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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전시관
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70(왕궁리 562) 에 있는 왕궁리유적전시관은 백제의 왕궁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의 백제, 왕궁의 생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백제왕궁 5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그리고 체험학습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궁리유적 이란?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 408호, 1998년 9월 11일 지정) 지정면적 : 216,862㎡ 유적지 내에 국보 제 289호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있고, 인근지역에 동쪽으로 익산 제석사지 2㎞, 북서쪽으로 익산 미륵사지가 약 4.8㎞ 거리에 위치함. [연혁] 백제 30대 무왕(武王 : A.D.600 ~ 641)대에 조성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됨 1965년 : 석탑 해체보수 1989년 ~ 현재 : 국립부여문화제연구소 발굴조사 1976년 :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시굴 조사
[왕궁리유적의 조사] 왕궁리유적은 미륵사지에서 직선거리로 5km 쯤 남측에 위치하여 일제시기부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왕궁리5층석탑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965년에는 북쪽으로 기울어있던 석탑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해체보수를 하던 중 석탑의 1층 옥개받침과 기단부에서 금제금강경판을 비롯한 사리병, 불상, 옥, 방울 등의 일괄유물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백제 왕궁터에 대한 부분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왕궁 담장의 외곽경계와 석탑의 북측에서 금당건물터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후 이 유적은 백제 무왕이 천도한 왕궁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일부에서는 별궁이나 미완의 왕궁설 등을 제기되었고 석탑과 관련된 사찰은 왕궁 내 내불당적인 성격의 사찰로 인식하게 되었다. 왕궁리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미륵사지의 조사가 마무리되어가던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시작하여 현재까지 20년 동안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왕궁의 정확한 규모와 형태, 궁내부의 건물지,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 석축, 금을 가공하던 공방터, 백제시대의 화장실, 탑과 관련된 사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백제 왕궁의 모습이 하나 둘씩 점점 더 구체화 되어가고 있다.
[왕궁의 조성] 왕궁리유적의 백제 왕궁터는 용화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의 남측 끝부분 해발 40m 내외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구릉을 깎아 내리거나 낯은 곳은 흙을 쌓아 평탄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왕궁을 조성하였다. 왕궁의 외곽을 둘러싼 담장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 깬돌을 사용하여 폭 3m규모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았을 것으로 보이는 남측은 잘 다듬어진 사구석과 장대석으로 정성들여 만들었다. 왕궁의 규모는 남북 490m, 동서 240m로 약간 틀어진 긴 네모꼴이며, 담장의 아래 안쪽과 바깥쪽에는 폭 1m 정도로 편평한 돌을 깔아 물에 의한 담장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도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시설은 작업 진행과정상 최종 마무리 단계의 시설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백제 왕궁이 완전한 형태로 완성된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담장의 높이는 1m 정도로서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담장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편이 수습되어 담장 상부는 기와지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남측 담장에서 연결되어 3개소, 서측 담장에 연결되어 1개소가 확인되었다. 물론 북측과 동측 담장에서도 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왕궁의 남측에 3개의 문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왕궁의 공간 활용] 왕궁의 남측 전반부에는 왕궁과 관련된 시설을 조성하기 위하여 동서 석축 4단을 쌓고 건물 조성을 위해 대지를 조성하였고 북측 후반부는 기괴한 모양의 정원석과 수목을 심어 후원과 공방지 등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측 전반부의 왕궁시설은 4단의 석축을 쌓아 남측에서부터 폭 75m와 45m의 대지를 2:1:2:1의 비율로 4개소로 분할하여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에 의해 부지를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지 내에서는 총21기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다. 백제시대 건물지 중에는 제1석축 바로 앞에서 왕궁의 정전 또는 중요 건물로 볼 수 있는 동서 32m, 남북 16m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은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며, 건물의 중심이 남측 중문의 중심축과 일치하여 왕궁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머지 백제 건물지들은 제1석축의 뒤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후대의 사찰유적으로 인하여 파괴되어서인지 대부분 유적의 동편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다. 제4석축의 동편에 치우쳐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정원 유적은 왕궁의 후원과 연결되는 부분에 기이한 괴석과 장대석, 하천석 등을 조합하여 물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원 주변에 정자와 같은 건물지와 제4석축 위로 연결되는 도로도 조사되었다.
[왕궁의 부속시설] 왕궁의 부속시설로는 금, 유리, 동의 제련과 제품의 생산시설인 공방지와 대형 화장실, 석축배수 시설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설은 왕궁의 북서측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왕궁과는 별도로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공방지에서는 금연주, 금고리, 금판, 금실, 금못, 금장식 등의 금제품과 유리제품, 동제품과 이들의 제련 과정에서 나오는 찌꺼기인 슬레그, 도가니 등이 출토되어 금, 유리, 동의 생산과 제작이 왕궁 내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금은 고대에 가장 귀한 신분계층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서동(薯童)이 금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올랐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와 같이 백제 무왕은 금을 중요시하여 왕궁 내에 생산시설을 두고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 화장실은 토광을 파고 나무기둥을 세워 발판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내부에서 회충, 편충 등의 기생충알과 뒤처리를 했던 막대기가 출토되었다. 백제 시대의 대형 화장실은 왕궁리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왕궁의 중심시설과는 별도로 공방지 주변에서 확인됨에 따라 공방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위생적인 뒤 처리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찰로의 변화] 5층석탑과 금당, 강당 등의 사찰관련 유적은 왕궁의 중요 건물이 위치해야할 자리에 있고 석탑의 하부에서 목탑지와 선행한 건물지의 흔적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백제 왕궁의 건물을 철거 하고 그 위에 사찰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왕궁의 용도가 폐기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파괴하고 그 위에 사찰을 건립한 것이다. 어떠한 연유로 해서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되었는가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무왕 사후 익산 쌍릉(무왕릉,무왕비릉)에 모셔짐에 따라 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나 아니면 백제 멸망 후 무왕 세력의 결집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사찰로의 변화 시기는 『삼국사기』에 「금마군의 대관사 우물이 핏빛이 되어 5장이나 흘렸다」는 기록으로 보면 의자왕대를 전후로 하여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이와 유사한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등의 사찰 이름이 기록된 명문기와가 출토되고 있어서 이와 같은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튼 사찰로 변화 시기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통일신라 후기까지는 경영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유적의 동편 일부 지역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전에 유적의 경영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왕궁리유적전시관 주요 소장품
다양한 형태의 금제품,유리제품과 이를 생산하던 각종 도가니, 인장와, 명문와, 수막새, 전달린토기, 완,합, 등잔, 대형토기 등 왕궁리유적 출토유물 약 1,400여점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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