 그 속에는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양쪽 어깨에 붉은 사마귀가 있고,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를 지성으로 키웠고, 결국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윤 태사의 묘가 어찌하여 이곳 기계 봉계리에 자리하게 된 것인지는 문명하지 않으나, 시조의 묫자리 덕분이었는지 후손 중에는 숱한 왕비, 명장, 명현들이 나왔고,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수만도 전주이씨에 이어 4백18명으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ㆍ이동(伊洞) 본래 윤(尹)씨들만 사는 마을이라서 윤동(尹洞)이라 하였으나, 차츰 다른 성씨가 이주해 옴에 따라 사람 ‘인(人)’자를 넣어 이동(伊洞)이라 불렀다 한다. 상이(上伊), 하이(下伊)가 있다.
◎ 현내리 縣內里
신라 때 기성현(杞城縣) 또는 모혜현(芼兮縣)이라 친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 기계현(杞溪縣)이라 고쳤다 하는데, 구기자 또는 산버들을 뜻하는 ‘杞’와 시내 계(溪)‘자를 쓴 걸로 봐서 하천가에 구기자나 산버들이 무성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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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내리의 인공림인 서숲 |
도원정사 |
면사무소 뜰에 있는 송덕비 |
원래 현 소재지는 문성리였으나 기계유(杞溪兪)씨 시조인 유삼재(兪三宰)가 이 곳에 입향한 후 현청을 이 마을로 옯겨 왔으므로 현내리(縣內里)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시장터 안쪽에는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면사무소와 초⋅중⋅고등학교 등 관공서가 이 마을에 있다.
예로부터 기계에는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였거니와 신라의 명자 김유신도 이 마을(안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얘기가 전할 정도다. 구전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관직에 있을 때 이 고을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재주와 용맹을 떨친 김유신의 명성을 들은 김춘추가 이곳까지 몸소 찾아와 화랑도에 입단시켰다는 것이다.
현내리, 하면 월성이(月城李)씨 기계 입향조인 이말동(李末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진사가 되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 이 곳에 은거하게 된 사람이다. 호를 도원(桃源)이라 하였는데, 이 곳에서 그는 후학들을 가르치며 마을을 개척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1백여 호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두봉산 남쪽 기슭에는 그를 추모하는 정자인 도원정사(桃源)精舍)가 주변의 아름다운 송림을 배경삼아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또 풍수해를 막기 위해 그가 힘을 기울여 조성하였다는 거대한 인공림인 서숲이 마을 서쪽에 남아 있어 공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2001년 10월에 신축이전한 면사무소 뜰에는 조선조에 세워진 경주부윤 조명정(趙明鼎)과 민영직(閔泳稷)의 송덕비, 영일군수 김옥현(金玉鉉)과 박준무의 송덕비, 1828년 탐관오리의 학정에 항거한 박만용(朴萬龍, 1782~1853)의 공적을 기린 박만용유공비(朴萬龍有功碑)등 5기의 비석이 있다.
어래산의 유래 |
(魚來 고기어, 올래)
⋅ 지금의 장성동 흥해가는 사거리(지금의 우현동 사거리)가 옛날(아버지 어릴적) 포구였는데 지금은 물이 줄어서 송도가 포구가 되었다.
⋅ 그 물줄기가 성계리 어래산 앞에 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바다 물고기가 왔다하여 어래산이라 불린다. 지금도 산 곳곳에 조개껍질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퀴즈 : 옛 포구(지금의 우현동 사거리)의 지명은 무엇일까요?
통일신라시대 (757, 경덕왕 16년) |
퇴화군은 의창군, 근오지현은 임정현, 지답현은 기립현, 모혜현은 기계현, 동잉음현은 신광현으로 개칭되어 의창군에 영속되고, 아혜현은 해아현으로 개칭되어 유린군(현 영덕군)에 영속 |
고려시대 |
의창군은 흥해군, 임정현은 영(연)일현, 지답현은 장기현, 해아현은 청하현, 신광현은 신광진, 장진현은 죽장으로 개칭되어 동경유수에 내속됨(1018) ㆍ1387년(우왕 13 : 흥해군에 통양포수군만호진설치(현 포항시 두호동 지역), 개포의 기지를 이곳에 옮김 |
조선시대 |
초기부터 현재의 포항시내는 북쪽은 흥해군에, 남쪽은 영일현에 분치됨(경계는 나루끝 지역), 죽장부곡을 죽장현으로 개칭 ㆍ1417년(태종 17) : 영일진(현 해병기지사령부지역)설치 ㆍ1460년(세조 5) : 장기현 포이포에 수군만호진 설치(현 모포지역), 청하현에 독진 설치, 또한 청하현에 송라찰방도가 설치되어 9고을 14역을 관장하는 교통통신의 중심지가 됨 ㆍ1510년(중종 5) : 통양포수군만호진을 옮겨 칠포만호진을 신설 ㆍ1731년(영조 7) : 포항창진 설치(최대보관 능력 10만석), 이 때 ‘갯목’의 한자화로 ‘포항’지명 탄생(영일현 북면 포항동) ㆍ1832년 : 처음으로 영일현 읍내면에 도내동(섬안마을)이 형성 ㆍ1871년(고종 8) : 영일현 현청을 생지동에서 대잠동으로 이전, 영일현 고읍면의 도내동이 해도ㆍ상도ㆍ하도ㆍ분도ㆍ죽도동으로 분동 또는 개척됨, 포항진 설치 ㆍ1895년(고종 32) 5. 26 : 8도제 폐지, 23부제로 개편, 군현의 행정단위를 군으로 일원화 할시 흥해군ㆍ영일군ㆍ장기군이 되어 동래부에, 청하군은 안동부에 소속됨 ㆍ1896년(건무 1) 8. 4 : 23부제 폐지, 13도제 실시에 따라 흥해군ㆍ연일군ㆍ장기군ㆍ청하군이 되어 경상북도 관할이 됨 ㆍ1906년(대한제국 10) 9월 24일 : 경주군에 속해 있던 기계면ㆍ신광면ㆍ북안면 일부가 흥해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경주군의 죽장면이 죽남면과 죽북면으로 분면되어 청하군에 편입되고, 영천 월경지 입암봉대가 청하군으로 편입됨. 경주군의 북도면(양북면)과 남도면(양남면)이 장기군에 흡수 편입됨 ㆍ1934년 : 죽북면ㆍ죽남면 2개면 죽장면으로 통합(면사무소 : 입암리), 19리 관할 ㆍ1908년(융희 2) 11. 19 : 장기곶 등대 준공(착공 : 4. 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