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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베팅>의 줄거리:
대한민국을 베팅공화국이라고 일컫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베팅은 이제 단순히 도박판의 용어만은 아닙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그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가 결과를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실 모두 다 베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기독교 신앙을 베팅으로부터 확연하게 구분 짓는 사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베팅(betting)
(막14:1-9)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베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베팅(betting)’ 이라는 그 영어단어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내기’입니다, ‘내기’
도박판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내기라고 하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는 않지만, 같은 뜻의 베팅이라고 하는 이 도박판에서 사용되어지는 단어는 이제는 일상적인 외래어가 되었습니다.
도박판이 아니라도, 도박판에서 쓰인다는 그 부정적인 뉘앙스를 벗어나서 이제는 일상적으로 베팅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떨 때 베팅이라는 말을 사용 하느냐?
예를 한번 들어보면 기사에 나온 것이 이런 게 있더라고요.
‘현대 기아차, 유럽공략 베팅 먹혔다’ 또 ‘케이블 TV 디지털 전환 위해 7조 쏜다, 스마트한 미래 베팅’
그러니까 베팅이라는 말이 뭡니까?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단, 그 결과를 확정할 수 없을 때, 리스크가 존재할 때, 그때 우리가 베팅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는 거예요.
미래를 위한 투자, 결과를 확정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한 투자행위가 베팅으로 비유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에다 그렇게 썼더라고요.
‘대한민국은 베팅공화국이다’
꼭 사행성이 아니더라도, 베팅이라는 말은 그렇게 쓰여 질 수 있는데, 문제는 신앙과 베팅이 혼동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신앙을 생각하는 경향들이 짙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꼭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아니라도, 전통적인 장로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앙은 일종의 베팅인 것으로 체질화 돼버린 경향을 너무나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신앙이 베팅이 돼버렸다는 얘깁니다.
자, 그것을 구분해 주는, 신앙과 베팅을 구분해 주는 내용의 본문이 오늘 등장합니다.
본문에 그런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 마가복음 14장은 참 재미있어요, 여러분!
어떤 점에서 재미있느냐 하면, 1절과 2절에 이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잡아 죽이려는 그러한 구체적인 실행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착수되어집니다.
그것이 일단 14장에서 전제되어지고 예수님의 죽음이 이제는 실제사건으로 내일 모레는 죽게 됩니다.
이것이 딱 전제되고 그러한 예수님이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다양~한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볼 마리아의 반응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가룟유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 겟세마네 기도가 나타나는데, 이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죽음, 하나님의 뜻으로 확정되어져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 지도자들의 반응, 그리고 그 공회에 참석하고 있는 그 동안 예수를 랍비다, 선지자다, 메시아다 생각하고 쫓아다녔던 일반 대중들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반응하느냐.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 끝이 나는 예수님의 지상생활에 대하여 최종적인 입장 정리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여기서 마리아가 첫 번째 입장정리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리고 주님께서는 9절에 뭐라 그러냐 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 마리아의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부은 ‘이 도유사건이 함께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오해할 때가 있어요.
옥합을 깨서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그런 헌신을 했고, 이 헌신의 행위가 아름답고 좋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에 상응한 상급으로 준 것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이 행위가 기억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억되는 게 상이다, 이러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헌신하자!’ 이렇게 이해해 버리면, 잘못된 이해라는 겁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행위가 복음을 전파하는 곳이면 다 기억되리라고 하는 이 말씀은 무슨 얘기냐 하면, 옥합을 깨뜨리는 그 행위자체가 복음을 수용하는 유일한 행위요, 예수님의 죽음사건, 이게 바로 복음의 내용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가장 올바른 입장정리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훌륭한 것이라서 상이 주어질 것이다’ 이 뜻이 아니고,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누구나 다 옥합을 깨는 마리아의 이 마음상태가 되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도대체 이 옥합을 깨는 마리아의 이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그 내용이.
이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 배경으로 한번 깔아 놔 봐요.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배경으로 깐다는 얘기는 비교를 해 본다는 얘깁니다.
가룟유다, 배반합니다.
제자들, 확언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고 다 도망갑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다시 말하면. 가룟유다가 상황판단이 빠르고 정확한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이 분명하다고 확정을 하는 겁니다.
이때 가룟유다가 배반을 한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 자기 미래를 위하여 베팅을 한 겁니다.
예수님에게 자기를 건 거에요, 자기 미래를 건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이 확정된 것이 분명해지자(자기 마음속에), 자기 미래를 예수님으로부터 빼냅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드렸던 투자가 있으니까, 그간의 투자에 대한 손실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넘기려고 합니다.
제자들도 아직 죽음이 확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에서는(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같이 할 거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죽음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상황 앞에서 곧바로 부인하고 다 도망갑니다.
자기 미래를 예수님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다 빼냅니다.
미래를 위한 베팅을 다 취소시켜 버리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마리아의 마음가짐이 어떤가를 살펴본다는 거예요.
요한복음에 마리아라고 명시가 되어 있어서 마리아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 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는데 옥합이라는 게 본문에 나오지만, 300데나리온 어치의 굉장히 값진 향유였습니다.
‘나드’라고 하는데 인도에서 만들어지는 향유라는 것이에요.
300데나리온이면,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 때 남자만 오천 명인데, 다 여자와 아이 노인 다 합치면 이만 명가량 된다고 그랬어요, 학자들이 추정하기에.
이만 명이 한 끼 식사를 배불리 먹는데 돈이 얼마 들어가나 하면, 빌립의 계산에 의하면 200데나리온이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하루 근로자들의 하루 임금이 평균임금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므로 300 데나리온 이면 연봉이에요, 연봉.
오빠가 나사로이고 언니가 마르다인 이 집안에 부모도 없이 살고 있는 마리아에게 300데나리온의 향유라는 것은 이 여자의 개인적인 전 재산이고, 이 여자의 결혼 지참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근데 그걸 깨버렸다는 거예요.
이 향유를 어디다 쓸 거였겠습니까? 이 처녀 마리아가.
그 당시 여자들의 미래는 어떤 남자와 만나서 결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향유가 결혼 지참금처럼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미래를 베팅할만한 남자를 만났을 때에, 그 마음속에 계산을 떠나서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미래를 함께할 남자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깁니다.
그때에 이 옥합을 사용하는 겁니다.
존경과 사랑의 의미, 존경과 사랑의 표현으로, 내 마음 내 인생의 미래를 향한 모든 염려를 당신에게 베팅합니다라는 뜻으로 이 옥합을 깨서 사용합니다.
옥합을 깬다는 얘기는 고대에 그런 습관이 있었다고 해요.
왕이라든지 귀한 분, 내가 평생에 존경해야 될 그런 분들이 내게 있는 어떤 그릇에 물을 담아 먹었다, 포도주를 담아 먹었다 그러면, 그 그릇이 하도 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깨버렸다는 얘깁니다.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안돼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내 일생에 존경할 마지막 분이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깬다는 행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자는 옥합을 자기의 미래를 베팅할만한 남자를 위해서 사용하기 위한 결혼 지참금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데, 문제는 주님께서 내일모레 죽으신다는 겁니다.
주석들을 보면은, 이 여자가 예수님께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렇게 했는데,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듯이 결국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게 돼버렸다 이렇게 썼더라고요.
저도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성경에 명시된 것만 해도 세 번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뒤에 성전정화를 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천국에 창녀보다도 더 늦게 들어갈 것이라고 얘기하시고, 그리고 꼭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머물렀는데 주로 이 마리아의 집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누구냐 하면, 누가복음에 보면 마르다가 한창 바쁠 때 마리아는 일을 도와줄 생각도 안하고, 예수님 무릎 맡에 앉아 가지고 말씀 듣기를 좋아하던 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머무는 동안에, 이 얘기 저 얘기 대화를 하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죽으실 거라는 말씀을 안 하셨을 리도 없을 것 같고, 제자들처럼 자기들 기분에 빠져서 예수님이 아무리 죽을 거라고 예고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자기에 빠져있는 여자도 아닌 거 같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알 수밖에 없다는 얘기에요.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도 그렇고, 대제사장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계시고 성전을 정화하신 전무후무한 혁명적 사건을 일으키신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것이에요.
왜냐 하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나귀타고 입성하시기 바로 전 10장에 마지막으로 또 예고를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그 제자들이 들은 얘기를 마리아에게 안 했을 리도 없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대’ 얘기 안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얘기는 뭡니까?
쉽게 말하면, 망해버린 회사의 주식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 이겁니다.
내일모레, 이 지상에서의 삶이 죽음으로 종지부 찍힐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 미래를 함께할 남자를 만났을 때 써야 할 옥합을 깨버린다는 것은,자기 미래를 접는다는 얘깁니다.
자기 미래를 위한 베팅을 그쳤다는 얘깁니다.
더 이상 마리아는, 훌륭한 남자 만나서 자기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일을 접어버렸다는 얘깁니다.
미래를 접는다는데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죽는 예수님에게 옥합을 던져버린다는 것은, 옥합의 향유를 부었다는 얘기는, 미래를 책임져줄 남자에게 써야 될 옥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죽을 것이에요.
왜냐 하면,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갔을 때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거라는 얘기를 기억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못 받아들인 거였겠지요.
그러므로 마리아의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행위는, 이제 내 미래는 주님 이후에는 그 누구에게도 베팅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언하는 얘기이고, 주님이 죽는다면 주님의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에 나의 미래를 함께 묻어버리겠다는 얘기였다는 얘기에요.
기독교 신앙은 이 지상에서의 나의 미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묻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복음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이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함께 얘기 될 것이었다는 얘깁니다.
장례가 뭐에요?
예수님의 돌아가심의 사건이 복음사건이니까 그 장례를 준비한다는 것은 복음사건을 준비하는, 복음사건을 대하여 맞이하는 유일한 마음가짐이 바로 마리아의 마음가짐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내 지상에서의 미래를 접어버리는 겁니다.
내 지상에서의 미래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그 예수님의 죽음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라는 거예요, 마음가짐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왜 교회가 교인들에게 십자가를 일상화 하도록 지도하지 않을까요?
십자가 사건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지은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고백함을 통하여 죄 씻김을 받습니다.
내가 죄인이니까 그렇게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해서 함께 연합하여 내가 죽은 것이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죄 사함입니다.
자! 그리고 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교회가 뭘 얘기하는가 하면, 이 지상에서의 비전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이다 뭐 온갖 얘기를 다하면서 이 세상의 비전을 얘기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십자가가 얘기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베팅은 예수님의 능력에 베팅이 되고,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걷던 모습에 베팅이 되고, 병자를 치유하시던 모습에 베팅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비전이라는 단어에 미쳐버린 것과 주님의 십자가를 일상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에요,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일상화 하지 않으면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비전이 좋고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베팅이 좋으면 십자가는 일상화 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일상화 하며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서 죽는다는 일상화적 십자가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러면, 내 인생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죽음에 묻어버리는 거예요,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이게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옥합은 마리아의 미래였습니다.
마리아의 미래를 담보해 줄 남자에게 드려져야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미래가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죽는 주님에게 자기의 옥합을 드립니다, 자기의 미래를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라는 이야기에요.
자! 미래가 없어지면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으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인생이 올라가 버린다는 얘기에요, 위로.
위로 인생이 올라가고, 이 사람의 앞으로의 삶은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이든 실패든 그건 하나님 것이 돼버립니다.
더 이상 내가 베팅할 내 미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내 미래를 접을 생각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 자신과 나의 미래 중에, 어느 것을 마음을 쏟으며 사랑할 것인가를 묻고 계시기 때문이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미래까지도 내 마음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묻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이끌어가려고 하는 의도에요.
어떤 거?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이 열린 겁니다.
십자가는 이제까지의 내 모든 죄를 씻어주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십자가로 일상적으로 생활함을 통하여 내 미래를 주님의 죽음과 함께 묻음으로써, 내 인생의 미래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산다는, 우리 신앙의 표현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데, 마리아가 주님이 십자에서 죽으실 것을 대해서, 가장 복음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는 얘깁니다.
미래를 위한 우리의 투자, 미래를 위한 우리의 베팅 이것은 십자가와 함께 끝나야 합니다.
베팅이 끝나지 않는 삶은 끝내 신앙인이 아니고,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베팅이 뭐라고요?
미래를 위한 나의 투자, 내가 확정할 수 없는 결과, 그것이 바로 베팅인데, 그 베팅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끝나고 내 미래는 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내 미래는 하나님께만 담겨있는 것이고, 하나님께 담겨있는 내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닌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옥합을 깨뜨림이 일상화될 수 있게 해 주셔서,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한 베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복음을 바로 받아들인 사람의 삶이 오늘하루도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오백투자로 몇억을 벌었니 하는데 죽기로 하고
투자자가 있을가요 꿈을 접고 예수와 함께죽자
질러보지요 죽어야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