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통신 42> 이재수의 난
문 창 재
^근래에 복원된 제주 대정현성 성벽 바깥녹지대에 ‘濟州大靜三義士碑’가 서있다. 근래에 관광객 발길이 크게 늘어난 추사 적거지(謫居地) 앞인데다가, 교통표지판 관광지안내판 대정고을표지석 등에 시선이 빼앗겨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현무암 기단에 세운 오석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삼의사비라 하면서 누구누구 세 사람을 기리는 것인지, 아무리 살펴도 알 수 없다.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를 비석이어서 궁금증을 더한다.
^추사 김정희 적거지를 찾아갈 때 처음 본 그 비석의 주인공이 이재수(李在守)임을 안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 사실을 알고 한참을 공부한 끝에 ‘이재수의 난’ 실상을 알았다. 20세기 벽두의 제주를 함성과 피로 물들였던 민란의 존재를 몰랐으니, 제주역사에 무지·무심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수의 난은 관의 착취를 견디다 못 한 민중이 들고 일어난 난리였다는 점에서는 여느 민란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민중이 피 흘려 싸운 상대가 천주교도들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건이었다. 외래종교 탄압의 대명사였던 천주교와 배고픈 민중의 충돌이었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건이 ‘이재수의 난(亂)’ ‘제주민란’ ‘신축교난(辛丑敎難)’ ‘제주교란’ 등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는 점도 그렇다. 민중사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민란이고, 300여명 희생자의 대다수가 천주교도였다는 점에서 보면 틀림없는 교난(敎難)이었다.
^그들을 살해한 주체가 민중이라는 사실은 사건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 짓기 어렵게 한다. 가해자가 민중이었고, 그들의 지도자들도 관헌에 잡혀 처형된 사실로 보면 핍박받던 민중 쌍방이 피해자여서 성격규정이 어려운 것이다. 민중이 들고 일어난 까닭은 관의 탐학이었는데 난(亂)으로 규정된 것은 관 주도의 역사기술 탓이리라. 그들은 체제부정이나 전복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는 성난 무리였을 뿐이다.
^어느 민란이나 마찬가지로 이 사건의 밑바닥에도 관의 탐학과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있었다. 그것도 이중의 수탈이었다. 목민관들이 짜고 남은 것을 더 막강한 봉세관(捧稅官)이라는 권력자가 내려와 또 짜는 형국이었다. 민중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리라.
^그 배경에는 조선조 말기의 광무(光武)개혁이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의 간섭을 배제하겠다고 독립 대한제국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재원이 없어 고심하던 개혁정부는 각 지방에 징세관(봉세관)을 보내 세금징수를 독촉하였다. 제주에서는 관아의 독쇄관(督刷官) 직에 있던 강봉헌(姜鳳憲)이 봉세관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성정이 사나운 사람이었다.
^징세활동에 손발이 필요했던 그는 천주교도를 앞세워 가렴주구를 시작했다. 때마침 천주교에 무뢰배 불량배 신자들이 많아 그들을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폐지되었던 민포(民布)를 징수하고, 재산세 이외에 감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같은 과수와 가축, 심지어 계란에까지 세금을 매겼다.
^목민관의 가렴주구로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 원성이 높은 데에 터진 ‘세금폭탄’이었다. 189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상규(李庠珪)는 착임하자마자 이방을 잡아가두고 매질을 하였다. 뜻을 알아차린 이방은 속전을 바치고 풀려났다. 모두 이 꼴을 당한 관속들은 백성을 괴롭혀 속전을 벌충하였다. 1년 후에 체직된 이상규가 제주를 떠날 때 수만 냥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봉세관 강봉헌이 천주교 무뢰배들을 앞장세운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프랑스 신부와 선교사들을 가혹히 다루다가 함포외교에 투항한 조정은 1896년 한불수호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프랑스 신부들은 치외법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서명이 있는 ‘여아대(如我待)’ 신표를 지니고 있어 권세가 하늘같았다. 여아대란 글자 그대로, 나(임금)를 대하듯 하라는 뜻이다.
^권세가 있는 곳에 빌붙는 세력이 따르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신자가 없어 곤혹스러웠던 제주도 신부와 선교사들은 부나비처럼 몰려드는 무뢰배들을 받아들였다. 하늘같은 프랑스 신부의 비호 아래 봉세관의 수하인 지위를 가진 그들이 민중에게 어떻게 군림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임자 있는 솔밭은 물론, 무주공산의 상수리 숲, 마을 안 동구나무, 마을 밖의 교인들이 벌목하고 남은 신당의 당 나무에도 세를 매겨 마을공동으로 부담시켰다······마소뿐만 아니라 개돼지 닭에도 호세가 나왔다. 죽은 병아리에나 세가 없을까. 계란에도 새가 붙었으니 계란이 열 개면 다섯은 내놓아야 했다.”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 나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었다. 탐관오리에 천주교도들까지 나서 고혈을 짜냈으니 민중의 고통이 어떠하였을까!
^일은 대정에서 터졌다. 1901년 2월 대정읍 유지 오신락의 죽음이 도화선이었다. 주민들은 천주교도들에게 맞아죽었다 했고, 천주교 측은 자살이라 우겼다. 이 문제로 양측 간에 충돌이 생겨 피해를 당한 대정읍민들이 크게 격앙되었다. 큰 흉년이 들었던 그해 인심은 날카로웠다.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 상인 등이 천주교의 횡포에 대항해 설립한 단체 상무사(商務社)가 중심이 되어 봉세관과 천주교의 작폐를 시정토록 제주목사에게 호소하기로 결의하였다.
^5월12일 대정 주민들이 제주로 가던 중 한림 명월진성에 묵게 되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 프랑스인 신부의 지휘를 받은 천주교도 수백 명이 성안을 습격했다. 대정 좌수로서 장두역할을 하던 오대현(吳大鉉) 등 6명이 납치되었다. 군중은 삽시간에 흩어졌다. 천주교도들은 내친걸음에 대정으로 쳐들어가 읍 무기고를 부수고 성난 민중에게 총질을 하여 1명이 죽고 두세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때부터 이재수가 나섰다. 관노 출신의 25세 열혈청년 이재수는 이웃고을마다 통문을 돌려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서군장두는 이재수, 동군장두는 강우백(姜遇伯)이었다. 기세를 올리며 제주에 도착한 민병대는 5월 17일 제주 남문 밖, 지금의 제주시청 앞에 집결하였다. 천주교도들은 이들의 기세를 꺾겠다고 야음에 습격을 가해, 10여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부터는 양측 간에 ‘전투상황’이 벌어졌다. 민병대는 포수들을 앞세워 제주성을 공격하였고, 신부들의 지원을 받은 천주교도들은 성 위에 대포까지 설치하고 대응하였다. 피차 전투경험이 없는 양군 사이에 10여 일 동안 공성과 수성전이 계속된 끝에 5월 28일 성문이 열리고 민병대의 승리로 싸움이 끝났다.
^성문을 연 것은 민병대가 아니라 성내에 사는 부녀자들이었다. 제주발전연구원이 펴낸 <제주통사>에는 그 상황이 이렇게 적혀있다.
^“퇴기 만성춘(滿城春)과 기생 만성원(滿城元)이 성내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며 부녀들을 동원하여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남자들도 호응하여 성에 설치된 대포를 철거하여 성 밖으로 대던지며 함성을 지르니 천주교도들이 놀라 달아났다.”
^비극의 절정은 이때부터였다. 성안에 숨어있던 천주교도 색출이 시작되었다. 붙잡혀 관덕정 광장으로 끌려온 사람이 170여명, 이재수는 그 가운데 간부급들을 직접 목 베어 장대 위에 내걸었다. 조사도 확인절차도 없는 살육이 이어졌다. 외국인 신부까지 죽이려하자 채구석 등이 극력 저지하였다. “외국인을 해치면 제주3읍이 망하는 날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는 외국 신부를 해칠 수 없다.” 이 말에 이재수는 칼을 거두었다. 뒷날 조사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모두 317명, 이 가운데 309명이 천주교도였다.
^그 다음은 이재수 일행의 차례였다. 6월 1일 이재호(李在頀) 신임 제주목사가 프랑스 함정을 타고 부임하였다. 두 함정에는 프랑스 병사 50여명이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성안을 장악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강화도 병사 100명이 뒤따라 상륙하자 민병대는 세가 꺾였다. 이재수 일행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의사는 그해 10월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재수는 최후진술을 통해 역적패당을 징치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 번 교회에 들어가면 관에서도 다스릴 수 없고, 남의 재물을 빼앗고 소송에 관여해도 누구도 어쩔 수 없고, 삼군의 민인들이 세폐를 견디지 못 하여 일제히 모여 호소한 것이 어찌 교인들에게 관계되겠는가. 우리들이 죽인 것은 역적이지 양민이 아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프랑스 측은 천주교회당 파괴와 신부의 집물손해 보상으로 5천원이 넘는 돈을 요구하였다. 그 금액은 고스란히 제주3읍 주민들 몫으로 돌아왔다. 1901년 7월 2일 3읍 수령과 신부들 사이에 화의협정이 맺어져 제주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제주사람에게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었다. 양쪽 다 피해의 상처가 너무 컸다. 프랑스만 이겼다. 독립 대한제국의 민낯이 이러하였다.
^후세에 3의사 비를 건립하는 일에서도 양측은 또 반목하였다. 천주교 측의 반대로 비석을 세우지 못 하다가 1961년에야 겨우 합의가 되었다. 그러나 비문 내용을 둘러싸고 또 대립하였다. 뒷면에 새긴 비문 첫 문장의 천주교 비판이 문제였다. 대화와 타협 끝에 비석은 섰지만 도로확장에 저촉되어 인근 드랫물(공동우물)로 옮겨졌다가 1997년 새 비석이 섰다.
^뒷면에 새겨진 비문 첫 문장은 이렇다.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3의사를 기리는 비석에 종교비판을 앞세운 것은 아직도 시비의 대상이다.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라는 문구가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문제제기도 그렇다.
^한림 명월진성과 삼의사비를 둘러본 날 한림성당에서 미사를 보면서 만감에 사로잡혔다. 세폐시정을 호소하며 평화적으로 이동하는 민중을 꼭 습격해야만 했을까, 붙잡힌 천주교도들을 조사도 없이 도륙한다고 쌓인 원이 풀렸을까, 야차 같은 관속들보다 하수인들을 왜 그리 증오하였을까, 핍박받은 사람들끼리라는 동류의식은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삼의사비라면서 왜 세 사람 이름을 내걸지 못 하였을까 하는 의문은 풀릴 듯 말 듯 하였다.
(2018,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