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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戚
海原君健 墓誌銘[李瑞雨]
不佞瑞雨嘗讀桐溪鄭公戊辰之箚而竊悲仁城君之冤也。 今者仁城君之孫花陵君洮及其猶子密昌君樴前後訪余于溪山, 乞誌其先考海原君之墓。 噫! 海原乃仁城君之孝子, 不佞何忍辭?
謹按狀: 公諱健, 字子强, 自號曰葵窓。 考仁城君諱珙, 我昭敬王之第七子。 母郡夫人海平尹氏, 左參贊、贈領議政諱承吉之女, 以萬曆甲寅十一月二十七日生公。 幼穎闓, 八歲, 受《小學》, 已知孝親敬兄。 十歲, 入謁憲文王于禁中, 以玉簪爲髫飾, 見世子亦簪玉, 卽脫而藏諸懷, 上大奇之。 仁穆大妃拊摩之, 親書寵異之辭于壁上, 譬含飴之弄, 尤榮矣。 戊辰春, 仁城君謫珍島, 事見大司諫桐溪鄭公全恩疏。 始郡夫人挈諸子相隨島中, 至大故, 分張, 公與伯仲竝配耽羅。 乙亥, 竝量移襄陽。 丙子國被兵時, 郡夫人在京, 公西望號慟, 一夕得吉夢, 俄而郡夫人至, 卒以濟艱, 咸以爲孝感焉。 聞駕入南漢城, 敵圍未解, 眷念宗國, 題詩巖石以寫憂憤, 其一聯曰: “有夢趨丹陛, 無謀解白登。” 其忠義又如此。 丁丑, 宥還京, 上素知仁城君冤。 至是下敎若曰: “亂餘更始。 罪大少皆蕩滌。 豈伊至親獨不蒙恩? 其復仁城君封爵, 諸子竝授職, 未昏者昏之, 有司及其需。” 聞者莫不感泣。 乙未, 丁郡夫人憂。 伯氏廢疾無嗣, 仲氏出爲王子順和君之後。 諸宗合議, 遵郡夫人遺意, 謂公當主鬯, 至蒙睿斷, 公以伯嫂方存泣辭, 不能得。 丁酉, 制除, 自海原正襲封爲海原君, 晉秩承憲大夫。 嘗因一家不率者之郵, 再遭簡書, 上知公謹愼無所預, 不之罪, 臺亦自咎其失實也。 壬寅冬, 有疾沈綿, 自知不起, 處家事, 戒諸子無亂命, 顧盆梅, 吟詩曰: “臘梅有意吐新艶, 松雪無端驚病身。” 竟以十二月二十四日卒于正寢, 享年四十九。 訃聞, 上震悼輟朝, 弔祭致賻, 禮葬恩恤有加。 越明年二月二十一日, 永窆于楊州塔谷里面丙之原, 以從先兆。 乙丑, 用長男沇推恩, 贈嘉德大夫、兼五衛都摠府都摠管。
公孝友由天植。 仁城君之居母殯喪, 毁而病, 公年十三, 色憂焦然, 行不翔笑, 不矧者數旬。 仁城君憐, 且歎曰孝兒。 十五, 罹禍, 叫號擗踊, 絶而復蘇。 啜粥屛菜果, 衰絰不離身, 三年猶一日, 以海氓之蚩頑亦皆敬服。 事郡夫人, 色養備至, 時節必置酒上壽, 晨昏定省, 雖或居異第, 而不一廢。 有癠, 操藥侍側, 忘寢與食, 其革則澡沐燒香, 祈天乞命。 及沒, 其戚如前喪而易過之, 每値諱辰, 追慕悲慟, 躬莅饌羞, 四時上冢, 環省塋域, 盤桓不忍去。 雖朔望小祀, 亦率子弟齋宿行事。 晩扁其所居堂以命慕, 曰: “‘五十知天命, 五十慕父母’, 非孔、孟之言乎? 余年垂五十, 庶幾鏡此而勖之哉!” 敬兄愛弟, 怡怡湛樂。 仲氏之沒在郡夫人憂中, 拊膺大慟, 曰: “吾失恃之謂何? 而同氣之又亡, 尙誰攀以生也?” 事寡嫂如兄, 視孤姪猶子。 慈于子女而敎以義方, 睦于宗族而恤其困乏。 內兄尹昌門嘗患毒厲濱死, 公將往視, 子弟挽止之, 公歎曰: “斯人斯疾, 吾何忍恝然也?” 拂袖而前, 醫治殫心, 尹遂活, 而公亦無他, 人謂庾衮不如也。 奴隷有過誤, 不加詬怒; 有疾, 與之藥, 曰: “主而不憂, 誰憂者?” 禽獸家養者, 斃則埋之, 曰: “聖人不棄帷蓋, 爲此也。” 其仁愛之推廣類如是。 淸素如寒士, 衣無華采, 食不兼味, 未嘗爲子孫拓一畝地。 唯松竹在庭, 圖書滿室, 與諸宗修契, 暇日, 相命, 引滿朗吟。 酷愛山水, 每聞佳境, 携壺獨往, 超然若世外人。 少好讀書, 平生手不釋卷。 爲詩, 學老杜。 久之, 自運鑪錘, 操筆卽成而格不躓。 筆與畫各有師法, 皆苦心得之, 賞鑑家咸曰精妙。 故世以三絶之名歸之。 有遺稿詩五卷、文二卷藏于家。夫人豐山沈氏, 判義興三軍府事、豐山君、靖襄公龜齡之後, 處士闈之女也。 有閫範。 擧六男一女: 男長沇, 花昌君; 次湸, 花善君; 次渷, 花山君, 出繼季父海陽君後; 次㵾, 花春君; 次淝, 花川君; 次洮, 花陵君。 女適郡守沈廷耆。 花昌娶監察盧景命女, 生二男一女: 男長茂豐副正根、次茂溪守植。 因根、植無後, 取弟㵾子陽平正檣爲後, 以奉宗祀。 根娶掌令鄭樍女, 生一女, 適沈壽松。 植未娶夭。 檣娶郡守尹以復女, 生三男。 女適閔彦謙, 無後, 取其弟彦詢子性孝爲後, 娶鄭經周女, 生一男二女。 花善初娶鄭良緖女, 後娶郡守黃道亨女, 幷無, 後取弟渷子密昌君樴爲後, 娶判官吳始績女, 生一男三女。 花山初娶朴誌女, 生一男二女。 後娶府使黃有瑞女, 生二男五女: 男長樴卽花善後也; 次洛昌都正樘娶崔宇成女, 生一女; 次橚卽花陵後也。 女長適持平宋宅相, 生三男二女; 次適趙緬, 生一男宗裕, 娶柳綱女; 次適進士南泰承, 生二男; 次適權世隆, 生一男; 次適閔德煥, 生一男, 餘未嫁。 花春初娶贈參判任量女, 生二男五女, 後娶丁時敏女。 男長檣卽花昌後也; 次西平都正橈娶閔挺桓女, 生一女。 女長適成胤長, 生一男二女; 次適尹師龍, 生一女; 次適崔邦瑞, 生二男; 次適金夢祥, 生二男; 次適尹慶曾, 生一男。 花川娶司評徐文道女, 無後, 取從兄瀛昌君沉子礪山君楫爲後, 娶僉知閔挺栢女, 生二女。 花陵娶監司金世翊女, 無後, 有庶女二人, 取兄渷子陵昌君橚爲後, 娶趙明世女, 生一男。 女長適金慶晉, 生二女; 次適徐宗周, 生一男。 郡守生一男師聖, 娶李觀朝女, 生一男三女: 男東鎭娶崔尙震女, 餘幼。 銘曰:
有美王孫, 奇稱自童。 脫簪敷衽, 紆賞重瞳。 禍生無胎, 考遘愍凶。 號冤叫痛, 上徹玄穹。 豈有孝親, 而弗移忠? 上在圍城, 薄于獫戎。 淚墨濡嵒, 詩見其裏。 枉伸枯蘇, 復籍紹封。 服禮依仁, 終溫且恭。 德之孔淑, 才又何工? 畫追顧、陸, 書法張、鍾。 詩又妙詣, 老杜爲宗。 三絶之譽, 古虔今公。 弗羸于壽, 祉後則豐。 維楊塔谷, 寔維幽宮。 銘誌其間, 以期無窮。
이건[李健]의 묘지명(墓誌銘) 이서우(李瑞雨)
나 이서우(李瑞雨)는 일찍이 동계(桐溪) 정온(鄭蘊)공의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 차자(箚子)를 읽고는 못내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지금 인성군의 손자 화릉군(花陵君) 이조(李洮) 및 그 조카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전후하여 나를 계산(溪山)으로 찾아와 그 아버지 해원군(海原君)의 묘지명(墓誌銘)을 청하였다. 아! 해원군은 바로 인성군의 효자(孝子)이니 내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行狀)을 상고하건대, 공의 휘(諱)는 건(健)이요, 자(字)는 자강(子强)이며, 자호(自號)는 규창(葵窓)이다. 아버지 인성군 이공은 우리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의 일곱째 아들이요, 어머니 군부인(郡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좌참찬 증 영의정 윤승길(尹承吉)의 딸인데, 만력(萬曆)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 11월 27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8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이미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할 줄 알았다. 10세 때 궁중에 들어가 헌문왕(憲文王, 인조)을 뵈었는데, 임금이 내린 옥잠(玉簪)으로 머리에 장식을 하였다가 세자가 옥잠을 꽂는 것을 보고는 즉시 벗기어 품속에 감추자, 임금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며, 인목 대비(仁穆大妃)도 어루만져 주고 친히 사랑한다는 말을 벽에다 쓰면서 만년에 엿을 우물거리며 손자나 보겠다는 (후한(後漢) 마 황후(馬皇后)의) 아름다움에 비유하니, 더욱 영광스러웠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 봄에 인성군이 진도(珍島)로 귀양을 갔으니, 그 일은 대사간(大司諫) 동계(桐溪) 정온(鄭蘊)공의 전은소(全恩疏)에 보인다. 처음에 군부인이 여러 아들들을 데리고 섬으로 따라갔는데, 인성군이 죽기에 미쳐서 흩어져 공은 백씨(伯氏)ㆍ중씨(仲氏)와 함께 탐라(耽羅)로 유배되었다가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모두 양양(襄陽)으로 양이(量移)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오랑캐 군사들이 침범해 올 때 군부인이 서울에 있었으므로 공이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하루 저녁에는 길몽(吉夢)을 꾸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부인이 돌아가 고생을 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 하였다. 어가(御駕)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적군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나라 일이 걱정되어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우분(憂憤)을 풀었는데, 그 한 연구(聯句)에 이르기를, “꿈속에 임금께 달려갔는데, 백등(白登)의 포위1) 풀어줄 모책(謀策) 없네[有夢趨丹陛 無謀解白登]” 하였으니, 그 충의(忠義)가 또 이러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사유(赦宥)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임금이 평소 인성군의 억울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난리를 겪은 나머지 경시(更始)하느라 대소 죄인을 모두 탕척(蕩滌)하였는데 그 지친(至親)은 어찌하여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였는가? 인성군의 봉작(封爵)을 회복시키고 그 여러 아들들에게 벼슬을 줄 것이며, 혼인하지 못한 자는 혼인을 시키되 유사(有司)는 그 혼수를 지급해 주라.”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에 군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다. 백씨(伯氏)는 폐질(廢疾)이 있어서 후사(後嗣)가 없었고, 중씨(仲氏)는 왕자(王子) 순화군(順和君)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기 때문에 여러 종인(宗人)이 합의하여 군부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공이 마땅히 맏상주가 되어야 한다면서 임금의 재가까지 받자, 공은 큰 형수가 있다는 것으로써 눈물로 호소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에 탈복(脫服)하고 해원정(海原正)에서 해원군(海原君)을 습봉(襲封)하여 승헌 대부(承憲大夫)의 품계에 올랐는데, 일찍이 한 집안을 건사하지 못한 허물로 인하여 재차 탄핵하는 글이 올려졌으나 임금이 공의 근신(勤愼)함을 알아 대관(臺官) 역시 사실이 아님을 자책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 겨울에 병이 나서 위중해지자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집안 일을 처리하고는 여러 아들을 경계함에 있어 혼미한 정신으로 남긴 말 없이 분매(盆梅)를 돌아보며 시를 읊기를, “납매(臘梅)는 뜻이 있어 새로 아름다움 토하고, 송설(松雪)은 까닭 없이 병든 몸을 놀라게 하네[臘梅有意吐新艶 松雪無端驚病身]” 하였다. 마침내 12월 24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니, 향년(享年) 49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진도(震悼)하여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ㆍ치부(致賻)며 예장(禮葬)에 특별한 은택의 보살핌이 있었다. 그 이듬해 2월 21일에 양주(楊州) 탑곡리(塔谷里) 임좌(壬坐) 방향의 묘원에 장사지내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 따름이었다. 을축년(乙丑年, 1685년 숙종 11년)에 장남 이윤(李沇)의 추은(推恩)으로 가덕 대부(嘉德大夫)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인성군이 어머니 상에 몸을 상해 병이 나자 이때 공의 나이 13세로서 근심하는 안색으로 초조해 하면서 성큼성큼 걷지 않고 이를 드러내어 크게 웃지 않기를 수십일 동안 하였다. 그러자 인성군이 불쌍하게 여기고 효성스러운 아이라고 감탄하였다. 15세에 인성군이 화(禍)를 당해 죽자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뛰다가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났다. 죽만 마시고 채소와 과일을 물리쳤으며 상복(喪服)을 잠시도 벗지 않고 3년을 하루처럼 지냈으므로, 대단히 어리석고 완악한 자들도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군부인을 섬기면서 뜻을 받들고 음식과 의복 봉양을 두루 갖추었으며 시절(時節)이면 반드시 주연(酒宴)을 베풀어 축수(祝壽)하였고, 아침저녁 문안을 비록 다른 집에 살더라도 하루도 폐하지 않았다. 병환이 나면 약을 가지고 옆에서 모시느라 침식을 잊었으며, 더 위독해지면 목욕하고 향(香)을 피워 하늘에 명(命)을 빌었다. 그러다가 돌아가시자 슬퍼하기를 전의 아버지 상처럼 하였으나 더 지나쳐서 매양 제삿날을 당하면 추모하는 마음이 비통하여 몸소 제수(祭需)를 살피고, 사시(四時)에는 무덤에 올라가 묘역을 둘러보고는 머뭇거리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비록 삭망(朔望)의 소사(小祀)라도 자제를 거느리고 재계(齋戒)하여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사는 집에다가 ‘명모(命慕)’라 편액(扁額)을 달고는 이르기를, “50세에 천명(天命)을 알고 50세에 부모를 사모한다는 것은 공맹(孔孟)의 말이 아니던가? 내 나이 50세이니 이를 거울삼아 힘쓰겠노라.” 하였다. 형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며 즐겁고 화락하게 지냈는데, 중씨(仲氏)가 군부인의 상중(喪中)에 죽자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기를, “내가 어머니를 잃은 것만 해도 무어라고 할 수 없는데 형이 또 죽었으니,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갈 것인가?” 하고, 과부 형수를 형처럼 모시고 고아가 된 조카들을 자기 아들처럼 보았다. 자녀를 사랑하되 바른 도리로써 하고, 종족(宗族)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내종형(內從兄) 윤창문(尹昌門)이 일찍이 지독한 여질(癘疾)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에 공이 가서 보려고 하였는데, 자제들이 말리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그 사람에게 그런 병이 걸렸는데, 내가 어떻게 모른 체하겠는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서 정성껏 치료해주니, 윤창문이 마침내 살아나고 공 역시 별탈이 없자 사람들이 유곤(庾袞)도 그보다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종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노여워하며 꾸짖지 않았고, 병이 나면 약을 주면서 말하기를, “주인이 걱정해 주지 않으면 그 누가 걱정해 주겠는가?” 하였으며, 집에서 기르던 금수(禽獸)라도 죽으면 묻어주면서 말하기를, “성인(聖人)께서는 수레의 휘장과 덮개[帷蓋]도 버리지 않고 이렇게 하셨다.” 하였으니, 그의 인애(仁愛)를 널리 미루어간 것이 이와 같았다. 청소(淸素)함이 가난한 선비와 같아 화려한 비단옷이 없었고,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이 없었으며 일찍이 자손을 위해서 1묘(畝)의 땅도 넓히지 않고 오직 뜰에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집안에 도서(圖書)를 가득히 채워 여러 종족들과 계(契) 모임을 하여 한가한 날이면 서로 모여 술잔을 들며 시를 낭송하였다.
산수(山水)를 매우 좋아하여 매양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술병을 차고 혼자 가서 세상 밖 사람처럼 초연(超然)해 하였다. 젊어서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시(詩)는 노두(老杜, 두보(杜甫))를 오랫동안 배웠으므로 생각을 가다듬어 붓을 잡으면 즉시 이루어졌으나 격식이 어긋나지 않았고 글씨와 그림에 각기 사법(師法)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고심(苦心)한 끝에 터득한 것이어서 감상(鑑賞)하는 자들이 모두 정묘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 시(詩) 5권과 문(文) 2권의 유고(遺稿)가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夫人) 풍산 심씨(豐山沈氏)는 판의흥 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풍산군(豊山君) 정양공(靖襄公) 심귀령(沈龜齡)의 후손 처사(處士) 심위(沈闈)의 딸이다. 규범(閨範)이 있었는데 6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이연(李沇)은 화창군(花昌君)이요, 다음 이양(李湸)은 화선군(花善君)이요, 다음 이곤(李滾)은 화산군(花山君)인데 계부(季父) 해양군(海陽君)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으며, 다음 이정(李)은 화춘군(花春君)이요, 다음 이비(李淝)는 화천군(花川君)이요, 다음 이조(李洮)는 화릉군(花陵君)이며, 딸은 군수(郡守) 심정기(沈廷耆)에게 시집갔다.
화창군이 감찰 노경명(盧景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무풍 부정(茂豊副正) 이근(李根)이요, 다음은 무계수(茂溪守) 이식(李植)인데, 이근과 이식이 후사가 없음을 인하여 동생 이정의 아들 양평정(陽平正) 이장(李檣)을 후사로 삼아 종사(宗祀)를 받들고 있다. 이근은 장령(掌令) 정정(鄭楨)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심수송(沈壽松)에게 출가하였다. 이식은 장가들기 전에 일찍 죽었다. 이장은 군수 윤이복(尹以復)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고, 딸은 민언겸(閔彦謙)에게 출가하였으나 후사가 없어 그 동생 민언순(閔彦詢)의 아들 민성효(閔性孝)를 후사로 삼았는데, 정경주(鄭經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화선군의 초취(初娶)는 정양서(鄭良緖)의 딸이요, 후취(後娶)는 군수(郡守) 황도형(黃道亨)의 딸인데 모두 후사를 두지 못해 동생 이곤의 아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을 후사로 삼았다. 밀창군이 판관 오시적(吳始적)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화산군의 초취는 박지(朴誌)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고, 후취는 부사(府使) 황유서(黃有瑞)의 딸로 2남 5녀를 낳았으니, 장남 이직은 바로 화선군의 후사가 되었다. 다음 낙창 도정(洛昌都正) 이탱(李樘)은 최우성(崔宇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이숙(李橚)은 바로 화릉군의 후사이며, 큰딸은 지평 송택상(宋宅相)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았으며, 다음은 조면(趙緬)에게 출가하여 1남 조종유(趙宗裕)를 낳았는데, 유강(柳綱)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진사 남태승(南泰承)에게 출가하여 2남을 낳고, 다음은 권세융(權世隆)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 다음은 민덕환(閔德煥)에게 출가하여 1남을 낳았으며, 나머지는 출가하지 않았다.
화춘군의 초취는 증 참판 임량(任量)의 딸로 2남 5녀를 낳았고, 후취는 정시민(丁時敏)의 딸이다. 장남 이장은 바로 화창군의 후사이고, 다음 서평 도정(西平都正) 이요(李橈)는 민정환(閔挺桓)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장녀는 성윤장(成胤長)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고, 다음은 윤사룡(尹師龍)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고, 다음은 최방서(崔邦瑞)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고, 다음은 김몽상(金夢祥)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며, 다음은 윤경증(尹慶曾)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화천군은 사평(司評) 서문도(徐文道)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해 종형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沉)의 아들 여산군(礪山君) 이읍(李揖)을 후사로 삼았다. 여산군이 첨지(僉知) 민정백(閔挺柏)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다.
화릉군은 감사 김세익(金世翊)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는 없고 서녀(庶女)만 둘이어서 형 이곤의 아들 창릉군(昌陵君) 이숙을 후사로 삼았다. 창릉군이 조명세(趙明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장녀는 김경진(金慶晉)에게 출가하여 딸 둘을 낳았고, 다음은 서종주(徐宗周)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군수(郡守) 심정기는 아들 심사성(沈師聖)을 낳았는데, 이관조(李觀朝)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심동진(沈東鎭)은 최상진(崔尙震)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름다운 왕손이 있어 아이 때부터 기특하였네. 옥잠(玉簪)을 빼 옷깃에 감추니 임금이 상을 내렸네. 까닭 없는 화(禍)가 일어나 아버지가 흉화(凶禍)에 걸리자, 억울하고 애통함 호소하여 하늘에 사무쳤네. 어찌 어버이께 효도함 옮겨 충성하지 않으랴? 임금이 성에 포위되어 오랑캐에게 핍박당하자 눈물 흘리며 바위 적신 그 시(詩)에서 속마음 알 수 있네. 억울함 신원(伸寃)되고 마른 나무 다시 소생하여 관작과 봉호(封號)가 회복되었네. 거상(居喪)을 예에 맞게 치르고 온화하고 공손하였네. 덕(德)이 크게 아름답고 재주는 어찌 그리 공교로웠나? 화법(畵法)은 고개지(顧愷之)와 육탐미(陸探微)를 따르고, 서법(書法)은 장지(張芝)와 종요(鍾繇)를 따랐네. 시(詩) 역시 묘한 조예가 있어 두보(杜甫)를 종(宗)으로 삼아, 삼절(三絶)이란 칭예(稱譽) 지금까지 전해지네. 수명 누리지 못했으나 후손들은 풍성한 복 받았네. 양주(楊州) 탑곡리(塔谷里) 이 곳이 공의 무덤인데, 그 사이에 묘지(墓誌) 새겨 묻어 무궁히 전하도록 하네.
각주
1) 백등(白登)의 포위:한 고조(漢高祖) 7년에 고조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匈奴)의 추장 묵특[冒頓]에게 포위되었다가 7일 만에 풀려 나온 일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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