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1. 코를라(庫爾勒)지나 쿠차(庫車)로
혜초스님, 고선지장군과 인연깊은 ‘쿠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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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 고성 유적지> |
사진설명: 고선지 장군 이 머물며 서역지방을 다스렸던 쿠차 고성은 허물어지고, 성벽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신라 혜초스님도 쿠차에 도착해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
미란 유적지를 보고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문명과 종교의 흥망성쇠, 역사와 인간의 운명 등등. 무엇보다 불교의 흥(興)과 망(亡)이 뇌리에 떠올랐다. 수 백 년간 이 지역에서 맹위(猛威)를 떨치던 불교는 무엇 때문에 사라졌을까. 인도불교처럼 정체성을 지키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포교에 대한 열망이 수그러들어서였을까, 이도 아니면 현학적이고 사제적(司祭的)으로 변해 그렇게 됐을까. 무엇 때문일까.
미란 유적지를 보며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발길을 돌려 차르클릭(若羌) 시내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오후3시였다. 차후 잡혀진 일정도 없었다. 서역(西域)에 들어온 이래 가장 여유 있는 날을 맞았다. 고생스러웠던 어제(2002년 9월17일)의 여정(旅程)이 새삼 그리워졌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르클릭 시내를 돌아다녔다. 위구르인들을 만나 이야기도 해보고, 수퍼마켓에 들어가 물건도 샀다. 2시간 정도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도시의 중심가를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2002. 9. 19) 다시 500km를 달려야 한다. 서역남도의 차르클릭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 질러 서역북도에 있는 코를라까지 가야만 한다. 체력을 비축해야만 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도로는 괜찮을까, 다시 또 모래폭풍 카라브란을 만나면 어쩌나, 모든 것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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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코를라에서 쿠차로 가다 만난 소금의 밭. 하얀 것은 눈이 아닌 염분이다. |
2002년 9월19일 아침 9시30분 코를라를 향해 차르클릭을 출발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무사히 건너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한창 건설 중이었다. “중국 정부는 ‘서부대개발(西部大開發)’이라는 기치아래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 도시들을 연결하는 도로들을 건설하고 있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공사 중이다보니 도로는 엉망이었다. 비포장은 기본이고, 먼지 길을 달려야했다. 300km를 그렇게 달렸다.
몸은 불편했지만 눈은 즐거웠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속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막에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와 풀, 그리고 간간히 웅덩이도 있었다.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 한 가운데 쯤 되는 지점엔 호양나무들이 무성했다. “10월초면 호양나무들에 단풍이 들어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는 절경이 된다”고 중국인 운전사 주지휘씨가 말했다. 과연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래사막 곳곳에 서있는 나무에 노란 단풍이 들고, 단풍과 사막이 대비된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300km를 달린 끝에 차르클릭과 코를라 중간지점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다.
번화한 도시 코를라엔 한족들 많이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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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코를라에 있는 실크로드의 상징인 '날아가는 말'. |
이후부터는 길이 좋았다. 포장상태도 양호했고, 갈수록 민가와 사람들도 많아졌다. 200km를 달릴 끝에 코를라에 도착했다. 신강성 도시 중 우루무치를 제외하고 가장 번화한 곳이자, 한족(漢族)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가 바로 코를라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중국에선 한족이 아니면 좋은 직장도, 고위직에 오르기도 힘들다.
타림분지 일대 오아시스 도시들을 돌며 많이 봤지만, 한족들은 은근히 위구르족을 내려다보았다.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마찬가지로 코를라에서도 좋은 자리와 좋은 곳을 거의 대부분 한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리라.
그런 생각 때문인지 서역남도에서 서역북도까지 왔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왔다는 감흥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코를라의 울창한 빌딩 숲에 들어가는 것이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싫게만 느껴졌다. 사람에 따라 능력의 차이는 반드시 있지만, 혈통과 인종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이 당연시된다면 무엇인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능력에 달렸지만, 능력유무를 떠나 일단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지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좌절된 ‘1870년의 혁명’을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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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쿠차시장 전경. |
주지하다시피 1870년 무슬림 지도자 ‘야쿱 벡’은 청나라에 대항한 반군세력과 연합, 투르키스탄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투르키스탄 독립은 불과 1877년까지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내부 분열과 지도부의 판단 착오로 독립 투르키스탄은 형식상 다시 청의 속국이 됐고, 1877년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은 중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중국에서 벗어나 동쿠르키스탄을 세우려는 시도가 타림분지 주변에서 두 번이나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던 1949년 10월 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설된 직후 인민해방군이 이 지역에 진군했고, 독립 움직임도 사라지고 말았다. 마침내 신강성(新疆省)이 생겨났는데, ‘신강’이라는 말은 ‘새로운 경계’라는 뜻이다.
코를라에서 일박한 뒤 당나라 시절 안서도호부가 있었던 쿠차(庫車)로 갔다. 쿠차는 신라 혜초스님(705~787. 719~723 인도 순례)과도 인연 깊은 곳이다. 천축을 순례한 혜초스님이 이곳에서〈왕오천축국전〉을 집필했기 때문이다.〈왕오천축국전〉엔 이렇게 나온다. “소륵국(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쿠차국에 도착한다. 곧 안서(安西)대도호부로 중국 군대가 대대적으로 모인 곳이다. 쿠차국에는 사찰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소승불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파·부추 등을 먹으며, 중국인 스님은 대승불교를 믿고 있다.” 물론 ‘쿠차’하면 고선지 장군도 떠오른다.
코를라를 떠나 300km를 달린 끝에 ‘고선지 장군의 쿠차’에 도착했다.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은 도시였다. 쿠차빈관에 짐을 풀고 몸을 쉬었다. 그리곤 고선지 장군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쿠차 고성(古城)유적지로 달려갔다. 쿠차 시내에서 멀지않은 곳, 개울 옆에 고성 성벽이 서있고, 성벽 옆에 ‘쿠차고성유적지’를 알려주는 흰 시멘트 기념석이 서있었다. 남북 성벽을 가로질러 신작로가 났고, 신작로 위를 차와 당나귀 수레들이 열심히 오가고 있었다. 하기야 고선지 장군도 천 수 백년 전의 인물 아니던가. 성벽 옆을 지나는 무심한 개울물을 보며 고선지 장군을 떠올렸다.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장군〉(청아출판사. 지배선 지음) 등에 의하면 고선지장군은 고구려가 망하자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 유격장군에 등용됐다. 20살에 장군에 올랐으며,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부몽영찰의 신임을 얻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됐다.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승진됐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 토번(吐蕃·티베트)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진(東進)하자,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돼 군사 1만을 인솔, 파미르고원을 넘어 소발률국(현재 파키스탄 길기트) 등 72개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선지 장군은 이후 한족이 아닌데도 네 곳에 위치한 부대(사진절도사)의 군사 총독으로 승진했다. 당나라 서부지역의 군사·행정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고선지 장군이 당나라에 가져다 준 엄청난 이익에 대한 보상이었다. 747년의 전투는 토번과 당나라 사이에만 국한된 전투가 아니었다. 당나라 서부지역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둘러싼 일종의 국제분쟁이었다. 전투 패배로 사라센 제국의 동진은 저지됐던 것이다.
어이없게 죽은 고선지장군 생각이…
고선지장군은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과 동맹을 맺으려는 타슈켄트(石國)를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에 호송했다. 이로 인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됐다. 그런데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타슈켄트 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분기하여 연합군을 편성, 탈라스 대평원으로 쳐들어왔다.
751년 고선지 장군은 이를 막기 위해 7만의 정벌군을 편성, 제3차 원정에 나갔지만, 카를루크족의 배신으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이후 당나라는 다시는 중앙아시아 지역(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된다. 불교 역시 강력한 지지 세력인 당의 쇠퇴로 이슬람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전쟁 도중 포로로 잡힌 중국 제지기술자에 의해 제지술이 아랍세계에 전해졌고, 아랍의 제지술은 유럽으로 전파돼 세계문명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전투엔 졌지만, 결과적으로 “고선지 장군이 유럽문명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귀국 후 밀운군공에 봉해진 고선지 장군은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토군 부원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평소 사원(私怨)을 품고 있던 한족(漢族) 출신 부관 변령성의 참소로 진중에서 참형되고 말았다.
고선지 장군과 혜초스님. 머나먼 서역 땅 쿠차에 와 그 분들을 생각할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한없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너무나 어이없는 고선지 장군의 죽음 때문이리라. 아마도 장군의 죽음 이면엔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한족의 멸시도 포함돼 있었으리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쿠차 고성(古城) 성벽을 손으로 만졌다. 1,200백 년 전 향기는 없고, 까칠까칠한 흙덩이만 묻어 나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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