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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구 없다" 그러나 '하나님 있다'>의 줄거리:
80년대에서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인기를 누렸던 개그 프로그램 '유머 일번지'의 한 고정 코너 중 '영구야 영구야'가 있습니다. 바보 모습을 띤 심형래씨가 불쑥 나타나서는 혀 짧은 소리로 "영구 없∼다! 띠리리리리리" 라고 외치는 겁니다. 희한하게도 '영구' 대신 우리 각자가 자기의 이름을 대입하여 부르기만 하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가장 완벽한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몸이 사람들의 눈앞에 있을 때마다 "영구 없다"를 외치는 거지요.
“영구 없다” 그러나 ‘하나님 있다’
(시편 61:1~8)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5.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구 없다” 그러나 ‘하나님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구 없다” 그러나 ‘하나님 있다’
개그맨이자 영화제작자겸 감독인 심형래 씨가 1980년대 코미디에 출연할 때에 만든 유행어가 바로 “영구 없다”라는 말입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유머일번지라는 개그프로그램이 방송되었는데 ‘영구야, 영구야’ 그리고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라는 인기 고정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한쪽은 무릎까지 둘둘 말아 올렸고, 머리에는 땜빵이 나 있는 가발을 썼습니다. 볼에는 주근깨가 있고 코를 흘리면서 등장합니다.
“영구 어딨니?”라고 혼자 묻고는 “영구 없다! 띠리리리리리”라고 혼자 대답하며 불쑥 나타납니다. 당시에 이 말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한 때 아주 유행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이유는 스스로 물어보고 대답하는데 어디 있냐고 물어봤으니 여기 있다고 대답을 해야 할 텐데, 없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입니다.
모두의 눈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영구가 자기 입으로 ‘영구 없다!’라고 합니다. 시청자들은 영구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영구는 자기가 입으로 없다고 말하면 그 사실이 부정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바보 같은 생각이 얼마나 모순되는지는 시청자는 알지만 영구는 모르기 때문에 우습고 재미있게 느꼈던 것입니다. 뻔히 보이는데 말로만 없다고 외치면 없어지는 걸로 믿는 영구의 굳건한 믿음이 신앙에 접목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나의 몸이 처한 상황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현장에서 ‘영구 없다’라고 하는 것 같이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을 웃긴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남편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러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봄 자체는 끊임이 없어야 하는데 언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식후 30분일까요? 식전 30분일까요? 아니면 공복에 바라보아야 할까요? 일이 힘들 때에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영구 없다’라고 외치듯이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나는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웃기는 바보로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와 닮았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를 보는 사람들 앞에서 ‘영구 없다’라고 살아갈 때에 하늘에서는 ‘하나님 있다’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의 전부입니다. 별의별 교리적 신앙적 학문적 이야기를 해보아도 ‘영구 없다’라고 할 수 없으면 ‘하나님 있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나는 ‘영구 없다’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정치인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할지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영구 없다’라고 살아갈 때에 그곳에 ‘하나님 있다’라는 음성과 함께 그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땅을 다스리시면 우리 국민의 삶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BC.979년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미 왕위에 올라 3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다윗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고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는 이곳에서 지은 시로 여겨집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할 것 같은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였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지도 30년이 되자 백성들의 마음은 떠오르는 별이었던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다윗에 대한 존경과 동정심도 압살롬의 반역의 기세에 식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마하나임까지 도망하여 지은 시가 한마디로 줄여서 ‘영구 없다, 하나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2절을 보면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 끝이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곳이 땅 끝은 아니었지만 다윗이 심리적으로 시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기에 땅 끝처럼 느꼈습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라는 말은 마음이 지금 주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마음의 평강이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기쁨도 없고 감사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근심이 압도하고 두려움이 생기고 불안과 초조로 다급합니다. 이렇게 평강이 없는 상태가 바로 마음이 약해진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급물살에 마음이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으로부터 탈출하여 마음을 더 높은 곳으로 보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바위’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의 환궁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마음이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곧 높은 바위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몸은 요단강 동편 마하나임으로 피난을 왔지만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부터 육체를 피난시킨 다윗은 이제는 이 상황 자체로부터 마음을 하나님께로 피난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피난으로부터의 피난입니다. 육체는 마하나임으로 피난하였지만 삶의 상황이 마음을 짓누르고 감당할 수 없게 되어 평강이 깨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이 피난 상황으로부터 마음을 하나님께로 피난시키고자 하는 간구를 합니다. 이 간구는 결국 다윗이 ‘영구 없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바보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피난 상황을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다윗은 ‘다윗 없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 외침을 자신의 평생의 소원이자 맹세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라고 했는데 이 서원의 내용이 바로 4절입니다. 4절은 곧 마음이 피난 가는 것을 영원히 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처럼 피난 가는 상황이 아닌 왕 위에 있을 때에도 자신의 사명은 ‘영구 없다’를 외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없기 위해서는 어디론가 가야만 합니다. 이것을 4절의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신앙인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을 성소로 보내겠다는 뜻입니다. 몸은 마하나임에 있지만 마음에 성소를 떠올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피난은 곧 성소를 떠올리며 지성소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몸이 처한 자리에 대해서는 ‘영구 없다’라는 상태가 되고,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음으로서 하나님께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붙잡아야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낼 수 있을까요?
이 방법을 모르면 백날 천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붙잡도록 하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로 생각하는 글자로서의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삶의 상황에 휩쓸리며 약해져 있습니다. 평강이 깨어지고 불안과 근심으로 초조합니다. 이렇게 세상에 휩쓸린 마음을 번제단에서 죽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붙잡기 위해 가르쳐 주신 방법이고,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을 떠나 하나님께로 피난갈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의 서원’이란 4절의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는 맹세였습니다. ‘주의 날개’는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법궤의 덮개인 속죄소 위에 있는 두 천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두 천사는 날개를 앞으로 뻗어서 법궤를 보호하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은 곧 법궤를 보호하는 천사의 날개 아래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정리해보면 항상 이름을 붙잡을 때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거하는 것이고, 날개 아래 거하는 것은 성소에 두신 번제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죽어야 할 나는 이 세상 삶에 먹혀버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삶의 문제에 휩쓸리고 근심 걱정하는 내가 죽고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계신 하늘로 우리의 마음은 이끌려 갈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평강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평강을 찾을 때에 나타는 결과가 5절의 ‘주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의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평생 동안 맹세하여 사명으로 지킨 것은 육체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영구 없다’라고 외치고 마음이 하나님께 피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평생 맹세이자 서원이었습니다. 다윗은 나라를 잘 다스리거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것이 아닙니다. 왕위에 있든지 도망을 가는 상황이든지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피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경외하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가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고 고백하며 그 결과가 6~7절에서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 왕으로 삼아 주셨고 전쟁에 나갈 때에는 이기게도 하셨습니다. ‘영구 없다’라고 외치는 하나님 이름의 경외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피난 가서 없어진 현장에 대해 ‘하나님 있다’라고 행동하시고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은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의 사명도 다윗과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를 간다면 학교에서 ‘영구 없다’를 외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나를 휩싸고 있는 상황들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합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그것을 이겨내려 잘 해보겠다고 의욕을 불태워보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평강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성전의 번제단을 떠올리듯이 십자가를 떠올리고 그곳에서 마음이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계신 하늘로 이끌려질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영구 없다’라고 실천하는 현장에는 ‘하나님 있다’라는 응답이 내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학교는 나의 기업이 됩니다. 8절을 보면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특별히 ‘피난처, 요새, 피할 바위, 반석’이라고 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 그곳에서 ‘영구 없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그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있다’라고 응답하십니다. 영구가 사라진 현장에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됩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제로원으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제로(0)는 스위치가 꺼지는 것이고 원(1)은 켜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성의 스위치가 꺼지면 하나님의 주체성의 스위치가 켜집니다.
우리의 사명은 어떤 곳이나 누구 앞에서든지 ‘영구 없다’라고 마음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 상황을 대면하는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할 때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의 아버지와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구 없다’라고 하는 대신에 ‘영구 있다’를 좋아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끌어안고 걱정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할 때에 내가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대로 되기만을 바랍니다. 이러한 상태는 바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역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 몸이 처한 상황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듯이 하나님이 통치해야 될 영역입니다. 다윗도 왕의 자리에서 ‘영구 없다’라고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다윗 또한 압살롬처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 앞에 선 부모가 ‘부모 있다’라고 할 때에, 자녀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대한 반역이 됩니다. 우리의 평생 사명은 4절에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말한 다윗의 맹세와 사명 같아야 합니다. 직장에 간 나의 사명은 ‘영구 없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로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에만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 직장에 대해서 죽습니다. 이제 내 주체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사명으로 여기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영구 없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의 주체성은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피난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 되시고 그 활동의 결과로 이 땅에서 내게 허락하신 기업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이 그 기업에 매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영구 없다’라고 하는 고백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 수행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 있다’라는 응답이 들려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땅에 나 한 사람이 ‘영구 없다’라고 외치며 돌아다닐 때에 가는 곳마다 천지를 지으시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성이 활성화됩니다. 이보다 남는 장사도 없으며 이보다 복된 삶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로 ‘영구 없다’라고 하는 사명 수행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