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절이 다가오면, 우리는 구유를 아름답게 꾸밉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구유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름답게 장식된 구유는 우리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춥고 초라했던 그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춥고 허름하고 냄새나는 구유를 상상해봅시다. 외양간 짚더미 속에서 첫 울음을 터뜨리신 예수님. 요셉과 마리아는 당시 현실이 얼마나 서글펐겠습니까?
요셉은 매서운 바람을 조금이나마 막아볼 요령으로 예수님을 소 여물통인 구유 속에 눕혔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를 외양간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구유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어떤 구유를 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우리는 세상을 정복했지만,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우리는 아름다운 구유는 준비했지만, 마음의 구유, 영혼의 구유는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떤 구유를 준비했나요? 습관과 타성에 빠져서, 교만이 가득 찬 구유, 미움과 이기심과 욕심이 가득 찬 구유를 준비하지는 않았는지요?
과연 나는 어떤 구유인가? 세상의 온갖 오물을 가득 담고 있는 구유인가, 아니면 사랑과 용서, 희망과 겸손이신 예수님을 담기에 합당한 구유인가? 빈 구유 속에 예수님이 오셨듯이,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 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것입니다. 미움과 분열, 시기 질투하던 마음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남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할 때, 우리 마음은 주님 모시기에 합당한 구유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성탄의 신비, 강생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신(神)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다.’
그렇습니다. 지존하신 하느님께서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내려오셨던 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 강생의 신비입니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인간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역사입니다. 이처럼 구세주 성탄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초라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품위를 지닌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이 세상은 구세주 하느님께서 친히 사셨던 세상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할 때 세상만사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구원의 축일이고 희망과 기쁨의 축일이며, 위로와 용서와 사랑의 축일입니다. 성탄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새로움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성탄 때에만 태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십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 안에 태어나지 못하십니다. 성탄이라고 아무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 희망과 겸손을 가진 자만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칠 자격이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심을 털어버린 마음, 절망과 좌절을 털어버린 마음, 교만과 위선을 털어 버린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성인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체)빵을 나누는 것은 불사불멸의 약을 나누는 것이다.”(안티오키아의 이냐티우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20,2.)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미사 중에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를 초대교회 신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불멸의 약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구세주 성탄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불사불멸의 약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불사불멸의 약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