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눈종이 위의 사내 외 4편
김은
25도쯤 기울어진 몸
y축 겨우 유지하며 걸어가는 남자
금방이라도 x선 위에 무너질 듯
지팡이 하나로 겨우 지탱하는
모눈종이 위의 삶이다
나는 y(=ax+b)라는 사내를 모른다
장애요소인 기울기 a와
잉여값 b처럼 따라붙은 지팡이로
절뚝절뚝 건너고 있는 시간
그의 절박한 몸놀림에서
브니엘을 떠나는 야곱의 환도뼈가 보인다
x와 y, 모눈종이 위의 사내는
시시각각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일까
하느님과 씨름했던 야곱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으려?
아니겠지, 보도블록 위 걸음사위는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현주소를
온몸으로 밀며 끌고 가는 듯하다
지구를 걷는 내 모습도
어느 별에서 보면 23,5도 기울고
과부하 걸린 속도는
산전수전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갈지자걸음으로 앞서가는
모눈종이 위의 사내 따라가며 빌어본다
y축, 기울어진 어깨가
꿈의 부력으로 밀어 올려지기를
시계는 진화 중
시계는 잡식성이다
물시계는 물 마시느라 모래시계는 모래 삼키느라 기계식 시계는 톱니 씹느라 전자시계는 건전지를 핥느라 시시각각 분절하여 밀고 끌면서 바쁘다
초침 분침 시침들
눈・코・귀도 없이 몸통뿐이지만 시계바늘의 노역으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 문명의 시발점이었던 저 둥근 수레바퀴를 잃는다면 카오스 속 시간의 밥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인디언들은 시계가 없었다 나무 풀 바람이 맨살에 닿는 느낌과 마음의 움직임으로 계절을 읽고 달력을 만들어 시간을 삼았다
1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4월,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12월, 무소유의 달
외부를 바라보면서 내면을 응시하는 인디언들의 서늘한 눈을 본다 쳇바퀴 돌고 있는 내 시간표도 시계의 틀을 벗어나고 싶다 인디언 달력을 갖고 싶다
7월, 사슴이 뿔을 갖는 달
옥수수 튀기는 달
나의 꽃시계는 진화중이다
물방울 집
이른 아침 물푸레나무 숲길 걷다가 이슬 맺힌 거미줄을 보았네 거미의 집에 매달린 물, 방울들
고 작고 투명한 방 가만히 들여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날 것들의 풍경이 들어앉았네
간밤 숲의 정령들이 일월성신 애간장 녹는 기도로 둥글게 방 꾸미고 세간을 들여놓았으리
저 완벽한 물의 둥지 팽팽한 탄력을 딛고 느리게 기어 나오는 왕거미 녀석이 내딛는 뻗정다리 한걸음에 물방울 집 후드득 허물어지네
달빛 별빛 모아 밤새 지어놓은 물의 집이지만 주인 허락 없는 무허가 신세라 한순간에 흔적도 없네
작은 물방울 속에 들어앉아 생각의 알 까놓아봤자 어차피 햇살 퍼지면 철거될 집인지라 물푸레나무는 그저 무관심, 제 이름처럼 푸르기만 하네
각 지고 상처 많은 날들이었지 생각의 씨줄 날줄로 허공에 엮었던 시, 내 꿈의 물방울에 갇혔던 언어를 생각해 보네
지을 새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 집처럼 내 습작기의 언어도 많이 피 흘리고 소리 없이 죽어 나갔지
격랑 지나가고 송알송알 맺혔던 물방울 집이 사라진 거미줄 저 빈 자리에 오늘은 나를 올려놓고 싶네
풀잎, 나뭇잎, 새벽길 나서는 노동의 어깨… 세상의 모든 이슬방울 위에 꽃 한 송이 바치고 싶은 내 아침고백입니다
시의 집에서 하룻밤
시집에는 날개가 있다
차명재산처럼 품은 비상飛上의 징표이듯
표지 뒤에 접혀 허공을 꿈꾸고 있다
겉보기 작고 초라한 시의 집이지만
문고리 슬며시 밀고 들어가면
세간 곳곳 비유와 상징으로 못 박힌
시의 궤가 묻혀있다
누구 손도 타지 않은 최초의 상자
뚝뚝 끊긴 행간 사이로
한겨울 봄꽃이 다발로 쏟아지고
천리 밖 번개가 치기도 한다
시의 집, 날개를 달기까지
시말로 쓰일 옥석을 고르고 닦으며
수없이 깨지고 뭉개졌을 시인의 심장
그 절망이 불화살로 날아온다
닿을 수 없는 과녁인 줄 알면서도
전심으로 쏘아올린 무위無爲의 춤과 함께한
시의 집에서 하룻밤
내가 겨우 수습한 정신의 뼈 속에
치사량에 가까운 고독과 슬픔 맛보고야
새벽 햇살의 탁발을 받는다
영혼의 태엽 감았다가 풀면서
붕새의 날개 구만 리 하늘을 다녀왔다
쥐똥나무 일기
이삿짐 정리하다가 만난
엄마의 일기장
코앞에 당겨야 겨우 읽히는 빛바랜 글씨가
내 눈을 가을열매처럼 붉게 만드네
엄마는 쥐똥나무였다
해마다 깍두기머리로 참수 당하면서도
생울타리로 서있던 나무
짝지와의 단단한 스크럼으로
우리 집 지켜내고
가느다란 팔다리로 초록 물 퍼 올려
꽃을 낳아 키웠네
여린 당신 몸 가누기보다
세상 바람막이로 서서
오종종한 식솔들 먹이고 키우다보면
어느새 가을 끝자락
새까맣게 탄 쥐똥 몇 알 훈장처럼 매달고
그마저 고맙다 고맙다며
눈물 삼켜 써내려간 쥐똥나무 일기
아픔 아닌 날이 없었네
시절도 저물어 석양빛 들면서
쥐똥나무 울타리보다
한 그루 꽃나무이기를 소망했던
당신, 손수 준비한 수의壽衣 어깨 위에
새의 날개를 수놓아두었다니!
엄마는 어느 꿈의 하늘로 날아갔을까
오래된 일기장을 빠져나오면서
내 몸 구석구석 더듬어
사리 알 같은 쥐똥열매를 찾아보는 저녁이네
신인문학상 당선 소감
먼 길 에돌아왔다. 20여년 타국에서 지내다보니 가슴이 시린 날이면 모국어가 그리웠다. 틈틈이 시를 읽고 짝사랑하면서 자연스레 시 창작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시의 꽃밭은 오랫동안 내게 가시만 보여줄 뿐 쉽게 꽃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다 건너의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일상으로 모국어를 쓰면서 첨예한 언어를 다루는 시우詩友들을 만나게 되었고, 설산암벽 곳곳을 뒤지며 시 사냥에 나섰다. 밤새워 살을 고르며 촉을 갈아서 시인의 꿈을 쏘아 올렸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곳에서 『애지』가 내 화살을 덥석 잡아주었다. 투고한 작품에 ‘애지신인문학상’이라는 꽃을 달아 화답해준 것이다.
시에게 끝없이 질문하며 간절하게 응답을 기다렸던 내 고독한 적소謫所에 시인의 이름을 달아주신 반경환 발행인님과 심사위원 모든 분들께 제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인사를 올립니다.
시인의 마을에 입주했다지만 그건 목표가 될 수 없다. 좋은 시, 반짝 빛났다 사라지는 휘발성의 시가 아니라 잘 익어 오래 향기가 남는 누룩 같은 시작품을 쓰고 싶다. 내 사랑, 나의 시가 만개하여 세상 어두운 구석을 맑은 슬픔으로 채울 때까지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그동안 늦깎이 시공부에 눈칫밥 한번 주지 않고 협조해준 나의 가족과 「초안산시발전소」에서 함께 공부하며 서로 격려해온 회원들과 이 큰 기쁨을 나누고 싶다.
모두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