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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목사
몇 개월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가정을 심방하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제 서고에 있는 지도를 아무리 찾아봐도 그 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뒤에 있는 Index에도 나오지 않고, 또 그 분이 살고 있다는 지역을 샅샅이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고자 하는 지역이 1~2년 전에 새롭게 형성된 동네이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옛날 지도에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약속 시간도 다 되었고 교회 버스에 지도가 한 장 있기 때문에 그 분이 살고 있다는 지역을 향해 일단 출발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어 교회 버스에 비치해 놓은 지도의 Index를 찾아보니,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Index에 언급된 곳을 찾았는데, 하필 제가 찾고자 하는 지도 그 부분이 접혀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예 떨어져 나가버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으로 그 가정에 연락하여 어렵게 그 가정을 방문 한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그 말을 들은 한 성도님이 주유소에서 3불 50센트짜리 지도 두 장을 사 주셔서, 하나는 교회버스 안에 놓아두고, 또 하나는 제 서고에 비치하게 되었는데, 이 일로 인해 제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도는 바뀐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은 변하지 않는데 비해, 가야 할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지도는 수시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운전해 가는 길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시로 바뀝니다. 새로운 동네가 들어서고,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전에 없던 신호등이 새롭게 세워지고, 전에 있던 Round About가 없어지고 신호등이 새롭게 세워집니다. 그 때 낡은 지도를 가지고서는 가고자하는 목적지를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새로운 지도를 소유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로운 지도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임목사님이 놓고 간 지도를 최근까지 고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심방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제 서고에 비치하고 있는 지도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지도인가하고 살펴보니까 지도 겉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Pathfinders, Christchurch City & Suburbs Map", 그리고 그 밑에 "1993년 New Edition, 25th anniversary"
1993년도에 발간될 당시에는 그 지도가 New Edition이었습니다. 그러나 11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옛 지도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침반이 삶의 원리와 같은 것이라면 지도는 삶의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나침반은 세상 어디에 갔다 놓아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항상 북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지도는 변합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도는 자꾸 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원리는 절대 변하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삶의 방법은 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이미 2,000년 전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시대에는 새 시대에 맞는 지도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삶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과 타협하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 원리는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삶의 방법은 새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5주 동안 ‘변화를 추구하라’, ‘변화를 향해 출발하라’, ‘자화상을 바꾸라’, ‘말을 바꾸라’, 그리고 지난주에는 ‘고정관념을 바꾸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변해야 할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로서 변화시리즈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는 종려주일이고 그 다음 주는 부활주일이기 때문에 당분간 변화 시리즈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변화시리즈 6번째로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합니다. 우리에게 변화되어야 할 것, 우리에게 바꾸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는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골프하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올바른 자세에서 굿 샷이 나온다고 합니다. 야구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좋은 자세에서 좋은 타구나 좋은 투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폼이나 자세가 흐트러지면 좋은 샷을 날릴 수도 없고, 좇은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세와 폼은 골프, 야구, 축구, 농구, 등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틀에 박힌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들은 삶의 자세를 어떻게 바꾸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라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투자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자기‘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살림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싼 돈을 들여 보약을 지어 먹기도 하고, 바쁜 시간에도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기도 하고, 추운 겨울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도 합니다. 또 자기와 관계되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을 위해서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돈을 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혹은 자기 가족에게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음식물을 물위에 던지라는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음식물은 식탁에 차려놓고 먹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물위에 던지면 훗날에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구제에 대한 말씀인가 보다‘라고 해석합니다. 물론 이 구절을 ’구제‘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정확한 해석은 ’구제‘에 대한 말씀보다, ‘투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5절에서는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6절에서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앞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누리고 있는 삶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재앙이 임할는지 어려움이 임할는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때 뿌린 만큼 거둬들인다는 것입니다.
서울 목동에 있는 지구촌교회의 조봉희목사님의 글에 감동적인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적이 있는 윈스턴 처칠의 일화입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절었던 처칠은 불편한 몸이지만, 수영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소년인 그가 동네 앞 저수지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다리가 마비되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젊은 청년이 물 속에 뛰어 들어가서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처칠의 부모는 젊은이의 희생적인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서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뜻으로 청년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장학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처칠 부모님의 도움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서 훌륭한 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윈스턴 처칠은 몇 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영국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칠은 얄타회담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회담 기간에 그만 심한 열병을 앓게 되면서 또 한번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한 생물학자는 자신이 발명한 페니실린 주사를 가지고 와서 윈스턴 처칠의 생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자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기묘하게도 어릴 적 처칠을 구해 준 청년이었고, 처칠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공부를 했던 그 유명한 페니실린의 발명자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인생은 끊임없이 심고 거둠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생명을 구출해준 데 작은 고마움의 표시로서 장학금을 주어서 대학 공부를 시켜 주었는데, 처칠이 다시 한번 생사의 아슬아슬한 기로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또 처칠의 생명을 구해 주었듯이, 인생에서는 심고 거두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거둬들이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면 우리가 섬긴 만큼 다시 거둬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잠언 11장 25절에 나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구제를 하고 남을 위해서 돈을 쓰면 쓸수록 내가 결코 풍족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계산법은 다릅니다. 성경적인 원리는 남을 위해서 돈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내가 더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면 섬길수록 나중에는 내가 윤택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사실 수년 동안 우리 교회는 비전센터 건축 문제로 재정이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년 동안 거액의 선교비를 들여 미션 2002, 미션 2003, 미션 2004를 다녀왔습니다. 또 주위에 있는 Woolston 초등학교에 많지는 않지만 두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도 보내주고, 뉴질랜드 AOG 총회에 선교헌금을 꼬박꼬박 보내어 선교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의 재정은 이미 바닥이 나야 합니다. 특별히 작년 3월31일자로 이웃에 있는 두 필지의 대지를 사면서 매주 지출되는 경상비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재정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로 새로운 회계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재정위원회를 만나보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 동안 선교팀 선교도 보내고,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도 하고, 장학금 주고, 1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전센터를 건축하는데 보탬이 되는 10여만 불이 모아졌습니다. 물론 이 금액으로는 비전센터를 건축하는데 턱없이 부족합니다만,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남을 위해서 돈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내가 더 풍성해지고 더 윤택하여 지는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남을 섬기면 섬길수록 나중에는 내가 풍성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나만을 위해, 우리 가정만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녀, 나의 부모님, 나의 가정, 나의 친구들을 섬길 뿐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와 전혀 관계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삶의 첫 번째 자세입니다.
2)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둘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해주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4절의 내용입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농부가 ‘풍세’ 즉 날씨를 보고, 구름을 보고 주저하면 아무 것도 거둬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형편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리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농부는 아무 것도 거둬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계산하며 주저하고 있다면, 나중에는 아무 것도 거둬들일 것이 없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월이기 때문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언뜻 이 말씀을 보면 젊었을 때 마음껏 즐기며 방탕하며 살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다 포기하고 절망하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절대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긍정주의와 낙관주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며 대충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9절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짧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시편 90편 1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휙’하고 지나가는 화살과 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미국의 애덤스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와 노년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언덕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나무 둥지에 몸을 지댄 채 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청년들이 그를 알아보고 “각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 애덤스 대통령이 청년들에게 들려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들, 내가 안녕치 못하네. 내 장막집이 무너지려고 해서 이사 갈 준비를 한다네.” “아니 각하, 각하의 장막집이 무너져 이사를 가다니요?”
청년들은 애덤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네들이 보다시피 내 집은 낡아서 지붕이 다 벗겨져 버렸고, 창은 낡아서 다 찢어지고, 기둥은 흔들거려 언덕을 오를 수 없고, 들보는 굽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라네.”
그는 당황해 하는 젊은이들에게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보게. 내 지붕을 보게나. 머리카락이 몇 개나 남았나. 내 눈이 창문인데 앞이 보이지 않아. 안녕을 써도 이제는 더듬거리며 좁은 길을 가야 한다네. 내 인생의 기둥은 두 다리일 텐데. 이것이 흔들거려 내가 길을 걸을 수가 없어. 들보는 내 허리인데 쇠하여 구부러졌어.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저 세상으로 이사 가야 할 것 아닌가?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네.”
우리는 생명의 날들을 헤아려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두 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삶의 형편에 있든지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를 만나 성공철학에 관한 것만을 평생 연구하며 저술과 강연으로 정신 계몽가의 삶을 산 나폴레옹 힐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오리보다 십리를 걸어라>는 말은 성공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 사람들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첫째 주어진 의무보다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고,
둘째 주어진 의무만큼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셋째 주어진 의무보다 더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주어진 의무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어진 의무만큼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어진 의무보다 항상 더 많이 일하는 사람입니까?
미국의 강철왕으로 이름을 떨쳤던 앤드류 카네기는 회사 직원을 승진시킬 때 자신이 세운 독특한 기준을 따랐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사람을 승진시키거나 보상을 해 줄 때 지켰던 몇 가지 법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리보다 십리를 걷는 자’를 승진시키고 많은 보상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법칙을 “플러스 알파법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카네기는 직원들이 먼저 출근하기 전에 먼저 회사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자기보다 항상 먼저 와 있고, 모든 직원이 퇴근한 후에도 항상 일터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카네기는 그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너스를 줄 때, 그에게 100만 불이라는 거액을 보너스로 주었습니다. 모두 놀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카네기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월급은 회사와 맺은 약속의 시간만큼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이며, 100만 불은 주어진 의무보다 더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오리보다 십리를 걸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찰스 슈와브라는 사람입니다. 후에는 찰스 슈와브는 노무자에서 일약 미국 최고의 철강회사인 유나이트 스틸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일용잡부였지만, ‘오리보다 십리를 걷는 테도’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바뀌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찰스 슈와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삶의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천한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경쟁업체가 주위에 생긴다 할지라도,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다 할지라도,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마태복음 5장 41절 말씀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우리가 찰스 슈와브처럼 ‘오리보다 십리를 걷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복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처한 형편을 앉아서 비관만하지 말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 사는 이생이 아닌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일생을 최선을 다함으로 복되게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삶의 두 번째 자세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라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요즈음 약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약 중의 하나가 신경안정제 계통의 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오늘 본문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근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염려와 근심은 사람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드는 적입니다.
그래서 폴 투르니에는 “아무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자신을 죽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질병보다 무서운 것이 사실은 질병에 대한 염려입니다. 염려가 많으면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염려와 근심을 많이 하는 사람의 특징은 한가하다는 것입니다. 바쁘게, 열심히 사는 사람은 사실 걱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남으니까 이것저것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문제를 찾기 시작합니다. 저녁에 자리에 눕자마자 걱정거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지나간 세월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고, 아직까지 오지 않은 내일을 생각하며 염려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 말 듣지 말 껄. 그곳에 투자하지 않았어야 했어. 그 때 결혼 잘 못했어.”라고 후회를 해도 과거가 취소됩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아무리 고민하고 걱정해도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내일을 미리 생각하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가올 내일을 우리 힘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내일을 준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준비한대로 내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 일을 오늘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근심과 이별을 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자, 근심하지 말자’라고 외치면 마음에 근심이 없어집니까? 그렇게 했을 때 만약 근심이 없어지면 이 세상에 근심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경안정제 만드는 회사 다 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 ‘근심하지 말자, 근심하지 말자’라고 외친다고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근심은 사라집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구소련의 망명 작가 솔제니친(Aleksander Solzhenitsyn)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 12시간씩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가족과도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믿음으로 살며 정부를 향해 독설과도 같은 비난도 당당하게 퍼붓던 그였지만, 어느덧 점점 절망과 좌절이 그의 마음 가운데 들었습니다. 이제는 수용소를 나갈 소망도 없어지고 병 고침을 받을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감시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매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는 중노동을 하다가 때리려면 때리라는 식으로 일하던 삽자루를 내던져 버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옆에서 다가서는 것을 느껴 고개를 들어 보았지만, 처음 보는 노인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지팡이 대신 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막대기로 솔제니친 앞에 있는 모래 위에 십자가를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솔제니친은 모래 위에 그려진 십자가를 보는 순간, 세상의 어떤 능력보다도 강한 능력이 그의 영혼에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다. 그렇다. 십자가는 사랑이 있다. 그렇다. 십자가는 기적을 일으킨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잃었던 용기가 다시 생겼습니다. 그는 내동댕이쳤던 삽을 다시 들었습니다. 비록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무서운 수용소에 갇혀 있었지만, 그는 다시 열심히 살았습니다. 결국 그로부터 1년 후에 그는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고, 후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암병도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전도서 12장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이 들기 전에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억하라'는 말을 두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우리 말 개역 성경에서는 빠져 있지만,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 다음 절인 7절에서 한 번 더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억하라‘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품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어디에서도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없는 환경을 찾을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근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비결은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삶을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염려를 많이 한 제자가 누구인 줄로 아십니까? 예상외로 베드로입니다. 겉으로는 용기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는 염려와 걱정을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걱정했습니다. “중간에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세금을 안 내면 어떻게 하나?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하지?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 그런데 그의 말년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베드로전서 마지막 장인 5장 7절을 보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는 스스로 ‘나를 권고하시는 하나님,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 나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기억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고백이 바뀌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근심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날마다 나를, 우리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호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삶의 세 번째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직장사역 전문가인 박호근목사님이 최근 ‘탁월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한 영성 훈련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그 분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색적인 주문을 했습니다. <굳바이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언뜻 굿바이 정신은 일단 지나간 것을 보냄으로써 새롭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분은 색다른 의미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Good-bye’의 어원은 놀랍게도 ‘God be to you’, 한국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한다.”는 말로부터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헤어질 때, ‘Good-bye’라고 인사하는 것은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고 있습니다.”라는 격려와 용기의 말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Good-bye 정신’, 다시 말해서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이 ‘Good-bye’, 즉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믿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한다.”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어떠한 핍박 속에도 고민하지 않고,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능히 인내하며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과 항상 동행한다는 ‘Good-bye’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