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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좁은문과 넓은 오지랖>의 줄거리:
넓은 오지랖은 원죄의 저주입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시는 말씀의 뜻은 바로 넓은 오지랖의 저주에서 빠져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넓은 오지랖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넓은문이고 멸망으로 귀결되는 넓은 길입니다. 그럼 대체 오지랖이 넓다는 경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그리고 좁은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알아야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좁은문과 넓은 오지랖
(눅13:22-35)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좁은 문과 넓은 오지랖>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넓은 오지랖!
이게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태도에 반대 되는 마음가짐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넓은 오지랖은 원죄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저도 모르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파트 단지 내에 마트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조금 걸어가면, 한 5, 6분 걸어가면 큰 마트들이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로 마트와 원 마트.
그리고 차타고 조금 가면 이마트, 홈플러스 이런 대형마트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단지 내에 있는 조그만 상가에 있는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산다고 해봐야, 가만 보면 집사람이 두부, 달걀 사는 정도입니다.
그 집이 걱정이에요.
그런데 그 걱정이 아주 요즘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GS 마켓이라는 것이 아파트 단지 내에 개업을 했습니다.
하나로나 원 마트보다는 작지만 원래부터 있던 작은 마트보다는 5, 6배 이상 되는 마트에요.
저희 집 창문 뒤쪽으로 내다보면 두 마트가 다 보입니다.
걱정이에요, 가끔 두부 사러 집사람이 갔다 오면 물어봅니다, 그 마트 주인의 표정이 어떻더냐고.
뭐 의욕이 없다는 거예요, 그동안 물건을 사면 포인트를 적립해 주었는데 이젠 아예 그것도 안 한답니다, 자포자기 상태라는 겁니다.
아하, 걱정이에요.
그렇게 걱정을 하고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는 제가 혼자 웃습니다.
무슨 조석거리 없는 주제에 천하를 걱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내 코가 석자인데 이게 웬 오지랖입니까?
산책하다가도 새로 가게가 하나 생기면 그저 그 가게에 손님이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그것만 보고 다니는 겁니다.
이 오지랖도 병이지요.
여러분, 오지랖이 뭡니까?원래는 이 윗옷자락이 오지랖입니다.
그래서 속에 겹겹이 옷을 입고도 그 옷들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상태를 오지랖이 넓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게 비유적으로 쓰이면서 ‘주제넘게’ 자기 처지도 모르고, 또 ‘쓸데없이’ 자기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남에 일에 이 일 저 일 간섭하고 참견하고 하는 이런 마음가짐을 오지랖이 넓다고 얘기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이 넓은 오지랖의 상태를 생각하자면 이게 바로 저주라는 얘깁니다.
속에 겹겹이 입은 옷을 다 감싸 안듯이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사건과 일들과 상황 사람들을 주제넘게 쓸데없이 다 끌어안아서 생각하고 걱정하고 계획하고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오지랖이 넓은 건데, 이게 바로 원죄가 우리들에게 유전되었을 때 나타나는 저주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참 내용에 정확하게 대척점에 서있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넓은 오지랖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어디까지가 적당한 오지랖이고, 그 경계를 넘어서면서부터 저주에 해당되는 넓은 오지랖입니까?
새벽에 이 건물로 들어올 때마다 아주 저는 부담스러운 일이 하나 있어요.
이곳이 2층인데, 1층 남녀 화장실에 불이 켜있어서 문틈으로 불빛이 새나옵니다.
그걸 끄는 거예요, 어떨 때는 건물에 들어서기 전에 보면 복도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요.
2층까지는 제가 끄면서 올라가겠는데, 도대체 3층에 켜있을 때는 이걸 올라가서 꺼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이게 오지랖이에요.
그리고 층계에 아이들이 먹다 남은 것들이 혹시 발로 밟으면 미끄러질까봐, 그것 치우면서 올라오느라고 그 새벽에.
이렇게 보면 마더 테레사가 인도에 가서 빈민을 위해 봉사한 것도 오지랖 아닐까요?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간 것도 역시 오지랖 아닐까요?
오지랖의 경계가 어디까지일까요?
자, 그 경계를 알아봅니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다해’라는 게 항상 문제에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오지랖이 넓다는 것은 마음의 오지랖을 말하는 겁니다.
마음의 오지랖이 넓다고 얘기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의 오지랖의 경계는 어디까지냐?
인간의 처지, 인간의 주제를 파악해서 마음의 오지랖의 적당한 경계는 어디까지냐 하면 하나님을 딱 감싸 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만이 마음의 오지랖이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은 뒤에 하나님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어서 나타나는 일이 뭐냐 하면, 내 가족 걱정합니다, 내 자식, 아내 남편 걱정하고 부모 걱정하고, 내 몸 걱정하고 내 인생의 미래를 걱정하고, 사업 걱정하고, 걱정한다고 키를 한 자도 더 늘일 수도 없으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이게 다 오지랖인 것이에요.
자식을 걱정하는 것, 그게 오지랖입니다.
그리고 오지랖이 넓은 그런 상태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원죄를 지은 아담의 저주가 내려오면서 생긴 겁니다.
하나님처럼 됐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일을 원래가 하나님께서 다 관여하시고 이끄시고 주관하시는 것인데, 심지어 풀 한 포기 자라는 것, 새 한 마리가 태어났다가 죽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일인데, 그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들을 인간이 주제넘어서 처지를 넘어서 관여하기 시작한 것, 이게 오지랖이 넓은 상태, 이것이 바로 원죄의 결과요 저주라는 얘깁니다.
이게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 식충식물을 아십니까?
파리를 잡아먹는, 심지어 새도 잡아먹는다는 그런 식충식물은 땅에 앉아서 무엇인가 와서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촉수로 느끼자마자 확 덮쳐서 끌어안으면서 잡아먹어버립니다.
우리 마음이 원죄로 인한 저주의 유전자가 발동할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면 이런 것이에요.
눈앞에 보이는 가족, 상황, 사건, 사람들을 마음으로 확 끌어안아버립니다.
이게 바로 원죄로 인한 저주의 결과이고 넓은 오지랖이요, 넓은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넓은 문이란, 눈에 보이는 상황, 사람, 관계되건 안 되건 상관없어요.
전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상황, 어떤 사람, 무슨 대상이든지 내 마음이 그걸 끌어안아서 생각하기 시작하고 식충식물이 먹이를 끌어안듯이 판단하기 시작하고, 그 일에 대해 계획하고, 그리고 행동해 나가면서 사는 것, 이게 바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멸망의 길로 들어가는 거라는 거예요.
이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내 인생의 모든 일, 내 가족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하는 이게 오지랖이 넓은 것 아닙니까? 이게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거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좁은 문은 뭡니까?
이 지구 위에 좁은 문이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좁은 문을 만드셨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만드신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가 좁은 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힘쓰는 겁니까?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힘써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간단합니다.
내 마음의 촉수에 자식문제가 와 닿습니다, 그때 식충식물처럼 덥석 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무엇을 무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죽으심을 마음이 먹는 겁니다.
절대로 그걸 덥석 물면 안돼요, 넓은 오지랖을 발동시키면 안돼요.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이 하셔야 될 모든 일에 대해서 간섭하는 오지랖이 늘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 늘어난 오지랖을 가지고 자꾸 자식문제, 내 노후문제, 아니면 내 인생의 비전, 이런 이 지구 위에 있는 어떤 일도 내 마음이 물면 안돼요.
하늘에 있는 아버지만이 내 마음의 오지랖에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는 걸 기억해야 되는데, 이미 오지랖이 넓어졌고, 우린 넓은 오지랖을 병적으로 작동시킵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그 주님의 죽으심을 약 먹듯이 먹는 겁니다.
어떻게 먹습니까?
‘내가 죽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과 사건을 감싸 안으려고 오지랖이 작동하려고 하는 순간에 ‘내가 죽었다’라는 것을 내 마음에 일깨우는 겁니다, ‘주님이 죽을 때 내가 죽은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그 지점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로 길이 하나 나있는데, 그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께로 도달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원래 감싸 안아야 될 유일한 대상인 그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좁은 문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의 죽으심이라는 겁니다.
그 죽으심을 내 마음이 먹을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로 도달하고, 하나님만을 마음 안에 껴안을 수가 있다는 얘기에요.
이렇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가장 좁게,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를 만나도, 어떤 사건이 터져도, 내 마음은 그것들을 오지랖으로 감싸 안으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반응하지 않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날 때 오직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한분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께로만 돌아오는, 이 얼마나 좁아요?
또, 주님의 십자가로 돌아오지 않고 넓게 살려면 얼마나 넓습니까?
자식 보면 자식 덥석 물고, 남편 아내 보면 덥석 물고, 사업 보면 사업 덥석 물고, 독도 문제다 무슨 국가 문제 덥석 물고, 대선에 누가 어떻다 덥석 물고, 눈에 보이는 대로 동네 마트 걱정하고, 전부 덥석덥석 무니까 얼마나 넓게 살아갑니까?
이게 바로 망하는 것이고 저주에 걸린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리고 인간의 주제를 넘어서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갑니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그 마음의 자락, 오지랖으로 감싸 안을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내 밖에 계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나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되셔서 내 마음의 오지랖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된 이 지구 위의 모든 일을 다 감당해나가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을 다 하나님께 드렸고, 우리의 뜻을 다 하나님께 드렸고, 우리의 힘을 다 하나님을 감싸 안는 데에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십자가의 주님의 죽음을 내가 마음으로 끌어안는 겁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에 내 뜻이 없어요.
죽었는데 내 힘이 어디 있습니까?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렇게 좁은 문으로 십자가에 달리심과 연합하여 들어간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없으므로 내가 관계된 이 지구 위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고, 내 뜻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내 힘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좁은 문으로 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때에 나타나는 일이, 나와 관계되는 이 삶에서 가장 넓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게 되는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그 다음에 보면 선지자들을 죽이는 예루살렘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왜 선지자들을 죽입니까?
다른 게 아니에요, 오지랖 넓게 사는 것을 중단하라는 이야기 한 마디 하는 겁니다.
‘너희가 지금 마음으로 관계하는 이 지구 위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이니까, 너희는 그 오지랖이 늘어난 상태로 살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얘기에요.
이 얘기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왜 죽여요?
아하, 이게 참 재밌는 일이에요, 왜 죽이느냐 하면 하나님처럼 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집안 걱정하고, 집안의 경제를 걱정하고 있잖아요, 인간의 처지를 넘어서서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이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관여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고유한 일은 지구 위에 있는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고 계획하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담는 게 인간의 일이에요.
본연의 일이고 본연의 업무이며 사명입니다.
이 지구 위의 일은 원래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일이고.
아, 마귀가 이걸 바꿔놓은 거예요.
내 자식을 내가 키워야 되는 줄 아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끔찍한 저주의 상황이고 아주 부정적인 반전인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당연한 줄로 알고 있어요, 나라 걱정하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으로.
이게 지독하게 오지랖이 늘어난 아주 꼴불견의 상태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지막에, 이 지구의 현실, 우주의 현실, 시간과 공간의 현실이 다 없어져버리고 지옥과 천국만이 사실이고 현실인 상황이 올 것이다, 그때 천국을 보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못 들어온다.’
행악자라고 그래요, 행악자.
행악자가 누구냐 하면, 분명히 모든 행악자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했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얘기합니다.
그래도 행악자라고 그래요, 어떤 행악자입니까?
내 마음이 이 지구 위에서 늘어진 오지랖의 저주 상태를 그대로 발동시켜서 내 가정, 나라, 직장, 노후를 걱정하면서 내 마음에 늘어진 오지랖으로 이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감싸 안는 자들, 이게 행악자들입니다.
그 감싸 안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거예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이미 이 지구 위에서 내게 주어진 사람과 사건과 일들을 마음의 오지랖으로 감싸 안았어요.
감싸 안은 채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 이게 바로 행악자들이라는 겁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신기한 일입니다.
뭐가 신기할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서 반응하려고 할 때마다 죽은 자라고 고백하면서 그 촉수를 발동시키지 않고 세상일을 싸잡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었다는 그 사실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그때 점차적으로 내 마음이 성령에 의해서 하늘로 이끌려져 올라갑니다.
이럴 때, 참 이상해요,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평강과 기쁨이 생기는데, 그걸 여러분이 실지로 경험을 해봐야 돼요.
어떤가 하면, 돈이 마~아니 생겼는데 돈 때문에 새삼스럽게 기뻐지지 않는 나를 보고 신기해합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데 돈 없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신기해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나쁘다고 하는 것이 나쁘지도 않고, 이미 나는 충분히 좋고 있습니다.
이게 참 신기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것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 이 지구 위에서 나와 관계된 모든 일이 내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는데 다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내 뜻이 하나도 없는데 다 진행되고 있고, 적재적소에서 가장 합당하게 일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이걸 확인하는 게 너무 신기한 거예요.
좁은 문은 좁고 협착할 뿐입니다.
그러나 즐겁고 재밌고 행복하고 힘이 안 들어가는 길이 좁은 문 좁은 길이라는 겁니다.
왜 이 길을 안 들어갑니까?
전부 넓은 오지랖의 저주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늘어진 오지랖, 해파리냉채 할 때 축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초를 타서 꼬들꼬들하게 쭈그러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죄 때문에 저주 받아서 마음의 늘어진 오지랖이 세상 것을 물려고 할 때마다, 식초를 타듯이 주님의 죽으심을 마음으로 먹으세요.
그러면 쫙 오므라들면서 도저히 그걸 감싸 안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여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좁은 문의 삶이에요.
모든 사건에 대해서 주님의 죽음을 먹으세요!
좁은 문을 걸으시고 신기한 경험을 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늘어지는 해파리에 떨어지는 식초처럼, 늘어진 마음의 오지랖에 주님의 죽으심이 닿으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되게 하시고, 이 좁은 문을 들어가 좁을 길을 걸으면서 기어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해주셔서, 펼쳐지는 신기한 현상들을 보면서 감사 찬양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