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59) - 주 안에서 죽은 자의 복
본 문 : 계시록14 : 12 –13
계14:12-13절을 펴십시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시더라“
지난 시간에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과 그 심판의 날을 알리는 천사의 소리가 성도들에게는 복된 소리, 복음이 되는 신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성도들은 그 심판의 날이 되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심판의 임박함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매매도 마음대로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고 실상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진짜 쉬는 자, 정말 자유한 자들은 바로 성도들이었다는 것이지요.
12절은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고 불과 유황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고난을 받게 될 마귀의 세력들과 대조적으로 영원한 쉼을 얻게 될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계14:2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 본문은 우리가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고,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한번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왕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단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히 선악과가 저주의 과일이라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모든 인간은 만물보다는 상위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 모든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절대하위에 있을 때에만 그 복이 유효하다고하는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곧 ‘너는 내 말을 지켜야 하는 자다’라는 상징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생명력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복’은 히브리어 – ‘바라크(=무릎을 끓다/절하다/하나님께 기원하다)’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고 절하는, 곧 예배드리는 자가 복된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마저 자기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왕처럼 행세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앉아버린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그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자들이 그 계명을 버리고 자기들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당연히 그 타락한 자들과 달리 자신의 의도와 계획과 욕심과 야망을 다 누르고 원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먼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계명들을 몇 가지만 살펴보지요.
출20:1-17절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을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여러분, 이 계명 다 잘 지키고 있습니까? 분명 오늘 본문(계14:12)에서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계명인 십계명을 읽었는데, 이 계명도 다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기본적인 계명들은 이를 악물고 지키겠노라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에게는 못할 것도 없는 그런 계명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비록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적인 삶을살았지만, 어쨋든 이 기본적인 계명을 외형적으로는 분명하게 지켜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마음)까지도 포함된다고 다시 율법을 정의해 주십니다.
마5:21-45절을 펴서 읽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화해)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간수)에게 내어주어 옥이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이로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에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 함이니라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나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약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같이 해야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이라고 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라도 어기면 모두 어긴 것이 됩니다.
약2: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더군다나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쉬는 성도들은 그들의 행한 일을 근거로 쉬게 된다고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계14:13절을 함께 봅시다.
계14:13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이르시되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지요? 그들에게 저들의 수고가 그치고 쉼을 얻게 된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다. 여러분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실 것 같습니까?
저의 경우도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이럴 경우 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못 지킬 것이라면 그냥 애시 당초 포기하고 ‘부어라 마셔라’ 광란의 밤으로 보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12절을 보자고요.
계14:12절,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 믿음이 밀접하게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냥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만 끝났다면 성도들은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절대 그 계명을 온전히 다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이어서 ‘예수 믿음’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지 모릅니다.
여기 ‘예수 믿음 - 텐 피스틴 예수’(τὴν πιστιν Ιησους)은 소유격입니다. 헬라어의 소유격은 네 가지로 쓰입니다. 단순히 소유격을 나타낼 때도 쓰이지만 주격으로도 쓰이고 원인을 가리킬 때도 소유격으로 씁니다. 그리고 목적격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음 – 텐 피스틴 예수’는 ‘예수의 믿음’ 혹은 ‘예수가 가진 믿음’ 혹은 ‘예수를 믿는 믿음 예수에 대한 믿음’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 우리 것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구약의 계명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통해 이미 모두 지켜내셨고 완성시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계명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완전한 인간의 신분으로 모두 지켜내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결례의 날이 되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서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아이를 낳은 산모는 부정한 여인이라 하여 반드시 아이를 낳은 후에 아이와 함께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남자 아이는 40일, 여자아이는 80일이 지난 후에 어머니와 아기들은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자아이 중 장남들은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체로 알고 있는 도덕법들뿐만 아니라 위의 내용들도 다 계명입니다. 실제로 계명들은 248개의 긍정 계명과 365개의 부정 계명을 합한 총 613개의 계명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누가복음뿐 아니라 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셔서 모든 율법을 하나하나 다 지키고 계신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도덕법들을 다 지켜내셨음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을 주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그분의 은혜로 마치 우리가 계명을 지켜낸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사역을 믿음으로 그 모든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이야기 하는 ‘예수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렇게 형편없는 삶을 사는데도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우리의 것으로 여겨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지킨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쉼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성도들은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킨다’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과 예수 믿음이 함께 붙어있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다, 선물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을 좇아 그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까? 정말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으시고, 더군다나 죽으실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요구를 다 지켜낼 수 없는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어떤 인간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우고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려는 시도들이 나오는 것이지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기독교의 최종 목적이라면 간디나 슈바이처가 최고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게요?
여러분 제가 기독교는 성품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린 것은 ‘기독교는 무슨 무당 종교처럼 ‘나보다 힘센 어떤 신적 존재에게 아부를 떨어서 그 힘을 빌려 내 유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무(本務)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드린 말씀이지 ’어떻게 해서든 깨끗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땅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고 엄청난 업적을 쌓고 자신의 인격을 수양해서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내가 나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진짜 행복한 삶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분께만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께 순종하게 된 자들의 삶이 변해 가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계명이 완성이 되어, 이제 우리는 형편없는 살았어도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해서 이제 우리는 아무렇게나 불효를 하면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부모를 하나님의 자녀로써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다분히 의무감으로 부모에 대한 효도를 했었다면 이제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 나를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헌금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 모든 것이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기에(고전6:20)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사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은 바로 그 ‘항복’에서 나온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계시록을 강해하면서 목소리 높여 요구하는 성도의 바른 삶도 바로 그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그렇게 많이 듣고 때로 배우고,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항복하는 순종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은혜를 베푼 분께 여전히 게으르고 모나고 불 성실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복음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확인해 보시라는 의미에서 목소리를 좀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것들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인간들은 얼마든지 자기의 자랑과 드러남을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온갖 짓을 감수할 수 있는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롬10: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제가 말씀드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인격은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위해서라든지, 또한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고 선행을 행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거룩은 단순히 깨끗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데 왠지 가까이 하기엔 불편하다, 솔직히 표현하면 밥맛이 없다고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느껴집니까? 그 사람들의 바른 생활의 의도는 남을 유익하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랑과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닮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나를 자랑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이 목숨을 끊어가며 사랑하신 지체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겸손이요, 온유요, 인내요, 사랑이요, 충성이요, 절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만 나올 수 있는 아주 고급한 성품이요 인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러한 고급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우리 교회 공동체를 던져 놓으신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성품과 인격은 바로 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에서 나온 성품과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걸어놓은 가짜 열매처럼 억지로 만들어 내는 그런 성품과 인격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가장 행복하다’라는 것을 깨들은 사람이 그 지식을 근거로 행복하게 행하는 성품과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주 실패도 할 것입니다. 자주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때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난 그리스도인이다’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말씀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턱없이 모자라는 자신의 모습을 매일매일 발견하면서 진정으로 겸손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화를 참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불가능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정합시다. 인간이란 얼마나 못되고 추하고 타락한 존재인지 인정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나를 위해 죽으신,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감격하십시다. 그 감격이 성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천천히 인도해 갈 것입니다.
거듭해서 강조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도 그냥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한 거룩이 아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앎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겸손한 거룩, 바로 그것이 성도들이 유일하게 하셔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까지 다 주셨습니다. 이미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기쁨을 위해,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로 경주하는 것입니다.
벧후1:3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보십시오. 다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신다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무조건 들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내 아들이 자기 몸을 천박하게 막 굴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도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요 그리고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실력과 능력이 대단한 분이십니다. 자기가 개척하여 20여년을 목회한 교회를 부목사에 맡기고, 자기는 부목사가 개척을 해서 고전하던 작은 교회로 가서 목회를 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를 떠나면서 기도를 부탁하기를 “혹시 부목사가 실패한 교회를 내가 가서 부흥이 되면 사람들이 나를 능력 있는 종이라면 치켜세울 것이니,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그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정말 그분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시는 이 시대에 몇 안 되는 그런 목사님이신데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나?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하나님은 그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의 문을 닫아 버리셨을까요?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직접 부르신 사도바울을 왜 다메섹에서 만나 구원하시고 십여년간 선교 도구로 쓰시지 않으시고 아라비아에서 다소에서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
때로는 왜 옥에 갇히기도 하게 하셨고, 매도 수없이 맞고, 태장도 맞고, 돌로도 맞고, 자지 못하고 주리기도 했고, 굶고 춥고 헐벗게 하셨을까? 심지어는 사단의 가시라고 불리운 간질병을 그냥 두셨습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
모세의 경우도 보세요. 경험도 풍부하고 정신이 또렷하고 힘도 넘치고 의욕이 넘치는 40세에는 모른척하시다가 이제 다 죽어가는 80세가 되어서야 그를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은 참 일을 비효율적으로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또 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을 살려서 오래오래 하나님의 일에 쓰시지 않으시고 그냥 돌에 맞아 죽게 만드실까요? 하나님은 아까운 일꾼을 한 사람을 그냥 놓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이 목적일 수 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는 얼마나 연약하고 더럽고 악하고 게으르고 추악하고 무식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는 하나님 없으면 절대로 살 수 없는 자입니다’라는 항복을 받아내심으로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어 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했던 교회의 문을 닫으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무능력한 존재인지 너무나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저는 매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렇게 설교를 마지막으로 현직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목사님에게서 바로 그 항복을 받아내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왜 그 유능한 목사님을 목회의 자리를 빼앗아갔을까요? 의아해 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목사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셔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데 관심을 가지신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CS Lewis가 죽기 직전에 쓴 ‘A grief observed’라는 책이 있습니다. 59살까지 독신으로 지내던 CS Lewis가 ‘Joy’라는 여자 작가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몇 년동안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 아내가 암으로 죽습니다. CS Lewis가 그 아내가 죽은 뒤에 그의 마음 상태를 글로 옮긴 것입니다.
저는 「스쿠르 테이프의 편지나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 등 이런 대작을 쓴 CS Lewis가 죽기 직전에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내를 잃은 슬픔이 크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나님을 심술쟁이 영감이라고 막말을 합니까?
그리고 하늘의 소망을 이야기 하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몰지각한 사름들로 몰아세웁니다. 그런데 그 책을 통해 배울 것이 있습니다.
CS Lewis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이미지로 가지고 있던 믿음, 신앙, 슬픔, 고통 등 이런 것을 실체로 경험하면서 진짜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고 추한 존재인지 깨달았고 얼마나 신앙의 어린아이친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때까지 가짜 돈을 걸어놓고 포커게임을 하는 사람처럼 신앙에 대해 막연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슬픔, 고통, 환난 등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또 남들로부터 들을 때 자기는 자기 안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로 그것들을 판단하고 섣부른 위로를 하고 섣부른 정죄를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에게 그러한 고통이 실제로 오게 되니까 지금까지 가짜 돈으로 게임처럼 즐겼던 포커게임이 이제 자기의 전 재산을 걸고 하는 손에 땀을 쥐는,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게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CS Lewis는 말합니다. 그동안 자신은 굉장한 신앙인인 것처럼 살았고 행동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분지로 만들어 놓은 나의 신앙의 성을 왕창 부수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지으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사건들, 상황들까지도 동원하셔서 우리를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질병과 고통과 부도와 이혼과 굶주림 같은 것들이 동원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킨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나는 그 사실을 믿으니까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고통은 나에게 유익이다’ 그렇게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잘 참아냅시다. 인내합시다. 신앙인으로써 우리는 만들어 주신 우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한 번 잘 살아봅시다.
잘 안 되도 괜찮습니다. 때론 CS Lewis처럼 하나님께 삿대질할 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실존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우리는 여전히 못나고 연약한 존재인데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걸까?’하고 감격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가다보면 주님의 넒은 품으로 안기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하나님 도우심이 없이는 실패할수
밖에 없는 우리삶^ 겸손한 거룩의
삶을 인도하옵소서 ~
강해59' 감사하며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