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4)
숙종이 폐비의 뜻을 거두려하지 않자,
86명의 대신과
대간들이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노한 숙종은 이들 상소가 모반 대역보다
더 하다면서 국청을 설치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숙종은 이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부인을 위해
절의를 세우려한다며 고문을 가하였고,
박태보등이 모진 고문에도 의연히 대처하자 이들에게
압슬을 가하며 이해하기 힘든 정도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결국 박태보, 오두인이 대표로 고문을 받고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숙종의 이러한 행위는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숙종의 의도된 과잉 행위였습니다.
(“이래도 반대할래?”)
더 이상 반대가 없자 드디어 숙종은 1689년
(숙종 15년) 인현왕후를 폐서인하여 친정으로
쫒아내고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책봉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국모가 특별한 잘못도 없이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 폐서인되는
전대미문의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사가에 있는 희빈을
궁으로 불러들이라고 숙종에게 주청한,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인현왕후의
정치적 감각 부재 ??? 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곧이어 장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부는 영의정, 조부는 우의정,
증조부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원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장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오른 것입니다.
얻을 것을 모두 얻은 숙종은 이제
남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리라 마음먹고,
송시열의 처분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더 이상 왈가불가할 일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송시열의 죄상이 흉역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국문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고,
숙종은
“대신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사사하되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즉시 죽게 하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제주에 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어명에 의해
바다를 건너 상경하던 중 정읍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거목이
특별한 죄목없이 스러져 간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사람은
사림이 ‘송시열의 조선’이라 할 정도로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송시열은 죽어서도 서인,
특히 노론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인물평은 송시열과의 관계를
최우선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김 아무개는 평생을 송시열 뜻에 따른 사람으로서~”)
숙종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거목 송시열마저
한 방에 보내버리게 할 정도로 숙종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한 장희빈의 비기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자못 궁금하지만 전하는 문헌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정말로 궁금해요.. ..^^)
내일 또 이어서 계속됩니다 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