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 《실낙원 서문》
밀턴의 《실낙원》을 읽기 전, 또는 읽은 후에 참조하면 좋을 책이라고 선생님께서 권유하신 책이다.
박상익 선생께서 집필하신 《밀턴 평전》과 번역하신 《아레오파기티카》를 몇년 전에 독파한 적이 있었지만, 《실낙원》은 언감생심. 그러나 창세기 필사를 하고 있는 올해는 반드시 읽어내겠다고 다짐해본다. 밀턴이 《실낙원》을 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을 참조하면 매우 사밀한 내용에 관음증적 흥분을 맛보게 된다. 이 책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부부의 신화가 어느 보편 종교의 우주론과 교리로 확립되는 교리사로서의 역사, 그리고 그 서사가 서구 문화에 뿌리내리는 문화사로서의 역사를 천의무봉하게 다룬 탁월한 저작이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또 다른 저작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한 포조 브라촐리니의 생애와 르네상스시대를 파헤친 바 있다.
《실낙원 서문》의 독서 후에 정작 다른 책들 이야기만 하고 있으나, 이는 C.S. 루이스가 《실낙원 서문》에서 《실낙원》의 내용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는 대신,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배경 지식을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등을 전거삼아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소개하고 있으니, 그 분의 집필 방식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견강부회해본다.
C.S. 루이스가 《실낙원 서문》에서 논증한 바는 결국 밀턴의 《실낙원》이란 서사시가 서양 문학사에서 논란이 많은 저작이란 것이다. 루이스에 의하면, 혹자들은 밀턴의 사탄 묘사가 매우 실제적이었기에 밀턴 자신이 은밀하게 사탄의 편을 들고 있다는 주장을, 또 다른 쪽에서는 밀턴이 그린 천사와 인간에 대한 호감적 묘사가 그가 하느님 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루이스는 일견 후자의 편에 서서 사탄 옹호론을 반박한다. 루이스는 이와 같이 《실낙원》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비평가들의 비평을 비평하며, 밀턴의 서사시를 비평한다. 따라서 《실낙원 서문》은 《실낙원》에 대한 비평이자, 밀턴의 집필 의도에 대한 변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루이스의 《실낙원 서문》 집필의도와 밀턴의 사탄 묘사에 대한 비평, 그리고 결론을 인용해 본다.
"독자가《실낙원》에 대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밀턴이 그것을 어떤 작품으로 의도했는가?’입니다. (...) 나는 이 책에서 《실낙원》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서사 형식에 집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며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 서사시에 대한 그의 문장은 서사시의 간략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그가 느낀 것을 느끼고, 그가 마침내 선택한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최종 선택에 의거한 행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으려면, 우리도 서사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서사시라는 문학의 역사는 우리가 《실낙원》을 읽는 데 있어 적어도 시인 밀턴의 전기만큼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밀턴이《실낙원》에서 가장 잘 그려 낸 캐릭터는 사탄입니다. 그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밀턴이 그려 낸 주요 캐릭터 중 가장 그리기 쉬운 캐릭터가 바로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100명의 시인에게 같은 이야기를 써보라고 하면 그중 90편 정도는 사탄의 캐릭터가 가장 잘 그려져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는 ‘착한’ 캐릭터가 가장 시원찮습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라도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악한 격정들이 끊임없이 발버둥치고 있고,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게 끈으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악한 캐릭터를 만들어 내려 할 때는 그 악한 격정들을 상상 속에서 풀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밀턴이 다룬 이야기는 위대한 이야기의 조건을 다른 어떤 작품보다 잘 충족시키는 것 같습니다. 결말에서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실낙원》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 《실낙원》에 담긴 진리와 열정은 난공불락입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반역과 교만이 그 자체로 존중받게 되기 전까지 이 둘은 본질적으로 공격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밀턴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은 문학적 현상이라기보다는 혁명적 정치와 도덕률 폐기론적 윤리와 인간에 의한 인간 숭배가 문학에 드리운 그림자입니다. (...) 비평가들은 《실낙원》이 무엇을 다루는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심 테마에 대한 증오나 무지로 인해 터무니없는 이유로 《실낙원》을 칭찬하거나 비판했습니다. 실제로는 규율과 조화와 겸손과 피조물다운 의존이라는 형식에 거부감을 느꼈으면서도 밀턴의 예술적 역량이나 그의 신학을 문제 삼는 식으로 화풀이를 했습니다."
[출처] C.S. 루이스, 《실낙원 서문》|작성자 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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