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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환단고기의 세계 세 번째...반론 2.
글: 대수맥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172
□ 양 세력의 쟁투(春秋시대 BC 770-402)
주 선왕(周 宣王)때 東方族을 서변에서 어우른 한후(韓侯-시경詩經 한혁韓奕)를 혼인을 빙자 해 속인 일과
북지(北地-진양晋陽과 太原부근 북쪽)의 동이(東夷) 근거지에 대한 기습공격의 반발로 平王때부터 대대적인
역습을 받아 周 왕실이 결국 낙읍(洛邑)으로 이동하게 만듦으로서 춘추시대가 도래하였으며 그 후 태원 부근에
있던 遼 지역이 주나라 제후들과 서부진출 동방부족간의 치열한 격전장이 되면서 전국시대를 맞이하였다.
낙읍(洛邑)은 成王때의 주요한 병참기지였으나 이 시기에는 줄기 찬 이족(夷族)의 침략으로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1) 춘추시대의 특징은 북방 및 동방 夷族과 周 제후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상태였다(이 시기
북방 夷族은 적적赤狄*호胡*융戎*산융山戎으로 동방 夷族을 이夷라 함)
2) 周의 제후들은 夷族에 공동대처하며 태행의 서쪽지역-위수渭水의 동쪽 사이의 남북지역
그리고 河水주변에서 주로 활동함으로서 지정적 위치로 말미암아 비로소 中國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공화共和 - 춘추春秋 初 期에 이르면서 주계(周系)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연(燕)을 구하는
것이었다.
1) 노 은공(魯 隱公)은 그 무렵 가장 호전적인 산융(山戎)과 수차례 싸워 나라의 국력마저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2) 연이은 周의 실정(失政)으로 천하가 대란(大亂)에 빠지자 사방의 제후가 반란하니 나라의 수가
120 -170국(십팔사략 상 60 P*부락성傅樂成 중국통사 30 P와 52 P)이나 되었으며 서북의 융적(戎狄)과
동북의 [번조선]이 여러 君長(汗한)들을 앞세워 지속적으로 공격하자 당황한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5 패(覇)를 중심으로 연합공수동맹을 결성해 주실(周室)을 받들자는 명목으로 戎狄과 夷를 공동으로
방어해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결국 견디다 못해 봉국(封國)의 이동(移動)과 쇠락이 연이어 일어나는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1) 노(魯)는 文王때 하남성의 노산(魯山)에 봉해졌으나 成王때 위기에 직면한 연(燕)의 지원국 역할을
맡아 산동성 서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주공 단의 아들인 백금이 노(魯)에서 나라를 세우자(?) 회이(淮夷)와 회융(淮戎)이 함께
반대해 침공했으나 백금이 사(師)를 거느리고 친히 魯의 동쪽지역인 비(肹비*흘)에서 막다.
<사기 노 주공세가>
2) 연(燕)은 주초(周初)에 하남성 회양에 있다가 하수 북쪽으로 이동했다.
周 왕실은 서북쪽의 맥계(貊系) 동방족 방어에 급급하여 동북지역은 연(燕)과 한(韓)으로 하여금 번조선
의 방어를 위한 교두보로 세웠는데 지속적인 번조선의 공격에 시달려 나라가 크게 일어서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특히 주의를 요한다. 연(燕)의 도읍이동을 잘 추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召(기산 岐山) - 소召(옹현雍 縣) - 연경燕京(太原)-조성(胙城-활주滑州)-계薊(연산燕山=北京부근)로
이동했다고 기록했으나 사실 이는 燕이 남연(南燕)과 북연(北燕)이 있음을 숨기기 위해 도읍의 이동으로
교묘하게 감춘 것이다.
3) 진(秦)은 서안(西安) 서쪽의 섬서성(陝西省) 지역 기산(岐山)에서 제후로 봉해진 다음 목공(繆公)때부터
산융(山戎-예맥조선)의 현신(賢臣)인 유여(由余)를 얻어 계략으로 서융(西戎) 12국을 쳐서 복속시킨 후
비로소 나라가 겨우 일어서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4) 제(齊)는 환공(桓公) 전까지 남쪽의 회이(淮夷)와 북쪽의 산융(山戎) 공격으로 하남성 낙읍(洛邑)
동남쪽에 있던 정(鄭)나라의 구원에 의존할 정도로 국세가 약해졌는데 결국 1차 번조선의 강력
한 공세로 굴복하고 만다(이는 환단고기에서도 결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5) 진(晉)은 숙우(叔虞)가 成王때 河水 북방의 소공 석의 영지였던 당(唐)을 멸하고 그 지역에 晉으로 봉(封)
을 받아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후에 진수(晉水)부근인 진양(晋陽-평양平陽*임분臨汾)으로 옮겨 분수
汾水와 회수澮水지역 사이를 중심으로 태행산맥 서쪽지역을 차지한 다음 진후(晉侯-아들인 섭 때부터)
가 되어 북쪽을 방어한 제후로 연(燕)과 함께 춘추시대까지 명맥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였으며 선왕 때
도읍을 강(絳)으로 옮겼다.
[齊와 來夷] 동북방의 萊國은 북방에 있던 고죽*영지와 함께 끊임없이 齊를 압박했으나 540년
후인 bc 200년에 제 환공에게 멸망당하였다.
[韓과 山戎] 연을 지원하기 위해 成王의 동생인 <응한>을 내세워 나라를 세웠지만 산융의 공격
에 困하다 결국 200년 후인 bc 800년에 산융에게 멸망당함.
[魯와 貊*山戎] 북방의 燕과 동방의 齊 사이에서 燕의 군사행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춘추시대까지 240년간을 계속 공격을 받아 困하였다.
[燕과 朝鮮] 건국 이래 북쪽의 산융과 동쪽의 고이高夷*고죽孤竹*영지令支등 조선계 후국의
포위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어렵다가 100여년 뒤 환공(桓公)의 역(役)과 그 다음에
전개된 진개(秦開)의 役으로 겨우 활로를 찾게 된다.
▶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公)修覇 攘而(谷+⻏)焉 <후한서 동이열전 704P>
BC 8c 엔 발發*숙신肅愼*산융山戎이 대륙에 있던 제후국의 침략사건 주역으로 계속 나타나는
데 침입 받은 나라의 위치를 고려해 볼 때 현 河水의 동북이나 동쪽에 위치했으며 齊 桓公은 북방
인 太行 서편을 공략해 경계가 고죽孤竹*산융山戎*예맥濊貊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말했으니
그 때 평정했다는 令支와 孤竹은 河水 중*상류에서 하북성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발發*식신息愼의
근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조선이 크게 강성하여 후국(候國)들이 전방위에서 압박하고 세(勢)가 심히 강맹하니 성주(成周)
때에 이르러 지나인들의 강역이 가장 협소했다.
회남(淮南)이 서국(徐國)의 영토가 되고 진(秦)나라는 융(戎)의 핍박을 받고 하북河北*진정眞定*
중산中山의 땅이 선鮮*우虞*비肥*고국鼓國의 손에있어 그 변경에서 접경하였다.
하동(河東)의 경계엔 적적赤狄*갑씨甲氏*유우留吁*석진釋辰*로국潞國이 있고 낙양(洛陽)이 비록
도읍이나 양위揚위*천고泉皐*만씨蠻氏*육혼陸渾*이락伊雒 등의 戎에 困하고 동도(東都)에는
채菜*모牟*거莒*개介가 항상 위협을 하고 있었다.
파(杷)의 도읍인 옹구(雍丘)는 변(卞)의 속읍화(屬邑化) 되어 夷의 예절을 따르고 주(邾)는 노(魯)
의 부근에 있는 夷로 늘 노(魯)를 위협하여 화하(華夏)의 영토는 오직 진晋*위衛*제齊*노魯*송宋
*정鄭*진陳*허許 뿐으로 모두 수십주數十州에 불과하니 천하의 1/5을 가졌을 뿐이었다.
<임혜상 중국민족사>
▶당시 맥계(貊系)는 燕의 서북방인 代에서 令支 서방까지 진출하여 대부분은 북방-동북방에 거주하고
孤竹일대에서 山戎과 인접해 거주한 東北夷였다. <관자 소광小匡편*왕회해王會解>
▶東周시대는 중국족의 내부 전쟁으로 인하여 적인(狄人-畎夷)가 날로 창궐하여 북방 각국에서 큰 해를
가져왔다. 제일 극심한 것은 하북성 서남부에서 산서성 동남부에 걸쳐 분포된 적적(赤狄)이었고 하북성
서부와 섬서성 북부지역에 분포된 동방의 백적(白狄)이 그 다음이었다.
齊*衛*晉*魯*형邢*宋*정鄭등의 나라들은 모두 狄人의 침략을 받았다.
이밖에 산융(山戎)은 항상 燕나라를 침략하였다. <부락성 중국통사>
▶朝鮮相路人 相韓陰 尼谿相參 將軍王唊(集解:戎狄不知官紀 故皆稱相 索隱: 應劭云 戎狄不知官紀 故皆
稱相也) <사기 권 115 조선열전 749P>- 융적이 맥족이며 조선게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분수*심수*제수*호타수*장수와 함께 요수도 발원지가 태행산의 서쪽지역이므로 태행산맥의
遼 부근의 강이 <요수> 임을 <산해경>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周초-춘추시대엔 태행산맥에
있는 遼의 근방을 흐르는 강의 동쪽을 진(晉) 때까지 요동(遼東)으로 불렀으며 제 희공25년*
정 장공38년(bc706)에 이 지역의 동쪽을 근거지로 한 북융(北戎)이 곧바로 제(齊)를 친 움직임과
맞아 떨어진다.
▶제 환공이 산융*고죽*영지를 칠 때 <요수>를 건넜다. <관자>
▶제(齊)는 비스듬히 숙신(肅愼)과 경계하였다. <사마상여의 자허부子虛賦>
晉의 목후(穆侯)때 북으로 조(趙)와 천무(千畝)를 공격했으나 북융에게 곡옥(曲沃)의 바로 위인 분습까지
반격을 받아 뺏기고 헌공 16년(BC 661) 조숙(趙夙)과 필만(畢萬)을 시켜 곽霍*위魏*경耿을 벌하고 조숙(趙夙)
에게 경(耿)을 畢萬에게 위(魏)를 봉지로 주었는데 곽(霍)의 아래에 있던 趙夙이 봉을 받은 조읍(趙邑-趙城)
을 떠나 汾水와 河水가 만나는 부근의 耿으로 이동함은 武王때 太原아래 소여기(昭余祁)의 기(祁)땅에 封한
燕도 춘추시대에는 韓侯에게 결국 망하고 진(晉)조차도 밀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춘추 초기인 진 헌공(晉 獻公) 때도(BC 677-651) 최북단 국경이 곽산(霍山)부근 이었고 汾水를
따라 河水와 만나는 지역의 동쪽과 심수(沁水)의 서쪽지역 즉 하수*분수*속수*회수로 둘러싸인
지역이 晉의 영역이었으므로 霍山의 북쪽은 韓侯의 땅이고 분습(汾濕)의 서쪽 땅인 포(浦)와
굴(屈) 부근에는 산융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국어 진어晉語>
이 무렵에도 삭방(朔方)은 황토지대인 경수와 낙수의 북쪽지대를 말하였으며
유(幽=幽州)는 서주시대엔 기(岐=岐邑)의 북쪽인 洛水 상류 북쪽에서 소여기(昭余祁)의
북방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BC 707-장 조을(將 祖乙)을 보내 곧바로 연(燕)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영구營丘)
남쪽의 교외에서 싸운 후 승리를 알려왔다. <단군세기>
釐(리)공 25년 北戎이 齊를 침공하자 정(鄭)나라에서 태자 홀(忽)을 보내 도와주었다.
<사기 제태공세가>
山戎이 연나라(당시 태행 부근)를 넘어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희공은 나라의 교외에서 싸웠다. <사기 흉노전>
노 환공(魯 桓公) 6년(BC 707) 北戎이 齊를 공격하자 齊侯는 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鄭太子 忽이 군대를 끌고 가 齊를 구원했다.
6 월에 北戎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北戎의 장수인 대량(大良)과 소량(少良) 및 갑수(甲首)
300명을 잡아 齊에 바쳤다. <춘추좌전>
이 시기 전역상황이 우리 기록과 잘 맞아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로서 [환단고기]의 진정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하지만 몇 나라가 연합하여 겨우 대적하면서 포로 몇명을 잡은 것을 마치 齊와 鄭의 연합군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록한 춘추필법을 부렸음을 이어지는 사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여러 제후들이 北戎에 대항해 齊를 수비했기 때문에 齊에서는 구원하러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
을 보내고 魯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했는데 鄭은 뒤로 밀려났으며 태자인 忽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춘추>
전공(戰功)에서 鄭나라가 밀린 것을 보면 실제 北戎과의 전쟁에서는 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모든 문헌에서 朝鮮을 北戎*山戎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秦) 이전엔
동방족을 山戎과 北戎으로 호칭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齊환공의 등장과 세력 강화]
1) 래국병합(萊國倂合)
제 환공이 관중에게 공격의 순서를 물으니 관중이 계책을 내어 “萊가 齊의 창업주인 강태공 때부터 가장
걱정거리로 먼저 침이 마땅하고 또한 萊人은 용감하나 왕이 어리석어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를 써야 망치기
쉽다.” 하며 황금으로 萊의 곡식과 나무를 샀는데 萊王이 깨닫지 못하고 “황금은 나라의 보배이거늘 齊나라의
군신들이 이같이 함부로 쓴다.” 하고 백성들을 모아 나무를 베고 곡식을 모아 팔았다.
얼마 안 되어 萊人들이 먹을 곡식과 땔나무가 없어 齊에게 다시 사려 한즉 갑자기 수출을 금지시킨 후
궁핍해지자 군사를 발해 멸하였다.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子猛)의 말을 듣지 않자 齊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
<설원說苑 정련正諫편>
▶齊 간공簡公(BC 485-481)이 여자들과 함께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기 제태공세가>란 사실은 이미 래이(萊夷)가 齊나라에 합병되었음을 의미한다.
2) 연합군의 결성
▶단제는 병력을 보내 須臾(하북성과 산서성 사이의 부족)의 군대와 함께 燕을 정벌케 하니 燕이 齊에
위급함을 알려 齊가 대거 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 <단군세기>
▶齊 桓公23년 山戎이 燕을 정벌하자 燕은 齊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桓公은 燕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山戎을
쳐서 孤竹에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 제태공세가>
▶44년 뒤 산융이 연을 치자 연은 제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치자 산융은 도망했다.
<사기 흉노전>
▶제 환공이 장차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魯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노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신하들이 말하길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蠻夷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설원說苑 권모權謨편>
▶魯 莊公 30년 겨울에 제와 노가 만나 산융을 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산융이
연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춘추 좌전>
※ 여기에서 <위략>은 산융*북융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솔직하게 조선이라고 기록해 후에 그 자료가
멸실되어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방족은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한때 서쪽의 양揚*거拒*천泉과 함께 東周의
서울인 낙양에까지 침입했는데 그 주력은 조양*상곡*우북평 지방의 구려맥계 번조선
(番朝鮮)으로 태행산에 있는 당산(唐山)지방의 고죽국 및 동쪽의 영지국과 연합해 남쪽
의 齊와 魯를 위협하였다.
아울러 태원의 산융은 지속적으로 燕을 공격했는데 1차(bc 7c)는 燕을 치고 齊까지 진격
해 제교(齊郊-제외곽인 변방지역)에서 싸우다가 물러섰고 44년 후 2차로 燕을 멸하기로
작정하고 공격하다 제환공의 진하연합군이 오자 물러간다.
▶1차전 때 조선의 명을 받아 산융이 연을 멸하니 고조선이 중간의 연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제환공과
무역을 했다.(이때 조선의 국호가 처음 나오게 됨) <관자>
3) 진하연합군(趙*齊*衛*許*魯 등)의 북방 진
제 환공이 북벌한 山戎은 북적北戎=견이畎夷=구려맥句麗貊으로 분수汾水*심수沁水 지역에 있었고
이곳이 당시의 遼東이며 <설원*관자>에 요수를 건넜다 한 요수가 태행산맥의 요수를 말하는데(춘추
시대엔 遼水가 太行의 遼지방에 있었음) 이 시대의 북쪽 개념은 산서성과 태행산맥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晉나라 부근에 적狄*적翟*호胡*맥貉*도하屠何가 있고 이들은 맥국(貊國)에 속했으며 또한
북쪽에 산융*영지*고죽이 있었는데 이들도 예맥이다. <설원*관자*국어>
<관자>에 보면 영지(令支)의 아래에 부산(鳧山)이 있고 부근에 고죽(孤竹)이 있으며 제수(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인 태행산맥의 남쪽 끝에 진(晉)의 석침현(石沈縣)이 있는바 제 환공은 이곳에서
太行과 비이(卑耳)를 넘었다 했으니 孤竹과 遼水가 태행산맥에 속하며 卑耳계곡과 접한 곳엔 맥(貊)
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비이에 강이 있는데 요수이며 비이산과 비이계곡이 있다. <설원*관자>
孤竹을 벌하기 전에 건넌 강이 遼水이고 遼는 太行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동쪽에 세이천(洗耳泉-허유가
귀를 씻은 곳으로 卑耳?)이 있는데 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의 북쪽으로서 이곳 부근에 로潞*여黎*요遼란
지명이 있음은 물론 遼에서 太行쪽이 동쪽이 되어 지명이 요양遼陽=요양轑陽 이니 遼東과 같아 여길 흐르는
강이 遼水이다. 바로 이때 <요>가 태행의 중부에 있으며 晉의 북쪽이 되므로 이곳에 살던 부족이 孤竹이고
遼의 북쪽과 남서쪽에 山戎이 거주함이 들어맞게 된다.
또한 무종(無終)이 bc 542년 晉나라와 太原에서 싸웠는데 무종은 중산(中山)으로 만일 난하에 있었다면
2000리를 달려온 것이 된다.
사실 태행산맥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산맥을 넘어 쉽게 태원까지 침략한 것으로 결국 태행 서쪽의 遼와 동쪽
의 中山이 遼東이고 이 지역에 산융과 영지와 고죽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晉의 분수 서쪽인 태원의 아래쪽에 이굴(二屈)이 살고 있다. <국어>
▶bc 569 위강이 5가지의 이점을 말하며 晉과 무종(적*융*산융*적적) 과의 화친을 역설하였다.
그 중에서 晉이 무종의 세력을 얻음으로서 중국의 제후를 호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고 하였다.
<춘추좌전>
▶중산의 사람 中人은 종인(終人)을 말한다. <회남자 도응훈道應訓>
이지離支=영지令支는 태행의 북쪽에 위치한 대(代)의 부근에 있었는데 代는 춘추 시 晉의 북쪽인 구주(句注)
즉 항산(恒山)아래 태원 위쪽인 호타수 상류에 있었으며 전국 땐 역수(易水) 상류 즉 상산(常山)의 북쪽에서
항산(恒山)에 걸쳐 거주지를 이동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따라서 齊 환공의 북벌 경로는 晉의 북쪽과 태행산맥 줄기를 따라 행해졌으며 그곳에 산융*영지
*고죽이 있었는데 환공21년(bc664-663)엔 산융만 벌했을 뿐이고 bc 661-656 사이에 영지와 고죽 순
으로 북벌을 해 bc 650년에 완료되었으나 다만 일시적이었다.
▶노 장공과 제환공이 겨울에 만나 산융이 연을 침범하므로 이를 벌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후 그 해
겨울에 산융을 공격해 벌하고 다음해 봄에 노획품을 노 장공에게 갖다 주었다. <춘추좌전>
왜냐하면 제 환공 23년(662)에 산융이 다시 燕과 형(邢)과 위(魏)을 치고 있는데 이 때 형과 위는 조성(趙城)의
북쪽에 있으므로 연(燕)도 계(薊)가 아닌 조성(趙城)에 있던 남연(南燕)을 친 것이다.
▶狄人이 형나라를 치니 관경중(管敬仲)이 제 환공에게 말해 형을 구했다. <춘추좌전>
- 여기에서 “구했다”는 말은 이미 망한 형(邢)을 齊 땅인 이의(夷儀)로 옮긴 것을 말함.
2차 산융의 침입시 구원군으로 燕에 간 환공(이름:無知)은 산융이 물러서자 여세를 몰아 고죽국을 침입
했으나 비이곡에서 매복해 기다리고 있는 조선계의 군세가 자못 흉험함에 놀라 一矢도 쏘지 못하고 황급히
퇴각해 놀란 환공이 정신을 가다듬고 4년을 군비축적에 힘쓴 후 고죽국을 침공해 비로소 멸하였다.
(사기 흉노열전) 허나 이때부터 번조선의 복수전에 내내 시달림을 받는다.
환공 7년에 산융이 다시 燕을 공격하자 이를 격퇴한 후 환공 10-11년 사이에 북진을 감행하여 산융과 영지를
격파(관자 권8 王言 제21)하였지만 단군조선의 원군이 도착해 대패한 후 본래 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듯 桓公의 진하연합군(秦夏聯合軍)은 초기의 승세를 굳히지 못하면서 역공(逆攻)의 전술
에 걸려 전세가 불리해지자 魯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때 魯에서는 도와준다고 약속하고 군대
를 보내지 않자 할 수없이 화해를 구걸하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귀로(歸路)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魯를 치려고 했으나 관중(管仲)이 말리는 바람에 분풀이
를 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아직은 勢의 약함을 절감하면서 연을 회복시키는
걸로 위안을 삼고 계속 응징을 받지 않으려면 燕의 시조 소공(召公)이 했던 것처럼 다시
올바른 정치를 펴고 초기의 심정으로 다시 周왕실을 존중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옛 召公의 덕정을 다시 바로잡고 옛 周나라 成王과 康王때와 같이 周 왕실에 공물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사기 제태공세가>
▶燕나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天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 조공품이 成周때와 같았다.
그리고 연 장공에게 召公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잘 따르도록 했다. <연 소공세가>
아무튼 제 환공이 산융을 벌하고 할연(割燕=복연復燕)을 했는데(bc 650) 韓侯가 멸한 北燕과 산융이 멸한
南燕을 합친 후 召公의 옛 직(職)을 잇게 한 것이다. 당초 소공을 봉한 北燕의 땅인 태원 아래쪽의 소여기
昭余祁)를 일시 탈환해 주었으며 그 후 춘추 말과 전국시대를 맞이해 진(조양자趙襄子)의 북방정책 추진과
조(무령왕)의 북진정책으로 밀려 동천(東遷)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이르러 연 문후(燕 文侯) 때의 강역은 趙와 晉의 북방에 있으므로 호타하와 易水의 하류가 아닌 상류
즉 恒山의 동쪽에 있던 易水의 상류와 서쪽에 있는 호타하의 상류지역으로 이때 燕의 서쪽은 운중과 안문이
되고 북쪽에 임호와 누번이 있는 태행산맥 북의 구주부근과 현 대동시 주변에 자리함
산해경 북산경 북차삼경은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산과 여기서 발원해 나가는 강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작은 洛邑 위쪽의 河水 즉 서쪽은 왕옥산에서 동쪽은 맹문에서 시작해 태행산맥
북쪽인 안문산(서쪽)과 갈석산(동쪽)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산해경은 갈석산을 태행의 북단으로
인식하고 이것은 <사기 소진열전>의 “남쪽으로 안문과 갈석의 풍요함을 차지한다”는 말과 일치하며
燕山과 燕水가 있는데 북차삼경의 40번째 산이고 경산과 청장수 다음에 기록되고 있으므로 이 부근이
태행산맥을 따라 춘추 때 중북부에 있던 遼지방 부근이고 태원부근(晉陽)이며 태행의 서쪽 측면이
되어 초기 燕의 위치임이 명백하다.
BC 661년부터 제 환공의 북벌에 대한 대대적인 동방부족의 역습이 시작되었는데
魯 민공 2년(bc 661)에 狄人이 위(衛)를 형택(熒澤)에서 괴멸시키자 제*송*노가 성을 초구(楚丘)
에 서둘러 쌓은 다음 衛의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이 시기에 燕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으며 魯 희공10년(bc 650) 狄人이 온(溫)을 멸하고 그 해 齊와
허(許)가 북융(北戎)을 치다가 이득이 없자 희공 11년에 관이오(管夷吾)를 융(戎)에 보내 화평을
청하고 있다.(적=북융=융)
이어 노 희공 13년(bc647)에 초구(楚丘)에 있던 衛 공격*14년 정(鄭) 공격*15년 晉이 분수 남쪽
곤도(昆都)에서 참패를 당하기에 이른다.
20년 후(bc 636년 경) 융적(戎翟)이 낙읍(洛邑)의 주 양왕(周 襄王)을 공격하자 정(鄭)의 범읍(氾邑)으로
도망한 후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세가 강해 병을 발하지 못하고 육혼(陸渾)까지 내어주다가(단군조선
은 이를 자대子帶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4년 만에 BC 622년에 진 문공(晋 文公)의 도움으로 탈환해(한서 '
흉노전 939P) 환도하였다.
이때 진(秦)이 강성해져 목공(穆公)이 서융8국(西戎8國)을 지배하니(한서 흉노전 939P) 드디어 BC 623년 서방백
(西方伯)으로 올라섰으며(십팔사략 166P) 이 무렵 기산岐山*양산梁山*경수涇水*칠수漆水의 북쪽에 의거義渠
*대협大劦*오씨烏씨*구연朐衍의 융(戎) 과 晋의 북쪽에 임호와 누번 그리고 燕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100년 후(BC 599) 견디지 못한 진 도공(晋 悼公)이 위강(魏絳)을 통해 戎狄과 화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한서 흉노전 939P).
[齊*趙의 비상飛上]
환공 23년에는 단군조선의 세력이 내부사정으로 잠시 물러간 틈을 이용해 예맥조선의 접경에 비로소
다다르니 이후 燕과 齊가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다(관자).
그 후 북쪽의 안정을 기반으로 산동성의 회(淮)와 대(岱)지방을 공략해 서국(徐國)과 서국(舒國 -bc 656)*래국
萊國(bc567)*산동성 남부에 있던 수국遂國(bc682)까지 멸하여 영토가 1000리의 방국(方國)으로 커지게 된다.
잇달아 근국(根國)과 모국(牟國)은 노(魯)가 공취하고(bc 617) 산서성의 여국(黎國)은 진(晋)이 공략하니
이때에 산동의 엄국(奄國)등 부여계 8 國이 멸망하였다. 이를 두고 진하인의 史書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관중이 제나라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어 이적을 물리치는 등 중국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면 중국인들
모두는 옷섶을 왼편으로 하는 동이인이 되었을 것이다. <주자가 주해한 논어>
▶제환공이 현명한 재상 관중과 명장 성보(城父)를 얻어... 조*위*허*노 등 10 여국을 통솔하여 연을 구하며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 고죽을 이긴지라... 중국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을 얻은 고로 공구씨
(公丘氏)가 관중의 공을 찬양하여 가로되 미관 중오기피발좌임 微管仲吾其被髮左袵이라 하니 피발은 조선의 편발
(編髮)을 가리킨 것이요, 좌임은 조선의 좌편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상>
B C 4 5 0 산서성 代縣의 서북쪽 인 구주산(句注山)으로 숨어들어 기습한 조양자(趙襄子)에게 代가 정벌되어 드디어
濊(번조선)와 인접하게 되었다. (십팔사략 상 110P*사기 흉노열전).
이 무렵 趙나라가 대와 句注山 지역까지 북진하고 魏나라가 河西*上郡지대로 진출함으로서 드디어
戎(단군조선)의 경계와 접경을 이루게 되었다.(사기 흉노열전).
이 시기 단군조선이 갑자기 힘을 쓰지 못하고 쇠퇴를 보이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43세 단군 물리(勿理)의 재위 때로서 속칭 융안(隆安)의 사냥꾼이라는 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을
칭하면서 오랫동안 서북쪽에서 웅거하며 할거하다가 마침내 무리 수만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키는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융안(隆安)의(서쪽 내몽고 일대) 사냥족 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무리 수만
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兵을 파견했지만 이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겨울에 적이 도성인 백악산 아사달을 포위하고 급히 공격하니 막조선 좌현왕 가리(加利)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을 왔다가 반란군의 화살에 맞아 죽으며 대패하면서 임금은......
해두(海頭)에 내려가서 거주하다 세상을 떴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고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했으며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가 그를
따르니 동서압록(東西鴨綠) 18城이 모두 병력을 보내와 원조하였다. <단군세기>
▶3월에 큰물이 반란군의 도성까지 밀려 들어와 적병이 큰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丘勿이 병 1만 명을
이끌고 배를 타고 기습 공격해 이들을 정벌하니 적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괴멸하여 마침내 두목인
우화충(于和沖)을 벨 수 있었다......3월 16일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단(壇)을 쌓고 제천(祭天)한 다음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했으며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칭하였다.
<단군세기>
□ 일진일퇴의 치열한 각축전(戰國시대 bc 401-222)
1) 東夷系의 後退와 再整備
전국시대 중엽에 이르러 대륙에 진출한 고조선의 선발 부족은 고조선의 영향력 약화로
華夏의 전위국가들의 연합된 세력에게 차츰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이 무렵 단군조선은 두 번째의 대격변 시기로서 우화충(于和冲)의 亂으로 득세한 구물
(丘勿)이 새로운 단군으로 올라서는 정변기(政變期)였다.
때문에 삼조선과 제후(諸侯)들의 편 가르기로 인한 국세의 약화로 지배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융(驪戎)과 견융(犬戎)은 진(秦)에게 쫓기고 육혼(陸渾)의 융(戎)은 진(晉)에게 멸망하고
만씨(蠻氏)의 戎은 초(楚)에게 멸하고 이락(伊洛)의 戎도 진(晉)에 항복하고 산융(山戎)은 齊
와 燕에 밀리며 적적계(赤狄系)인 동산東山*고락씨皐落氏*장구廧咎의 여로씨如潞氏와 갑씨
甲氏*유호留呼의 탁씨鐸氏*백적白狄인 비고肥鼓등은 진(晉)에게 정복되었고 역시 백적(白狄)
인 선우(鮮虞)는 조(趙)에게 토멸되고 래이(萊夷)와 개이(介夷)는 齊에게 근(根)과 모(牟)는
魯에게 회이(淮夷)는 秦 통일시 흡수되어 만리장성 서쪽에 번조선과 부용들만이 외로이 남았
는데 그 후 秦이 이윽고 의거(義渠)를 굴복시켜 품에 거두자 동서 양쪽의 날개를 상실한
번조선이 약해졌다.
※ BC 644년 秦은 齊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얻어 최초로 황하에 이르렀는데 이 때 차지한
기서(岐西)지방은 BC 2000년부터 고조선계 부여족이 서쪽으로 빈邠*기岐지방에 들어가 하 태강
(夏 太康)이래 300년간 싸워 지킨 곳으로서 북변에 넓게 거주한 기(岐)의 양산(梁山)과 칠(漆)의
북방에 있던 의거義渠*진晉의 북쪽에 있던 임호(林胡)와 루번(樓煩)*태원지방 燕의 북쪽에
거주한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다.
▶BC 659 년 진의 목공 때 戎王이 요여(繇餘)를 파견하자 미녀와 악사 2인을 답례로 보냈으나 융왕이
기뻐해 끝내 돌려 보내주지 않았다. 드디어 戎을 쳐서 12國을 얻고 천리의 땅을 빼앗으니 西戎에 대한
패업이 이로서 이루어 졌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춘추와 전국시대를 관통하며 꾸준하게 강맹한 세력으로 나타나는 산융(山戎)이란 제후국에
대해서는 특히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周가 봉한 北燕과 南燕을 멸할 정도로 큰 힘을 가졌는데 이 당시 秦夏人들은 북방의 동방족을
맥(貊)으로 동쪽은 예(濊)로 부르기도 하였는바 貊의 주력이 山戎으로서 태행산맥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벌하면 山戎*北戎*戎이라 부르고 서쪽이나 남방으로 위세를 펼치면 적狄*적赤*적翟
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조趙와 동호東胡가 땅을 맞닿았다>함은 서남 해변을 끼고 예수豫水=예수濊水까지 東夷의
땅이란 말로 조(曹) 동쪽의 河인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건너 바다 사이에서 조선朝鮮*요동遼東까지
번조선(番朝鮮)이 서기전 273 까지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아무튼 번조선(番朝鮮)은 수세기 동안 燕을 압박했으며 진 헤왕(秦 惠王)의 사위인 역왕(易王)이 秦
을 업고 거만하자 이를 정벌코자 하려고 했을 정도의 국세를 가지고 있었다.
마침 대부(大夫) 례(禮-예羿가 後에 변한 명칭)가 간하여 중지했으나 그 후 燕과 朝鮮과의 전쟁에서
패한 燕이 우북평(영평부永平府) 어양(北京서쪽) 상곡(산서성 대동부大同府)을 다시 뺏기면서 칭신
(稱臣)한 후 태자를 볼모로 보내었다.
조(趙)에서는 조양자(趙襄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파하고 호맥(胡貊-번조선으로 서쪽 경계가
태원 동북부)과 접경했고 이어 <무령왕>이 임호와 누번을 공략해 대代-음산陰山-고관高關까지 축성한
뒤 새(塞)로 만들며 운중雲中*안문鴈門*대군代郡을 설치하였고<사기> 위(衛)도 뒤질세라 서하와 상군
에서 戎과 접경했고 진은 소왕(昭王)때 의거융왕(義渠戎王)의 亂을 극복한 후 농서瀧西*북지北地*상군
上郡을 취한 후 장성을 쌓고 있다.
연 또한 진개의 역으로 5郡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지만 곧 원래의 강역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齊는 전단(田單)이 제수(齊水)부근에 살던 적인(狄人)을 벌하자 동방부족이 齊水 북쪽 천승현
지역으로 이동해 가고 북쪽의 조선령(朝鮮領)은 燕이 침략하므로 마침내 발해를 따라 동해까지
말발굽형의 지역을 고수하게 되는데 이 무렵 舊 황하 남북은 창해군(滄海君) 남려가 지켰으며
북쪽은 난하(灤河) 서쪽지역에서 어양까지 요동(遼東)이었고 무종(無終)에서 남쪽으로 舊 황하
즉 고하(沽河)하구까지가 낙랑(樂浪)의 지역이었다.
※ 이 시기 지명고증의 좌표로서 특히 주의할 점은 <25사 지리지와 여러 중국고지도中國古地圖>
를 보면 당시 조선(朝鮮)의 습수(濕水)가 있던 산서성 항산(恒山)일대를 後代에 북평(北平)이라
했으며 明때에야 비로소 현 북경(北京)을 북평(北平)으로 부르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燕은 진개(秦開)의 役 이후 朝鮮과의 경계를 만반한(滿潘汗)으로 삼았는데 <반한>은 반한현潘汗縣=번간현
番干縣이고 만(滿)은 보정부 만성(滿城)이니 영정하 상류가 번한(潘汗)이고 역수(易水) 상류지역이 만성(滿城)
이므로 이때의 요수(遼水)는 상건하와 영정하이며 이 흐름의 중간인 영정하 동북에 <번한>이 있어 진개가 침략
한 요동이고 남서쪽이 요서이다.
하지만 비록 진개가 동으로 번조선을 침략했으나 燕의 동쪽경계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역시 요동임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강성함을 보이던 燕 소왕이 齊의 70여성을 뺏을 때
진개가 요동을 뺏은 것이어서 齊의 땅을 다시 잃을 때 번조선의 대공세로 失地를 회복했으며
이때 진개는 붙잡혀 죽은 듯한 기록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 특기할만한 사실은 요동의 명칭인데 춘추 이전엔 일정한 지역을 말하였으나 그 후로부터 진하(秦夏)세력
의 동쪽 끝을 칭하는 보통명사화 되었다는 점이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秦夏영역의 점진적 확대는 동쪽을 요동이라고 一般稱化 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로서 동방족의 이동과 밀접한 관게를 이루어가면서 요동의 위치도 이동되어간다는 걸 항상 주의해야 한다.
▶이때 齊의 북방 燕의 동남방에 있던 적狄이 예濊이며 황하 하류 부근에 살던 예濊와 합쳐
창해군과 한사군의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수경*전국책>
戰國 동란기에 조趙*제齊*연燕 등의 나라에서 수많은 유민이 단군조선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고조선의 경제력이 월등히 우수했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며 이것을 그들이 충분히 알고 있었
음을 말해주는 증좌이다.
참고로 번조선(番朝鮮)을 춘추까지는 發조선이라 하였다(管子에서 海內의 북쪽을 發조선으로 인식
한다) 그후 趙 무령왕과 晉의 북방정책이 시작되면서 발조선이 발식신(發息愼)과 발조선으로 교차
하다가 서쪽이 胡가 되어 匈奴와 합쳐지면서 동쪽을 따로 東胡라 부르게 된다.
결국 秦*漢 교체기에 이르러 북방의 貊과 동쪽의 濊가 합쳐져 예맥조선濊貊朝鮮*진번조선眞番朝
鮮이 되어 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조(趙)는 무령왕(bc325-299)에 이르러 위세를 떨친다. BC 5C 중엽까지 代 지역엔 胡貊(東胡)이 거주
했고 BC 4C 말-3C 초엔 임호와 누번아 나타나며 이 때 北夷가 계속 趙의 북방에 육박해 오던 추세였다.
이때 북방에서 趙와 땅을 맞대고 있던 東胡가 출현하는데 단군조선계로서 상당히 强國이었음을 의미
하고 BC 273년에 東胡와 代를 몰아냈다 하니 그 전에는 趙나라 동쪽의 河와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건너
바다사이 곧 동북쪽의 조선*요동으로 이어지는 땅엔 東胡가 그 북방에 조선*요동이 있었으나 BC 273년
에 비로소 東胡가 조선*요동 쪽으로 代에 있던 胡들도 조금 북쪽으로 물러간 것임을 알게 된다.
趙 혜문왕이(bc294) 燕에게 막(鄚)과 역(易)땅을 준 이유도 두 나라 사이에 낀 강한 胡를 치려고 끌어들
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는 비의(肥義)와 5일간 천하를 논하고 서하(西河) 옆 황화산(黃華山)에 올라 루원(樓元)을 불러
<中山(常山 아래 호타수 상류)은 우리 뱃속에 있는 혹으로 북쪽에 燕(태행 북쪽 馬邑과 常山 사이)과
동쪽에 胡(번조선)와 서쪽에 임호와 누번은 물론 晉과 韓의 변방이니 우리가 강병을 길러 나라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사직이 무너지니 어찌하오.
비록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다 하여도 胡 땅인 中山을 꼭 차지하고 말겠오>하며 호복(胡服)을 따라 입었
으며 이를 입기 싫어하는 공자 成의 집에 찾아가서 <상산常山에서 대代와 상당上黨까지 동쪽은 燕과 東胡
와 맞닿고 서쪽으로는 누번과 秦과 韓의 변방이 있으니 저는 이제부터라도 말 타고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면 물을 끼고 사는 사람들과 황하와 박락수薄洛水를 어찌 지키겠습니까?
그래서 배가 쓸데없는 저는 말을 타고 활을 쏘아 三胡(임호*누번*동호)와 秦*韓의 변두리를 지키렵니다.“
한 후 스스로 胡服을 입고 士大夫를 거느리고 서북의 胡 땅을 쳤다. <조세가趙世家>
2) 燕과 趙의 북방공동방어전략
燕 소왕이 趙와 역토(易土)해 막(鄚)과 역(易)을 얻음으로서(bc 294) 易水 근처로 이동해 이곳을 중심으로
長城을 쌓아 대비하자 <장의>가 소왕을 협박하며 말한 “趙가 晉에게 준 하간 땅....” 은 장수漳水와 河水
사이의 땅으로 이런 협박에 燕이 떼어준 “常山의 끝 5개 城”은 雁門과 碣石의 풍요로움이 있던 호타수
상류지역을 말하니 趙나라가 易土해 얻은 땅은 안문 과 갈석(常山 구문현의 갈석 임을 명심하라)의
땅이 틀림없다.
드디어 무령왕이 中山을 치기 위해 출정한 지역은 常山의 남쪽인 형*곡양*단구*화양*치지새*고*
석읍*봉용*동원 지역이며 燕王 희僖 원년(bc255)에 60만 대군으로 胡와 代를 침략하는데 이때의 代는
구주(句注)지역의 代땅으로 상곡군과 요서군 지역이다.
燕은 易土로 易水 水系를 방어했으나 나중에 趙의 이목(李牧)에게 전부 뺏기면서 500리를 북상한
그에게 포위되었는데 이때의 상황을 易水까지 이르렀다 했으므로 燕의 남쪽 경계는 분명히 易水
상류가 맞다.
3) 연태자 단(燕太子 丹)의 役으로 본 燕의 위치
秦의 침공으로 燕의 도읍이 함락 당하자 태자 丹은 요동에서 항전한다.
바로 이곳은 易水의 서쪽에서 요동(遼東)까지이므로(계薊와 2개월 거리) 이때 요동은 난하(灤河) 서쪽
에 있어야 하니 代를 중심으로 북쪽은 상곡군*서방은 요서군*동으로는 요동군이 자리하게 된다.
요간(遼間)에서 산란(散亂)했다는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의 요간(遼間)은 습수 즉 상건하와 영정하의
남과 북 사이를 말하며 이때 정형과 신도 사이의 지역이 中山國이므로 燕의 남쪽이 될 수 없다.
결국 燕의 남쪽에 호타가 있다는 사실을 충족하는 지역은 호타의 상류지역인 하옥성(夏屋城)이 있는
지역 뿐이다.
- 호타는 항산(恒山) 남쪽 태백산 서쪽의 로성(鹵城)부근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흘러 하옥 구주산
안문관 남쪽의 代를 지나 방향을 바꾸어 반달처럼 흐르다가 양곡에서 동으로 흘러 정형 북쪽을 지나
신도로 흐른다.
따라서 易水도 본류가 아닌 상산 부근의 역수 상류를 말해야 소진이 말한 호타와 역수*안문과
갈석이趙와 남으로 경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갈석은 항산과 상산사이 즉 관하가 흐르는 영구와 태백산 부근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文侯 당시의 燕은 결코 현 북경인 계(薊)가 될 수 없으며 지금의 大同市를 중심으로
東으로 조선과 요동의 경계인 마성(馬城)에서 南으로 구주산九注山*대代*옥산屋山*상산관常山
關에이르는 지역으로 비정된다.
이런 역사적인 인식과 배경을 기반으로 다시 [앵무새]의 지저귐을 살펴보자.
[단락 3]은 내가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야기...반론>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기자(箕子)문제와 단군역년
고찰>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니 다시 반복하여 언급할 필요성조차 없는 허접스런 궤변망상일
뿐이다.
이어 [단락 4]는 두 가지로 압축될 듯하다.
하나는 막조선 그리고 나머지는 淮岱지역의 문제이다. 아주, 아주 궁금한 모양이다.
스스로 질문을 해 놓고 [모른다...-_-;;...역시 모른다...라고 자동응답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먼저 [막조선]의 문제를 살펴보자! 이 무렵의 정세가 어찌하였는지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속적인 대변란과 격동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1) 匈 奴의 공격으로 대패하자 동쪽으로 밀려 匈奴는 예맥조선과 접하게 되니 빼앗은
고조선지역에 좌현왕(上谷=우리 땅 수리골) 과 우현왕(上郡=우리말 수리말)을 두었다.
2)배후의 언덕이 사라진 번조선도 서쪽의 방패인 의거(義渠)가 秦에게 굴복하여 북진한
秦이 농서(隴西)까지 진출하여 長城을 쌓으니 여량(呂梁)의 서쪽을 넘겨주고 河水 남쪽의
齊와 太行 서남방 박락지수(薄洛之水)를 경계로 한 曹(曹와 東胡가 땅을 맞닿았다)를
비롯해 서북쪽에서 고개를 쳐든 燕과 외롭게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데 BC 282년 무렵
발생한 진개(秦開)의 역(役)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조양자(曹襄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파하고 胡貊(번조선)과 접경했고 무령왕이 임호
와 누번을 공략해 대代-음산陰山-고관高關까지 축성후 새(塞)로 만들며 운중雲中*안문鴈門*
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 <사기>
▶진(秦)은 서하와 상군에서 戎과 접경했고 소왕(昭王)때 의거융왕(義渠戎王)의 난을 극복한 후
농서瀧西*북지 北地*상군上郡을 취한 후 장성을 쌓았다.
▶연(燕)은 진개의 역 이후 5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았다.
▶제(齊)는 전단(田單)이 제수(齊水)변에 살던 적인(狄人)을 벌하자 그들이 齊水 북쪽 천승현
지역으로 이동해 가고 북쪽의 조선령은 연(燕)이 침략하므로 마침내 조선은 발해를 따라 동해
까지 말발굽형의지역을 방어하였다.
3) 나라의 강역이 흔들리고 정세의 혼란이 심화되는 가운데 많은 부족들이 이동을 시작하는데
이들을 등에 없고 세를 불린 대군장들의 발호(跋扈)가 두드러지면서 그동안의 국가체제가
변혁을 일으키는 국가적 事變들이 연이어 일어났다.(우화충于和冲과 구물丘勿*五加의 난과
기후箕詡*한개韓介의 정변과 고열가高列加*해모수解慕漱의 흥기와 고진高辰*최숭崔崇의
낙랑국 이동*고두막한(高豆莫汗-東明)의 거병.
[환단고기]는 단군세기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서 보여주는 시각처럼 삼한 - 삼조선 체계를 주안점으로
삼은 단군조선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이 해체되고 국호 國 號 가 변경(북부여) 되어 열국시대( 列 國 時 代 ) 가 전개되는 시점에서
글을 맺는 것이다.
이는 <번 한 세 가> 나 <마 한 세 가> 의 기술태도 를 보아서도 명백하다.
즉 이유립은 대제국 단군조 ( 檀 君 朝 ) 가 해모수의 등장과 위만의 간교한 침탈로 종언을 고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번조선]도 위만에게 침탈당한 후 일단락을 맺고 [막조선]은 진* 번조선이 와해됐음에도 망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삼조선 중 반도를 중심으로 위치해 중토의 민족들과의 공방전이나 침략 등으로 인한 투쟁이
없었고 진하인 ( 秦 夏人)의 기록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우리 史書 에만 주로 언급
되고 있었다.
하지만 漢의 성장과 단군조선의 와해를 비롯해 위만의 난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발생하여 대륙과 진* 번조선 지역의
이주민이 파상적으로 유입하자 오랫동안 투쟁으로 다져진 전투력을 지닌 그들을 막을 수 없어 빠르게 세력을 잠식
당해 3 5 대 맹남 이후 기록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오랫동안 잠잠했던 막조선도 열국시대의
회오리 바람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는 그 후 막조선의 강역 내에서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새롭게 감지되며 後 三 韓 의 정황들이 점차 뚜렷하게 감지
되는 걸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두 번째 [회대지역]의 상황이다. 이 무렵에 들어 분명히 몰락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시대적 정황들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
1) 서언왕(徐偃王)에게 후왕(侯王)의 작위(爵位)를 사여(賜與)하면서 분조(分朝)로서 대륙의 남동변
을 수호하도록 했지만 BC 680 년대 무렵 주 목왕(周 穆王)의 간책(奸策)에 걸려 초 문왕(楚 文王)의
急攻 (기록을 보면 처음의 승세가 급격히 무너진 것으로 보아 周와 楚의 협격작전인 듯 하다-회남자
淮南子)을 받고 대패하여 팽성 무원현 동산(彭城 武原縣 東山) 지역인 서산(徐山)으로 들어가 웅거
한다.
하지만 곧바로 周穆王은 서북지역에서 견융(畎戎)의 맹공(猛攻)에 시달렸으며 楚文王도 그 후의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보아 徐山에서 둔진(屯陳)한 서언왕을 어쩌지 못한 듯 하다.(그를 따라
간 백성이 수만이라 하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 하지만 여왕(厲王 BC 878-842)-공위시대-선왕(宣王 BC 827-782)에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지니고
있다가 결국 BC 512년 서국왕 장우는 다시 전국쟁패에 휘말려 吳에게 패배하여 힘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좌전 노 소공 30년조).
3) 전국시대 중기이후 단군조선도 구물(丘勿)의 정변으로 내부사정이 어지러워지면서 대륙 남변에 대한 지원
과 관심이 현격히 떨어지는 추세를 맞는다.(이 때 만씨융滿氏戎이 초楚에게 근이根夷*모이牟夷가 노魯에
게 래이萊夷 *개이介夷가 제齊에 망한다).
결국 회대지역의 <한>들은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일어나던 오(吳)* 월(越)와 협력을 맺어 새로운
관계로 탈바꿈한다.(이 시기부터 그쪽 지역에서 일어난 吳*越의 국력이 갑자기 강력해져 한때는
楚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위세를 보이면서 전국시대 후반에 들어 일시적인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현상을 생각해보라)
▶淮夷는 BC 515년 이후부터는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지 않아 고증할 길이 없다.
아마도 吳 혹은 越에 멸망되었을 것이다. <부락성 중국통사 46P>
▶及楚靈會申 亦來豫盟(註: 左傳 楚靈王 蔡侯 陳侯 鄭伯 許男 淮夷會于申) 後越還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급초영회신 역래예맹(주: 좌전 초영왕
채후 진후 정백 허남 회이회우신) 후월환랑야 여공정전 수릉폭제하 침멸소방 진병육국 기화
사이개산위민호 <후한서 동이열전>
※ 그러나 이는 조금 다르다. 절강성 지역의 越이 랑야(琅邪)로 옮겨 갈 때 큰 조력을 한 기록
도 나타나 越과 함께 연합 세력을 형성하면서 재기하였다가 마침내 진시황(秦始皇) 때 붕괴하여
민호화(民戶化) 되었음(진시황이 유독 淮泗夷를 民戶로 해체하려 진력한 사실로 보아도 세력이
대단했음을 역으로 보여준다.)을 짐작케 한다.
그럼에도 핵심부족들은 여전히 변(卞)지역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잔존하고 있다가 우리나라가
열국시대에 돌입하면서 백제 세력이 같은 동족으로서 이곳으로 진출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던
기록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럼 分朝가 성립되어 있던 [앵무새]가 <뺏고 뺏어도 또 뺏는 회-대 지방은 어찌 되었을까? 역시 모른다>라는
구차한 주장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었으니 더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지막으로 그대로 되받아준다면 <결국 이유립에게 있어서 이 지역은 한민족의 위대함을 오래도록 과시하면서
지켜온 터전임을 누누이 설명해 왔기 때문에 굳이 그 전말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이 이대로 환단고기나 우리의 역사 속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의 강변대로 <한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또 빼앗아야 하니까>라는 조잡한 결론보다는 <우리 민족의 史書
인 高麗史에서도 고려의 선조족으로 기록되어있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존재하는 가운데 후일
백제의 영광과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 長淮茂族 장회무족 고려사 世家 권2 태조 16년조>
[단락 5]를 살펴보자. [앵무새]는 또 여기에서 엉뚱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다.
죽겠구만....<위만이 토벌 당했는데 우거는 멀쩡하다. 멀쩡할 뿐만 아니라 자꾸 침공해서
골치를 썩기도 한다> 쯧쯧...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래서 관련 기록을 모두 발췌해보았다.
BC 128 몸소 보기(步騎) 1만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려성(南閭城)에서 쳐부수고(파破)
관리를 두었다.
BC 120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토討)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BC 122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海城)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언급한 글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위만을 토벌하여 맥을 끊었는데 우거가 계속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참 그렇게도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아니면 기록을 전혀 보지 않고 남의 말만 들어
옮겼을까?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환히 알아볼 수 있는 구절들인데...여기서 위만을 토벌했다면 <討滅之>라고 하던가
<敗亡>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해모수는 분명히 <남려성에서 破하고 그곳에 관리를 둔 것이다> 그 다음 기록에 토벌의 이야기가
나오나 여기에서도 틀림없이 <우거>가 대상이며 <이로움이 없었다>하여 전과(戰果)가 시원치 않음을 밝혀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에서도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든 고두막한高豆莫汗과 고주몽高朱蒙(추모鄒牟로 표현하겠다)을 연결하여 불리지의 아들이란 기록
과 혼란을 야기 시킬 마음인 모양인데...어이구!!! 핀트를 잘못 잡아도 한참 어긋났다.
아마도 고두막한=東明과 추모=東明聖王의 문구를 보고 눈에 확 들어온 모양인데 아래 글로 대신한다.
결론적으로 <어라라? 이 고두막한의 아들이 고주몽이다>는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그런 유사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추모왕을 東明聖王이라 한 것은 시호(諡號)로서 [東明]을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추모鄒牟=주몽朱蒙>를 사용했는데 이는 일생에서 두드러진 솜씨가 <활을 잘 쏜 능력>
때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때문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휘諱는 주몽이다-一云 鄒牟 一云 상해象解>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諱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름>이라 하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
하려 할때는 諱라고 하는 게 법도이다.
死後에 비로소 <東明=새발간=새로운 밝은 해>으로서 <동방을 새로 밝힌 왕=동방의 태양>이란
이름이 추가된 것인데 이는 高豆莫汗이 똑같이 東明王이라 불리면서 논형 길험편이나 이를
인용한 위략에 부여의 시조로 나오는 언급과 같다.
따라서 처음부터 해석을 엉뚱하게 하였으니 다음에 나오는 <위만을 토벌했다 하면 요서를 점령했다는 말이
된다>는 잘못된 주장이다.
따라서 가정(요서를 점령했다는 운운...)이 잘못되었으므로 이어 대무신열제에 대한 언급에서 <현도와
낙랑을 토벌해서 요동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대체 이 나라들은 영토가
왜 이렇게 고무줄일까? 언제 이렇게 쪼그라든 걸까?>란 기우(杞憂)는 어리석은 판단만 가득 찬 사람들이나
할 법한 넋두리일 뿐이다.
오히려 고구려의 영토는 추모(鄒牟)이래 지속적으로 정복활동(비류국*행인국*말갈족*북옥저*선비족
*양맥국*현도군 고구려현*동부여*개마국*구다국*낙랑국)을 벌임으로서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추모(鄒牟)는 <연타발>의 지원으로 勢를 얻고 자립해 나가다 북부여의 눈길을 받는
정황이 여실하다.
결국 북부여왕은 그를 부르는데 바로 고두막한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동부여를 이룩한 해모수족단의
방계로서 고구려후 고진- 옥저후 불리지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아들이 없었던 북부여왕 고무서(高無
胥)는 사위로 삼고 대를 잇게 하였는데 이는 데릴사위제를 이어온 고구려보다 그 이전부터 연연히
내려온 전통을 따른 것이다. (사위도 아들 로서 인정하며 모두 아들(子) 이라 하여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기록들을 보라.)
또 같은 高(해)씨계 혈족의 대물림인데 뭐가 그렇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인가?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모두 해모수의 아들로 표현되어 있는바 바로 그의 혈통이 북부여 입국
(立國) 가문과 이어진다는 유래에서 出自가 원 북부여라는 걸 표현한 듯하다.
왜냐하면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모두루 묘지에도 분명히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 무튼 추모집단은 소서노와의 혼인으로 계루부 대인인 연타발의 정치적* 군사적인 지원을 받아
졸본부여의 집권층에 접근했고 뛰어난 활 솜씨와 전사집단의 힘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후 그 지역을
소란케 했던 말갈(졸본부여의 변경까지 진출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부족)을 제압*복종시키는 과정
에서 계루부의 협력과 신망을 얻으며 마침내 계루부의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비류부족이며 소노부대인인 <송양왕>을 계루부와 연합해 싸움으로서 승리해 복속시켜 강성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졸본부여의 왕위를 차지했으며(이때 졸본부여의 국호는 句麗였음) 그 과정에서 그가
속한 계루부가 연나부를 누르고 고구려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는데 후에 자식이 없던 고두막한계
북부여의 마지막 왕 <고무서>는 동족계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사 딸과 결혼시키며 사위로 삼고 나라를
넘겨준 듯 하다.
이 지역에는 추모가 도착하기 전에 秦*漢과의 투쟁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고구려 연합이 있었으
며 맹주는 송양왕(松那=消奴)이었지만 추모의 등장을 계기로 계루(졸본부여)부로 바뀌면서 구려국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형성한다.
.....다음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