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과도기의 가톨릭 교회(Ⅰ) - 세계 선교의 새 시대
세계 탐험과 식민지 건설 : 중세기에 있어서 교회의 주요 임무는 고대 희랍-문화와 그리스도교를 파괴하던 게르만 민족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이르러 마호메트(약 570-632)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이 이교도들의 침입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는 지역적으로나 숫자적으로 감소되었고,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폐쇄되어 이제 그리스도교는 거의 완전히 ‘유럽의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교회는 세계 선교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유럽인들은 동양(특히 인도)과 통상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이슬람 제국 때문에 육로를 통한 무역이 불가능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 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함으로써(1498) 인도 항로를 개통하였고,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1500)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1519-1522)을 하였다.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고, 1557년에 포르투갈은 중국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곳은 극동 무역과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국도 이딸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룸부스로 하여금 서항로를 통해서 인도로 출범케 하였다. 콜룸부스는 4차례에 걸친 항해를 통해서 중남미의 여러 섬과 지방을 발견하였다. 그외에 많은 스페인 항해사와 탐험가들이 프에르토 리코, 쿠바, 파나마,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를 발견, 정복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국가 후원의 선교
지리상의 신발견과 식민지의 건설은 유럽인들이 동양과 직접 통상하려는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복음의 세계 전파에 나섰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1455)는 1454년에 칙서를 통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권과 점유권을 승인하였고,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그리스도회’를 설립하여 그 책임자인 포르투갈의 왕이나 왕족에게 식민지에 성당을 건설하고 선교사들의 생계유지와 신변안전을 보장할 의무를 요구하는 대신에 교회 감독권과 주교 임명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교황청의 조치는 ‘국가의 교회 후원’(파드로아도 Padroado)이라고 불린다. 이 제도에 의하면, 포르투갈 왕이 식민지의 선교 지방에 파견할 주교 후보를 추천, 임명하면 교회는 나중에 형식적으로 승인하고 주교로 성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콜룸부스가 제1차 탐험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스페인의 카스틸랴 왕가는 스페인 출신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에게 포르투갈의 왕이 소유한 모든 권리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특권과 의무를 부여하는 동등한 조치(파트로나토 Patronato)를 취하였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두 탐험 세력 사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양국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도상에서 남북으로 선을 그어 대서양의 서부 지역(아메리카)은 스페인에게, 동부 지역(아프리카, 아시아)은 포르투갈에게 무역 독점권과 선교의 의무를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교회 선교 후원 제도는 교회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의 선교 수단이기 보다는 군사적 정복을 정당화시켜 주는 동기와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정복자들은 강제로 원주민들의 종교를 근절시키고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따라서 토착민들에게의 선교 활동을 가톨릭 점령군의 사업으로 보았고 선교사를 식민 정치의 협조자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선교는 강력한 식민지 정책이 확립되고 원주민의 토착종교가 저항하지 않는 곳(중남미 지역)에서만 성공할 수 있었고 고대 문명국가인 인도, 일본, 중국에서는 어려움을 당하였다.
또한 선교 방법에 있어서도 선교의 중심세력이었던 두 수도회, 즉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의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신앙의 토착화에 무관심하였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확립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고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식민지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원주민들에게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그대로 주입시키고자 하였다.
새로운 선교 정책 : 식민지 정책과 유럽 중심의 선교 방법은 예수회의 등장(1535)으로 도전을 받았다. 동양, 특히 인도, 일본, 중국은 예수회의 선교 활동 지역이었다. 프란치스꼬 드 사비에르(1506-1552)와 알렉산드리 발리냐노(1537-1606)가 일본에서, 마테오 릿치(1552-1610)가 중국에서, 로베르 드 노빌리(1557-1656)가 인도에서 새로운 선교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토착민과 의식주를 함께 하였다. 또한 이들은 원주민들이 신앙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한편 교회 당국은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에서 벗어나 선교 업무를 직접 관장하기 위해 1622년 포교성성을 설립하여 새로운 선교 지침을 수립하였다. 포교성성은 수도회의 선교사들과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재속신부들도 선교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로 1658년에 “빠리 외방전교회’(한국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선교단체)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선교 지방의 교회가 ‘유럽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627년에 우르바노 신학교가 설립되어 방인 사제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포교성성은 지방교회가 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주교좌를 증설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의 교회 후원 체제와 마찰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법적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편법으로 ‘교황대리 감목 제도’가 신설되었다. 이 교황대리 감목은 주교가 아니라 명예주교의 직책을 갖고 교황의 대리자로서 주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58년부터 포교성성은 이 주교들을 파견하였으나 국가의 교회 후원 제도에 의해 임명된 기존 주교들은 포교성성의 선교사들을 배척하였다. 이 불행한 사태는 1853년에 교황청과 포르투갈이 협상, 합의함으로써 제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충돌은 후에 선교 방법에 있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인도에서 예수회원 노빌리가 개종한 신자들에게 미신이 아닌 이상 토착 신앙과 전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순응 방법에 대해 다른 선교사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켜 결국 1704년에 교황 끌레멘스 11세(1700-1721)가 예수회의 토착화의 방법을 단죄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조상제사문제로 마테오 릿치가 시행한 순응 방법이 1715년에 금지되었다. 교회의 조상제사 금령은 1742년에 교황 베네딕또 14세(1740-1758)의 칙서로 재확인되어 1939년에 이르러서야 해재되었다. 이 금령은 교회 박해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교회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교세 확장의 장애물이었다고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