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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가요 ‘울고 싶어라’로 1980년대 후반 절정의 인기를 끌던 가수 이남이(62)씨가 강원 춘천에 둥지를 틀었다.
햇수로 9년째다.
서울 토박이로 그룹 ‘사랑과 평화’, ‘신중현과 엽전들’의 맴버로 가수 생활을 해 오다 쉰을 훌쩍 넘겨 춘천에 정착했다.
서울 생활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의형제를 맺은 중광 스님, 작가 이외수씨와의 인연이 춘천을 그의 제2 고향으로 만들었다. 자유인으로 괴짜인생을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된 셈이다.
●‘철가방 프로젝트’그룹 만들어 음악도 계속해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막 끝났을 때 ‘울고 싶어라’를 냈고, 히트를 쳤다.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치렀지만, 우리사회가 민주화 등 변화의 몸부림속에 있었기에 반향이 더욱 컸을 것이라는 게 나름대로의 분석이다. 절규하는 듯, 울부짖는 듯한 가창과 무대 제스처가 더욱 호소력있게 다가왔다.
이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올림픽 이전이나 군사정권 초기에 울고싶어라가 나왔으면 틀림없이 금지곡으로 묶였을 텐데, 절묘하게 세월을 잘 만나 히트곡이 됐다.”고 말했다. 일명 떳다떳다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 ‘내집이 그립네’도 그런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가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걸레 스님으로 잘 알려진 중광 스님을 따라 백담사와 곤지암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 중광 스님이
입적한 뒤 이외수씨와 가까이 살고 싶어 아예 춘천에 보따리를 풀었다.
부인, 두딸과 함께 춘천 후평동 도심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정한 뒤 그동안 딸들 교육도 춘천에서 모두 시켰다. ‘철가방 프로젝트’라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을 만들어 음악인 생활도 계속했다.
작가 이외수씨가 작사를 하면 이씨가 곡을 붙이는 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 ‘춘천에 걸린 달’, ‘짬뽕과 자장면’ 등을 엮어 CD 2집까지 냈다. 괴짜들끼리 모여 괴짜들의 노래를 만들었다.
춘천 마임축제와 화천 산천어축제의 주제가도 만들어 불렀다. 큰 딸 이단비(27·가수)씨와 함께 철가방 프로젝트를 이끌다 최근 딸은 솔로로 독립했고, 이씨도 지역방송에서 리포터와 패널 활동과 봉사활동으로 소일하고 있다.
특히 시인과 함께 춘천과 안양교도소,춘천 인근의 군부대를 정기적으로 찾아 시와 음악에 대한 강의와 공연을 겸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씨는 “재소자들과 병영생활을 하는 군인들이 무척 좋아해 보람이 크다.”며 “최근에는 재소자 가운데 시인까지 나왔다.”며 좋아했다.
●가수 데뷔 큰딸과는 무료 위문공연도 펼쳐
자원봉사 활동도 펼친다. 춘천 김유정문학관에서 해마다 펼치는 김유정문학제 때는 첫 회부터 자원봉사팀장을 맡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노인복지회관과 독거노인을 찾아 무료 위문공연도 펼친다. 가끔 딸 단비씨도 동행한다.
봉사와 방송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지만 춘천의 자연을 만끽하는 나름대로의 방법도 터득했다. 이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돗자리 하나 챙겨 동면 시냇가 다리밑 그늘에 누우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공지천을 산책하고, 차량으로 춘천 호숫가를 드라이브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제2의 고향인 춘천 자랑이 늘어졌다.
여전히 이씨는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희끗희끗하게 세었지만 여전히 동그란 안경, 밀집모자에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자유인이다.
이씨는 “인생 후반기에 좋아하는 자연속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보내는 삶이 좋다.”고 활짝 웃어 보였다.
글 사진 춘천 조한종기자
교도소 동기, '가수 이남이' 쾌차를 빌며..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 씨와 나는 안양교도소 동기생이다. 과거 얘기가 아니라 올해, 정확하게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가수 이남이씨와 나는 안양교도소에 있었다. 물론 죄를 짓고 죗값을 치르려 갇혔던 건 아니었다.
그래봐야 고작 일주일에 한번, 나는 인문학 강의를 위해 들락거렸고, 이남이 씨는 '담쟁이 문예대학 시 창작교실'을 위해 드나들었던 것이다. 시인들이 시를 가르치고 나면 이씨는 재소자들과 함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어쨌든 같은 해, 같은 교도소에 드나들었다는 점에서 가수 이남이 씨와 나는 교도소 동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사진 : 조선일보)
나의 교도소 동기, 가수 이남이 씨가 폐암 판정을 받고 입원 중이라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에 따르면 "이남이 씨가 기침이 심해 11월 말 병원에 갔다가 암 선고를 받았"으며 "현재 강원도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가족들이 간호를 맡고 있으며 본인의 투병 의지는 강하"다는 측근의 얘기를 전하고 있다.
가수 이남이가 누구인가. 1980년대를 풍미한 밴드 '사랑과 평화' 출신의 가수가 아닌가. 1974년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이남이는 1977년부터 밴드 '사랑과 평화'에서 활동했고, 1988년 '울고싶어라'로 솔로 데뷔를 해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후 춘천으로 내려가 지역 음악인들이 뭉친 밴드 '철가방 프로젝트' 활동을 지원해왔다. 특히 '철가방 프로젝트'에는 역시 가수인 이남이 씨의 큰 딸 이단비(27) 씨가 밴드의 여성 보컬을 맡고 있기도 하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최근 이남이 씨는 "자신의 음악 활동보다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과 함께 지역 문화 활동에 앞장서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매주 춘천교도소와 안양교도소를 교대로 돌며 재소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는 활동을 줄기차게 해오기도 했던 것이다.
(사진 : 경인일보)
얼마전 이남이 씨를 직접 볼기회가 있었다.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주최한 교정위원 간단회 자리에서였다. 나는 교도소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가수 이남이 씨가 나타났던 것이다. 다소 늦게 나타난 그의 모습은 여전히 밝고 생기가 넘쳐 보였지만 한편으론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어 다소 초췌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몸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역시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시 낭독회를 가졌던 시인 정호승 씨는 '12월은 용서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잠시 시인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를 음미해 보자.
"12월은 용서의 계절이다. 겨울이 되어 나무가 잎을 다 떨어뜨리는 것은 용서하기 위하여 자신의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뭇잎을 나무들의 미움과 증오의 잎이라고 생각한다면, 12월의 나무들은 그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알몸으로 용서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요즘 길을 가다가 아직 마른 잎을 그대로 달고 있는 나무를 보면 ‘저 나무는 아직 용서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나무야말로 바로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나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쩌면 우리 모두 겨울이 와도 증오의 잎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나무인지도 모른다. 올 겨울엔 잎을 다 떨어뜨리고 저 용서의 자세로 고요히 서 있는 나무들을 통해 인간의 용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나무들은 용서의 자세로 겨울을 보내기 때문에 이듬해 봄이 오면 다시 새 움을 틔우는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만 인생에 새해가 오고 봄이 올 수 있다. 신은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나의 잘못을 두 가지 용서해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또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도 하지 않는가. 12월에 첫눈이 내리는 것은 서로 용서하라고 내리는 것이다."
끝으로, 가수 이남이의 90년대 빅히트곡 '울고 싶어라'를 읊조리며, 나의 교도소 동기, 이남이 씨의 쾌차를 진심으로 기원
본다.
'울고 싶어라'의 이남이 폐암으로 별세
이남이. 강원도 한림대학교의료원 춘천성심병원에서 2개월간 폐암과 싸우다 62년의 고단한 삶을 끝내다. 이른 오후. 2010. 1. 29(금)
누구나 잠시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그는 병마의 고통에서 울고 좀 일찍 떠남에 서러워 울었던 모양이다. 한때 나도 절망의 길에서 가슴으로 울어왔던 울음, 소리내어 울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장석대
'울고 싶어라' 는 지난 달(2010년 1월) 폐암으로 고인이 된 가수 이남이의 히트송이다. "이놈의 암 이 사람을 잡는 구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 말이라고 한다. 그 말 앞에도 뒤에도 어울리는 말이 '울고 싶어라' 무엇이 그리도 울 일이 많았을까? 뭐가 그리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많았을까?
1988년 봄, 전국은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코흘리개 꼬마에서 수염이 희끗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고 싶어라' 를 외쳤다.
찌그러진 벙거지, 남루한 옷차림, 동그란 안경테 너머로 허멀겋게 풀어진 눈동자, 엉성한 콧수염… 분장술이 제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그보다 더 기막힌 거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 몰골에 빈 강통 하나만 턱 차면 영락없이 한 끼 얻어먹기 위해 길거리에 나선, 완벽한 거지였다. 이토록 폼없는 가수가 온몸을 비틀며, 오만상을 지으며 주문을 외우듯 부르는 노래에 우리들은 옴쭉 달싹 못했다.
영악한 사람들이 왜 그토록 빈틈투성이인 한 가수의 최면에 걸려들었을까? 아마도 개개인의 삶의 뒤켠에 말 못할 사연들이, 아마 몇날 며칠 밤을 새워 울어도 모자랄 눈물이 그만큼 고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시절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엔 울고 싶다는 마음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 왜 가슴속엔 그렇게 울고 싶은 마음이 똬리를 틀었을까?
1988년은 6공화국이 본격 출범한 해다. 1987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13대 대통령에 오르며 1988년은 민주화 물결로 봇물이 터졌다. 사상 첫 여소야대 국회 탄생, 올림픽 개최, 5공 비리 척결을 위한 청문회, 통일논의 개방 등 독재와 부정비리로 뒤범벅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상과 가치관을 창출해 내려는 국민의 요구가 '민주화' 라는 기치(旗幟) 아래 마구 터져 나왔다.
억눌린 욕구의 일시적 분출은 계층별, 직능별, 혹은 지역별 이익집단의 시위, 점거농성 등 집단적 민원의 양상을 낳기도 했다. 특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은 근로자, 해직공무원, 농민, 재개발지구 세입자 등 온갖 민원 집단의 시위로 1년 내내 몸살을 앓았다. 질곡 속에 누적되었다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각자의 목소리는 결국 그만한 무게의 울음을 그동안 감추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울고 싶어라' 는 자신에게 눈물을 가져다준 세상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며 무언의 항거였다. 또 과거 암울했던 시대에 살이 곪고 터져도 삿대질 한 번 못하고 안으로만 삭여온 못난 자신에 대한 자아비판이며 학대이기도 했다. 또 '울고 싶어라' 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세상이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나사 풀린 모습으로 악을 고래고래 써대는 이남이의 모습은 일정한 틀에 알게 모르게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신선한 파격이었다.
이곡을 부를 당시 이남이의 나이는 마흔 한 살이었다. 가수들에게 모든 노래는 분신이라고 할 수 있
다. 가수 이남이는 '장미' '한동안 뜸했었지' 등이 히트한 그룹 '사랑과 평화'의 멤버였는데, 폭발적
인 인기를 얻던 1980년, 연예계에 불어 온 사회정화 차원에서 된서리를 맞았다. 이남이도 대마초
흡연에 연루되어 서대문 구치소에 두 달간 들어갔다 나왔다. 방송 출연정지 등으로 노래조차 못 부르
는 신세에, 허탈감과 좌절감에 빠져 지내면서 당시 출연하던 '무겐나이트클럽' 무대에 올라 마지막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는데, 그 노래가 '울고 싶어라' 이다.
사실 이 노래는 어떤 여가수에게 주었었는데, 히트를 못하고 1986년에 다시 결성된 '사랑과 평화'의
재기 앨범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울고 싶어라' 이다. 이 앨범은 1988년 발매되어 대 히트를 하며
온 국민들을 '울고 싶어라' 하며 울게 만들었다. …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거야 아마 알거야… 노래하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팬의 한 사람으로 명복을 빌며.
박하산문과 시학 카페지기
폐암과 투병하던 가수 이남이님이
29일 오후 2시14분 입원중이던 강원도 춘천 한림대 춘천성심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62세.
유족으로는 아내와 두 딸이 있다. 빈소는 춘천 학곡리 춘천장례식장 101호에
마련됐다.
이남이님의 한 측근은 “어제 낮부터 갑자기 상황이 좋지
않아,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고 밝혔다.
80년대 인기
밴드 사랑과 평화의 베이시스트 출신이자 90년대 히트곡 ‘울고 싶어라’로도 유명한 이남이님은 지난해 11월 말 폐암 선고를 받아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 춘천성심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70년대 초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로 데뷔한 이남이님은 전설적인 록밴드 사랑과 평화 베이시스트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80년대 말 솔로로 나선 뒤에는 ‘울고
싶어라’를 발표해 유명세를 얻었다.
최근에는 후배 음악인을
발굴하기 위한 철가방 프로젝트를 만들어 강원도 춘천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해오기도
했다.
스포츠동아 김원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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