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간이한 신학 / 요한일서 4:7-8
신학을 넓게 보면 그 관련 책이 매우 많겠지만, 좁게 보면 사실 매우 적습니다. 신학은 보통 4-5년 동안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하루나 이틀만에 신학의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근처에서 단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깊은 신학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신학은 단순히 교실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며,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배우기도 합니다. 또한 오랫동안 공부해도 신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신학의 근본이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정수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온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결국 사랑 없이는 신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그 사랑을 믿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진정한 믿음인 사람이라 부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듯이, 그리스도인은 곧 사랑의 실천자입니다. 교인을 평가할 때 "잘 믿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고, "잘 믿지 못한다"는 말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 즉 미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미신입니다. 교회 내에는 이런 미신이 너무나 많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싸우며 단상에 올라 믿으라고 외치지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교역자뿐만 아니라 교역자를 깎아내리고 단상에서 끌어내리며 서로 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울의 교회는 완전히 미신의 집합소입니다. 서로 당파를 나누어 대립하고 약한 자를 넘어뜨리는 이것이 과연 신학을 배운 자들의 모습일까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 바울처럼 회개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영적 부흥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감리교회 내에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사든 감리사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가서 사랑을 배울까요. 교회는 신령한 양식 주는 곳인데 이 양식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빼빼 마른 규칙이나 내세우고 저희끼리 합하여 가지고 초빈작수하여 마음에 맞지 않는 교역자는 곧 쫓아내려 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서 놓지 않음으로 할 수 없이 파송합니다. 그 교역자는 지방에 무슨 청이 있어도 듣지 않고 내리 누르기만 하니 참 한심한 일입이다. 이 사람들은 신학을 모르는 미신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이 심히 부족하면서도,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둘째로 형제자매들이 저를 사랑하여 교회에 머물게 해주셨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든 여러분이 원치 않는다면 주저 없이 떠나겠습니다. 교회 형편이 어려워 사랑 많으신 목사님을 모시려면 상당한 봉급을 드려야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