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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하나님 [영] 외에는. 고린도전서 2장 6-16절 / 석기현목사 금세기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아인슈타인 박사는 소위 ‘상대성 원리’라는 이론으로써 현대 물리학에 금자탑을 쌓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성 원리’라는 것은 범인이 이해하기에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짓궂은 기자들이 아인슈타인 박사의 아내에게 “부인께서는 남편의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고 계십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녀는 대답하기를 “남편이 제게 그것을 이해시켜 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이론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상대성 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열 명 정도밖에 없다.’ 라든지, 혹은 ‘아인슈타인 본인조차 자신의 상대성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성 원리가 잘못된 학설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일반인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상대성 원리’는 그런 고차원적 물리학의 문제를 다루는 고차원의 학계에서는 분명히 이해될 뿐 아니라 또한 깨끗이 증명되는, 그래서 모든 학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참으로 놀라운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앙 세계에 있어서도 그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남을 증언해 줍니다. 즉 신앙 세계에도 어떤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려야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진리가 있으며, 반면에 그 고차원의 진리를 명백하게 깨닫고 그 오묘함에 감탄할 줄 아는 차원 높은 수준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고차원의 진리를 가리켜 ‘영적인 일’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줄 아는 자들을 가리켜 ‘신령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그 ‘영적인 일’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신령한 자’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1. ‘영적인 일’은 세상 지혜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구원의 신비(神秘)입니다. ➤6절부터 9절에 “6. 그러나 우리가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 지혜를 말하거니와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아무 쓸모없게 될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라. 7.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온전한 자”란 ‘개인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앞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이는 곧 그리스도 십자가를 영접함으로써 한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영적 수준에 완전히 이른 자를 가리킵니다. 그처럼 온전한 신앙인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어떤 고차원의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지금 사도 바울이 논하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온전한 자’들과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여기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통치자’ 즉 권력자는 세상일에 대하여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자타공인하면서, 그 판단력을 가지고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복지를 책임지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박식하고 유력한 사람도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나 빌라도 총독이 “영광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였습니다. 이 ‘영광의 주’란 ‘그 본질 자체가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는 했지만 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천상에 두고 계신, 영광스러운 존재이십니다. 하지만 오직 세상일에만 밝았던 ‘세상의 통치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대면했으면서도 그 성자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지니고 계셨던 하늘의 영광을 “한 사람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사야 64장4절을 인용하여 본문 9절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저 “사람의 마음”만 동원하여 “생각”하는 자들은 그런 신령한 세계의 일들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지혜’를 또한 “감추어졌던 것”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은밀한 가운데 있는” ‘신비’를 뜻합니다. 이 ‘감추어졌다’는 말에는 ‘숨겨져 있다’는 의미와 ‘드러나게 되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인 까닭에 ‘감추어졌던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밝히 계시해 주시는 것인 까닭에 ‘드러나게 된 은밀한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복음을 그처럼 비밀스러운 지혜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그것은 7절이 말씀하는 대로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으로서, 9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의 영광’이나 ‘예비하신 모든 것’이란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위하여 천국에 준비되어 있는 영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직 만세 전에 정해 놓으신 택한 자에게 깨달을 수 있도록 ‘감추어 두신 것’이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만 그 혜택을 내세에 누릴 수 있도록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는 불신자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판단력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神?) 즉 ‘신적 비밀’이 된 것입니다. 비밀문서란 아군은 읽고 해독(解讀)할 수 있지만 적군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그 문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아군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생하게 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줄 아는 신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적인 이점(利點)입니다. 그런 까닭에 택함 받지 못한 자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구원받지 못할 불신자까지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참된 기독교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불신자들이 ‘천당을 믿을 수 없고 지옥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복음 자체를 ‘세상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뉴스위크’지에 천당 문제에 관한 특집이 실렸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부터 ‘지옥’은 기독교 신학과 목사의 설교 강단에서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로버트슐러 목사 같은 사람은, 자기가 40년 동안 강단 사역을 하는 동안 지옥에 관한 설교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공언했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의 신앙’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최고 친구(best buddy)’ 정도로만 여기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일반적 추세입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괜히 지옥이란 소리를 꺼내어서 부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지옥에 대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최대한 부드럽게 표현하려 합니다. 대표적으로 빌리 그래햄 목사나 천주교 교황은, 지옥을 ‘영육이 함께 영원히 고통 받는 장소’로 정의하는 대신에, 소위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상태’ 즉 ‘천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는 자들의 집합체’ 정도로만 말하고 있습니다. 천당 역시 ‘영광스러운 도성’의 개념은 간 곳 없고 그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바라고 있는 이상향’(heaven is whatever you dream it is)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설명합니다. 결국 기독교 복음을 불신자들도 아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들로 치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군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비밀문서라면 이미 아군에게도 아무 유리한 이점(advantage)이 없어지고 말 것 아니겠습니까? 천당 구원과 지옥 영벌이 불신자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된다면, 그런 복음이란 그것을 믿는다는 사람 쪽에도 이미 그 어떤 혜택이나 특권을 제공해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과 구원 역사를 그처럼 불신자들도 다 공감할 수 있도록 결코 써 놓지 않으셨습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자에게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도록, 천당과 지옥이란 것이 전혀 납득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내용을 일부러 그렇게 ‘은밀한 것’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나 신실한 목사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완전히 바꾼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조금 수정하는 것조차도 절대 불가할 뿐인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이처럼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결코 알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는 ‘구원의 신비’임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령한 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구속사를 깨닫는 성도입니다. ➤10절-16절에 “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살피시느니라. 11.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어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이것” 즉 ‘구원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볼 수 있도록 드러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오직 성령님만이 그 감추어져 있던 복음의 비밀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매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시는 정도가 무한대인 까닭에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실 정도입니다. 여기 “깊은 것”이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가 작동하고 있는 세계는 한없이 심오한 까닭에 사람으로서는 결코 측정할 길이 없지만, 오직 전지하신 성령만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곧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 이시기 때문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그 ‘한길사람 속’이라는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본인입니다. 세상의 고명한 박사들의 사고 작용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심오한 논리나 법칙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지만 본인만큼은 명백히 깨닫고 있는 지식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이 가장 잘 알듯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만 유일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게 되는 자는 자연히 ‘영적인 일’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데, 바로 12절부터 14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영”이란 ‘죄에 오염되고 마귀에게 미혹된 영’을 가리킵니다. 컴퓨터에 소위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오염된 프로그램이 들어가면 그 전체의 기능을 망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심령에도 사탄이 만들어낸 바이러스가 들어가게 되면 그 영적 기능이 마비되고 맙니다. 원래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죄로 가득한 마음인데 거기에다 영적 감염까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그런 ‘세상의 영’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버전의 프로그램이 입력된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지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심령의 ‘중앙처리장치’(central processing unit)를 아주 최고급 사양으로 완전히 갈아 치운 상태처럼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심령을 그처럼 ‘성령의 시스템’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가리켜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저 주신 구원의 선물들, 즉 십자가의 대속과 죄 사함, 부활과 천국의 영생, 이런 것들이 그 심령의 모니터에 선명하게 뜨고 깨달아지고 믿어지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오직 성령 시스템을 자신의 심령 속에 새로이 다운로드(download) 받게 된 기독신자만이, 앞서 말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영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처럼 성령 감동을 받은 상태가 되면 전도 역시 그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알게 해 주신 것만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어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라고 간증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기독교 전도가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전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입력시켜 주신 데이터(data)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는 말은 ‘영적 진리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만 전달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도는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 즉 무슨 철학적 용어와 학문적 논리로 잘 치장되어야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친히 역사하셔야만, 전도자도 영적 진리를 아주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전파할 수 있으며 또한 듣는 쪽에서도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영’이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저 “어리석게 보이게” 됩니다. 컴퓨터가 아주 오래 된 ‘CPU’가 장착된 구형일 때에는 최신형 버전의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문서를 아예 읽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 차례 클릭하면서 열어보려 해도, 화면에 ‘이것은 실행시킬 수 없는 프로그램입니다.’ 라는 문구만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님이 임함을 받지 못한 심령이 바로 그와 똑같이 됩니다. 아무리 그 마음에 복음을 입력시키려 해 보아도 끝까지 “하나님의 성령님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고” 거부합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도저히 내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은 성령이 가르치시는 복음 진리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 역사가 컴퓨터 모니터 상의 ‘깨어진 글씨체’처럼 오로지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즉 천당을 소망하고 사는 일이 그저 바보짓으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함을 받지 못한 심령은 또한 ‘이것은 읽을 수 없는 문서입니다.’라고 화면에 자막 상자를 띄우는, 즉 “알 수도 없는” 심령이 됩니다. 마치 음치가 음악을 감상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도저히 그 복음의 은혜를 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드웨어가 아직 “육에 속한” 구형 ‘CPU’ 즉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 ‘완전부패’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처럼 육에 속한 사람의 악한 본성에 깔려 있는 소프트웨어마저도 순전히 “세상의 영” 즉 마귀가 퍼뜨린 바이러스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머리가 발달됨으로써 영적인 일을 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오직 그 심령의 메인보드 자체가 근본적으로 성령 시스템으로 완전히 새롭게 교체되어야만 최상의 영적 지각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신령한 자만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3.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신령한 자” 이어지는 15절의 ➤“15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은, 일단 신자가 되고 나면 불신자로부터 판단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가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의심하고, 신자를 우습게보아도, 그런 판단이란 마치 일자무식한 사람이 대학 교수의 논문을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은 우리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잔소리요 진짜 무식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반대로, 일단 성령님이 임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신령한 자”가 세상만사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까 보았듯이 바로 성령님이 ‘모든 것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전에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던 습성이 확 바뀌고, 이제 가정, 직장, 사회, 문화, 세계 역사를 보면서 이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고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된 심령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동시에 ‘모든 것에 대한 판단력’을 한데 묶어서 ‘일괄 포장 선물’(gift package)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신자라 해도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곧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거듭나고 성화되었다 해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한다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 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며 지극히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발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정 ‘영적인 자’에게는 그 대신 하나님의 계획, 섭리, 행사를 부분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은 주셨는데,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마음, 즉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읽기 전용’으로 설정되어 있는 ‘USB’나 메모리카드에는 어떤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자료를 읽을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은 마음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구속사의 경륜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동시에 또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즉 성령 충만한 신자는 더 이상 세속적인 가치 기준을 따르거나 불신앙적인 시야로써 역사와 인생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바라보는 자리와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항상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서 세상 쪽을 바라보며 매사를 판단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박사도 이처럼 성령 감동의 무한한 지능지수를 발휘하게 된 성도 한 사람보다 더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고명한 현자라 해도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대상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볼 수 있게 된 신자의 수준에는 결코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그 심령이 완전히 감동됨으로써 예수님처럼 생각할 줄 알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의 오묘한 경륜을 비롯하여 그 외에 인생과 우주의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밝히 깨닫고 판단할 줄 아는 진짜 ‘신령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영적인 일’은 사람의 지적 작용만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지극히 고차원에 속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일’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그 속사람이 완전히 새롭게 된 ‘신령한 자’만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대속’과 ‘최후의 대 심판’이, ‘천당 영생’과 ‘지옥 영벌’이 일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은, 기독교 진리에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혹은 옛날의 비과학 시대에 만들어진 교리라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애당초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은 불신자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고 거부 반응을 유발하며 조소를 던질 수밖에 없는 ‘감추어진 비밀’이 되도록, 그래서 그 복음의 혜택인 구원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그렇게 ‘은밀한 신비’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오직 ‘신령한 자’만이 그것을 깨닫고 그에 따른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있으면 이미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임하심을 분명히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거듭난 이후로도 더욱 성령 충만을 입고 살도록, 즉 자신의 영지 작용이 철저히 성령으로 제어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심령 깊이 완전히 입력되어 있어야만 설교가 항상 은혜롭고 찬송이 정말 즐겁고 기도가 더 뜨거워지고 성도끼리 진정으로 화목하고 전도에도 절로 큰 역사가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꾸 컴퓨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하루를 사용하였으면 반드시 사용한 기록을 지워야 다음에 사용하려면 잘 돌아갑니다. 우리의 심령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CPU”가 있지만 주변 정리를 하여야 합니다. 정리할 것은 지워야 합니다. 잠자리 들기전에 항상 참회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똑같은 성령으로 감동된 ‘신령한 자’가 되어야만 이처럼 그 생각부터 행동까지 똑같이 일치되는 신행일치의 성화가 나타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인 모두가 각각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신령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사를 통해 은혜롭게 행하고 계시는 모든 ‘영적인 일’에 대해 이처럼 똑같이 깨닫고 똑같이 믿고 똑같이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