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유생들의 절행(節行)
이때에 왕이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니 일반 유생들도 절의를 숭상하고 사도를 배척하여 유교가 대행하였다. 장령(掌令)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에 가서 향시(鄕試)를 설하여 악질구치(惡疾救治)의 방을 물으니 영유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책하여 가로되 불(佛)에 공(供)하면 구원한다 하는지라. 이승건이 돌아와 이 말씀을 아뢰니 왕이 가로대 신하가 나라에 대하여 요순(堯舜)의 도(道)를 베풀지 않고 부도(浮屠)의 법을 말하니 이는 짐으로 하여금 당종(唐宗)의 맹신(盲信)을 번보게 함이라 명하여 계동을 극변에 유배하다.
때에 왕대비 불상을 만들어 정업원(淨業院)(단종 번 있는 곳)에 보내니 관학 유생들이 이것을 불태워 버린지라. 대비 노하여 유생들을 치죄하기를 청한대 왕이 가로되 유생들이 불을 배척함은 가히 상줄 일이거늘 어찌 죄하오리가. 대비도 억지로 못하더라. 때에 왕세자 유희를 좋아하고 학문을 힘쓰지 않으니 필선(弼善) 허침(許琛)과 보덕(輔德) 조자서(趙子瑞) 등이 마음을 다하여 진강(進講)하나 세자 듣지 아니 하거늘 조자서 책을 세자 앞에 던져 가로되 저하 학문을 힘쓰지 아니하오니 신이 대조(大朝)에 아뢰리이다 하니 세자 심히 괴로워하대 허침은 그렇지 않고 순한 말로 종용히 베푸니 세자 심히 기뻐하더니 며칠 후 세자 벽에 글을 써 가로되 조자서는 소인(小人)이요 허침은 성인(聖人)이라 하니 시인이 자서를 위하여 근심하더라.
하루는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잔치할 새 우찬정 손순효(孫舜孝) 청하되 종용히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왕이 어탑 앞으로 올라오게 하니 손순효 어탑을 만지며 아뢰되 이 자리가 가석(可惜)하리이다. 이것은 왕세자의 책임을 감당치 못한다 함이라. 왕이 가로대 나도 안다고 답하시다. 그 외에도 김종직의 문인(門人)들은 그 시대에 다 도덕문장이 구비한 선배이다. 그들의 학풍(學風)은 송나라 정주(程朱)를 숭봉하매 그들의 덕행이 조정과 사회의 사표가 되어 성종 때 찬연한 문화가 다 그들의 손으로 만들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부는 김숙자(金叔滋)니 김숙자는 고려 말 높은 학자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길재의 호는 야은(冶隱)니 선산군(善山郡) 금오산(金烏山) 하에 살며 그의 학통을 전한 자들이 성종 때 와서 다 쟁쟁한 명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