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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여요전쟁 이야기---최악의 위기를 헤치고 살아 남는 법을 보여주다
여요전쟁(麗遼戰爭) 또는 고려-거란 전쟁(高麗-契丹戰爭)은
993년 (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요가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아들아, 이제부터는 시간이 지나서..제2차 여요전쟁을 이야기하려 한다.
앞에서 아빠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 기억하느냐?
993년 겨울, 중군사 서희의 외교담판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새로 얻은 영토인 강동육주와 고려와 요의 교류에 대한 다른 입장과 생각이
새로운 전쟁의 불씨라고 했었다.
세월이 지나서 1010년 겨울,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했다.
이번에도 역시 요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했고, 개전의 시기도 역시 겨울이다.
아들아, 흥미로운 것은..북방유목민족은 전쟁시기로 겨울을 선호하는 것 같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아마도 그들의 강점인 기마전술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 아닐까 싶어.
제3차 여요전쟁도 , 여진족이 세운 후금 즉 청나라와 전쟁한 조선 중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한겨울에 전쟁을 했었지.
제2차 여요전쟁이 제1차 여요전쟁과 달랐던 점은
이때 침입한 거란군의 수가 40만이고 요 황제 성종에 의한 친정(親征)이라는 것이다.
1차 전쟁 때, 소손녕이 이끌고 온 군대가 그가 있는 동경부 소속이 주축이 된 군사라면..
2차 전쟁은 요의 황제가 직접 이끄는 최정예군이면서 병력은 몇배나 많았고.
1차 전쟁 때 요 성종이 나이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라 혈기는 넘쳐도 미숙한 점이 있었다면
고려 성종이 노련하고 경험많은 장년의 군주였고,
2차 전쟁 때는 요 성종이 경험 많고 훨씬 더 노련하고 활동적인 장년의 군주가 되었는데..
반대로 고려의 현종은 약관도 되지 못한데다, 재위 1년도 되지 못했고, 실권도 없는
아직 자리잡지 못한 애송이였다는 것.
뿐만이냐 요 성종은 야심만만하고..고려를 확실히 굴복시키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이것은..곧 고려가 1차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적을 마주했고,
고려가 지금껏 만나지 못한 진짜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기도 하지.
수 양제 양광과 당 태종 이세민 이후 약 3백여 년 만에 적의 왕이 친정을 단행한 사례다.
사세가 이토록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그때 고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정치상황이 불안하고 급변을 거듭했지.
1차 전쟁때의 성종이 겨우 38세의 나이로 승하했고 성종의 조카인 목종이 즉위했지.
목종(穆宗,980~1009)이 어릴 때는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했고,
커서도 그녀는 권력을 놓지 못했어.
게다가 천추태후는 정부인 김치양(金致陽, ?~1009)과 사통하여 그 사이에 낳았고,
그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생각에 강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훗날 현종이 되는
조카 대량원군 왕순을 출가시킨 후 자객을 보내 여러번 죽이려 들었지.
역사상 가장 살벌하고 비정한 이모 중 하나인 셈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고, 이는 목종도 불안에 떨게 만들었어.
목종은 자신에게 후사가 없어 대량원군 순을 후계자로 삼고, 그래도 고려의 국왕으로서
천추태후와 김치양에 의해 타성(他姓)의 아이가 고려의 왕이 되는 사태를 막고자
서경에 있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를 불러들여 그를 호위하게 하려 했는데..
목종의 명으로 5천 군사를 몰고 귀경하던 강조가 오히려 목종을 폐위시킨 후에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옹립하고 권력을 잡은 후 목종을 시해하였고,
천추태후는 유폐, 김치양과 그의 일파, 일가는 모두 몰살시켜 버렸다.
이 사건을 강조의 정변이라 부른단다.
아들아, 한마디로..이때 고려는 사세가 이토록 급한데,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급급한 상황이라 전쟁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실권자 강조가 권력을 잡긴 했으나..나라는 여전히 어지럽고,
새로 즉위한 현종의 경우도 왕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킬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혼란스런 고려와는 달리..요는 성종의 치하에서 안정적이며, 고려를 재침할 준비를
착실히 하고 명분쌓기와 전쟁을 개시할 적절할 때를 차분히 기다렸다.
이러니..제2차 전쟁은 그 양상이 제1차 전쟁과는 크게 다를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요 성종은 고려가 요의 승인 하에 어렵지 않게 압록강 연안의 영토를 개척하여
강동육주를 얻어 교통로를 열었고 요의 연호를 쓰고 사대관계를 수립했음에도
송과의 관계를 여전히 단절하지 않고 교류하고 있는 이중적 태도에 분노하고
있었거든..그래서 벼르고 있었지.
그런데, 그 요 성종에게 기다리던 기회가 왔어.
바로 강조의 정변(康兆의 政變,1009)이었지.
요에 강조의 정변 소식을 전한건 동여진(東女眞)이었고.
동여진은 고려의 하공진(河拱辰, ?~1011)이 독단적으로 동여진을 공격했다가
패전하자 하공진이 그 보복으로 여진추장들을 유인해서 몰살시킨데 원한을 갖고
요에 이 소식을 전하며 고려 침공을 부친긴 것이란다.
하공진은 이 실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배길에 올랐지.
1010년 11월, 요 성종이 보병과 기병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고
전쟁 명분은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한 강조를 벌한다는 것이었지.
요의 대군은 고려 최북단의 요새,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을 포위하면서 개전했다.
흥화진에는 순검사 양규(楊規,?~1011.3.), 진사 정성 장군 등이 지키고 있었는데
흥화진 전투에서 훌륭히 싸워 끝까지 성을 지켜냈단다.
요 성종은 첫 전투에서 체면을 구기고 흥화진을 우회하여 통주(通州, 평북 선천)로
진군했는데..통주에는 행영도통사 강조(康兆,964~1011)가 고려의 정병 30만을
이끌고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어.
요 성종의 말마따나 이번 전쟁이 일어나게 된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 된 강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지.
그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그런 결의에 차 있었을거야.
강조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포진해서 요 성종의 대군과 첫 전투를 벌이는데..
고려의 신무기, 검차(劍車)가 위력을 발휘하여 거란기병을 저지하면서 대승을
거두었지.
그런데..강조는 첫 전투의 승리에 교만해져서 군 지휘를 태만히 하고, 경계에
실패하니, 거란군의 기습적인 야습을 허용하고 대패하는 바람에 그가 이끌었던
고려의 정병이 일순간에 붕괴해 버렸단다.
강조, 자신은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고 요 성종의 회유를 물리치고 맞서다
요에 끌려가 후일 죽음을 당하게 되지.
강조의 통주전투를 뭐라고 해야할까.
아들아, 이런 말이 있다.
군사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경계에 실패한 병사라고.
강조가 그랬다.
그리고 병법에서 이르기를 경적필패(輕敵必敗)라 했다.
강조의 교만 덕분에 요 성종의 교병계(驕兵計)에 말려들어 한 싸움에 고려는주력군
모두를 잃고, 결정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망치며 위기에 처하고 말았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강조의 군대가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니라 완함령전투와
통주성 전투를 통해 일부 군을 수습했고, 통주성을 고수했다는 것 정도일까.
요의 대군은 곽주와 안북부를 점령했지만, 서경에서의 전투에서는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대로 요 성종은 대군을 몰아 또 서경을 우회해서 개경으로 향했어.
요 성종의 목표는 고려의 산성 위주 전투, 수성전에 말려들지 않고 빠른 속도를 살려
진군해서 개경을 점령하고, 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단시간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거란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고질적인 약점이 있으니..
공성전에 약하고 보급문제 때문에 장기간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거든.
이 시각 고려 조정에서는..통주전투에서 고려 주력군이 궤멸 당하고, 요의 대군이
빠른 속도로 개경 가까이 이르니,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1차 전쟁 때 그러했듯이, 또 왕이 군신과 나아가 무조건 항복하자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하늘이 그래도 고려를 버리진 않았던
모양이지.
1차 전쟁의 영웅인 서희 선생이 가고 없는 이 때, 그를 대신할 새로운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어. 그가 바로 당시 예부시랑의 직위에 있던 강감찬 장군이었다.
예부시랑 강감찬은 항복론에 반대하고, 이때의 위기는 강조의 실책에 의한 것인바..
적의 군세를 되돌릴 방법은 있다. 다만, 우리 군세가 중과부족이므로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고 천천히 이길 방도를 구해야 한다며 몽진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지.
현종은 예부시랑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고난의 몽진길에 올라 한반도의 남쪽,
전라도 나주까지 갔어. 현종의 몽진길에 대해서는 일전에 얘기한바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고..
하여간 현종의 몽진 때문에 요 성종은 개경을 점령했음에도 그의 전략은 크게 틀어지고
말았단다. 게다가 그가 개경만 바라보고..무조건 진군해서 점령하지 못하고 남겨두거나
우회했던 곳의 고려 병력들이 요 대군의 병참선을 끊고 후방을 공략하고
동계(함경도)지역의 고려군이 북계(평안도)와 서경 방면으로 진군하여 후방을 위협하니
요 성종으로서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버틸 수도 없는 곤란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지.
이때 후방에서 요의 병력을 공략하여 점령된 땅을 수복하고, 포로가 된 백성과 병력을
탈출시키며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친 이가 바로 흥화진에서 1차 요 성종을 상대로 싸운
순검사 양규 장군과 구주(龜州)별장 김숙흥(金叔興)장군이었다.
그리고 이때 아직은 무명이었던 강민첨 장군도 애수진장(隘守鎭將)으로 병마녹사였던
조원 장군과 더불어 거란군을 견제하며 서경을 수성하는데 기여하며 역사에 등장했지.
왕도인 개경이 함락되었지만 일단 현종은 후방으로 몽진하고 후방의 길과 병참을 끊어
거란군을 가둔 상황에서 고려는 드디어 요 성종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냈다.
아들아, 이때 나선 또 하나의 영웅이 있었다. 바로..하공진(河拱辰)장군이었지.
그는 앞서 실책으로 귀양가 있었지만 현종의 몽진길에 합류하고, 스스로 자원해서
요 성종과의 협상에 나섰고, 스스로를 희생해서 그 어려운 임무를 성공시켰단다.
하공진 장군은 요 성종과 담판을 벌이며..거란군의 남하를 막고, 회군을 요청하면서
고려 왕의 친조(親朝)를 약속했어.
친조란 우리 임금이 요 황제를 찾아가 뵙는다는 말인데, 이는 곧 요에 대한 사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 요 성종은 만족스럽진 않지만..고려의 친조 약속이란 명분을
얻고 결국 군사를 되돌리기로 했지.
하지만, 고려의 약조를 담보하기 위해 하공진 장군을 인질로 삼았단다.
이것이 하공진 장군의 마지막이었다.
요로 끌려간 하공진 장군은 고려로 돌아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요 성종의 신하가
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를 향한 절의를 지켜 죽음을 당했거든.
요 성종은 철군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 길은 험난했지.
후방에 건재했던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채, 돌아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마지막 전투에서...순검사 양규와 구주별장 김숙흥 장군이
마지막까지 싸우며 장렬하게 전사하여 고려도 제2차 여요전쟁 최고의 전쟁영웅을
잃었다.
아들아, 아빠의 시각에서 본 제2차 여요전쟁을 정리해보마.
첫째, 고려는 강조의 잘못된 전쟁 수행으로 한번의 싸움에 주력군을 잃고 서북면 일대가
초토화 되었고 심지어 왕도인 개경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유래없는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극복해 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둘째, 그러나 고려는 강조의 실수를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적절한 방법으로 만회하여
고려의 기회를 잡았다. 강감찬 장군의 시기적절한 진언과 이를 채택한 현종의 몽진,
강동육주와 서경일대 후방지역 고려군의 활약, 하공진 장군의 희생과 적절한 담판이
고려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셋째, 고려가 만든 기회는 요 성종이 후방지역의 고려 성들을 버려두고 오직 개경만 보고
급속한 진군만 고집하다가 현종의 몽진으로 목표를 잃고, 또한 고려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되고 위협받아 위기를 자초한 전략적인 실수와 맞물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넷째, 요가 얻은 것은 고려 왕의 친조약속이란 명분이고, 요가 잃은 것은 전쟁에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인적, 물적 피해에 비해 친조 약속 외에 얻은게 없는 현실이며,
다섯째, 고려가 잃은 것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와 초토화된 서북면과 처음으로 왕도가
함락되고 파괴된 현실로 인한 충격이며, 고려가 얻은 것은 그런 위기를 넘기며..얻은
또한번의 기회, 그리고 고려의 다음을 예비할 훌륭한 인재들..인헌공 강감찬과 은열공
강민첨, 병마녹사였던 조원 장군 등이 등장했고..그들의 기량을 확인할 기회였다는 것이다.
여섯째, 여요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는 강동육주의 땅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 고려에 대한 친정의 성과에 만족해 하지
못할 것이며..
고려는 고려대로 위기를 넘기려고 친조 약속을 했지..친조할 의사가 없고, 강동육주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를 위해서 요와의 전쟁도 불사할 의지도 있다.
또한 송과의 교류 자체를 단절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제3차 여요전쟁 발발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아들아, 어떠냐. 이 전쟁의 의미가 이해되느냐?
그리고 이 전쟁을 보며 아들아 네가 꼭 잊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절망적이라 보이는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면
그 위기를 해결할 방법이 나오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냉정하게 사세를 읽고 침착하게 대처하며 차분히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을,
제2차 여요전쟁이..그리고 그때 고려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영웅적으로 싸워 결국은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들을 지켜낸 숨겨진 영웅들..그들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아들아, 너는 제2차 여요전쟁에서 이것을 배워 알아야 한다.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