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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야기 스크랩 단구서원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30 14.09.07 16: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단구서원(丹邱書院)
소 재 지 :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산25-1
(원소재지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 산 25-1)
건축시기 :  1858년(철종 9)
중건시기 :  1873년(고종 10)


건축 배경
이 서원은 신석우(申錫祐, 1816~1881)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들을 가르치다가 그가 주관하여 신적도(申適道)와 신열도(申悅道)의 충성을 기리고 신채(申埰)의 유학사상을 전승시키기 위해 1858년(철종 7)에 서원으로 승격하여 건립하였는데, 그들을 배향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 앞 공적비에 새겨진 글과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에 따르면 1873년(고종 10)에 다시 제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다가 1989년에 전 민선 대전시장(前 民選 大田市長) 신기훈(申基勳)의 주관으로 묘우(廟宇)를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부지임야 534평은 후손 신원효(申源孝)가 기증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해인 1990년에 신달도(申達道)를 추봉하였다.


건축 특징
신적도, 신열도, 신달도, 신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나지막한 축단 위에 지어졌고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동재(東齋)인 거인재(居仁齋) 또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당을 가운데로 하여 좌우로 협실을 두었으며, 당은 뒤로 문을 열 수 있게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서재(西齋)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인데, 정면에서 우측을 제외한 두 칸은 앞에 마루를 두었다.


건축 구성
솟을대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상덕사(尙德祠)가 정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당의 좌우에는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동재는 거인재(居仁齋)라고 편액되어 있으나 서재는 편액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동재에는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와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樑文)」이 표구된 액자가 걸려있다.


현판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
신재인(申載仁) 기(記)

내력과기능

향사일
음력 10월 상정일(上丁日)



관련이야기
- 신열도가 이 마을을 개척...
약 360년 전에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바 있는 신열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후에 신석우(申錫祐)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침에 단구라 칭하다가 1879년에 와서 고종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마을의 안 고개의 이름을 따서 엄고개 또는 엄현(奄峴)이라 불렀다.

인근에 새로 생긴 또 하나의 자연마을은 신기(新基)라고 불려진다. 원래 아주신씨 집성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조성과 더불어 수몰 지역의 주민이 이주해 와서 신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들이 살고 있다.

관련인물

주향자
- 주향자
- 신적도(申適道): 1574(선조 7)~1663(현종 4).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다. 아버지는 흘(?)이며,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을 제수 받았고, 병자호란 때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을 제수 받았다. 1867년(고종 4)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호계집(虎溪集)』이 전한다.

- 신달도(申達道): 1576(선조 9)~1631(인조 9).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형보(亨甫)이며, 호는 만오(晩悟)이다. 아버지는 흘(?)이며, 조목(趙穆)?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에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1)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 파직되었다가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오집(晩悟集)』이 전한다.

- 신열도(申悅道): 1589(선조 22)~1659(효종 10).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진보(晋甫), 호는 나재(懶齋)이다. 아버지는 흘(?)이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0세 때 경사(經史)를 통달하였고, 1624년(인조 2) 증광시(增廣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서장관(書狀官)?예조정랑(禮曹正郎)?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울진현감(蔚珍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능주목사(綾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문소지(聞韶志)』를 펴 냈으며, 문집으로 『나재집(懶齋集)』이 전한다.

- 신채(申埰): 1610(광해군 2)~1672(현종 13).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자경(子卿)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적도(適道)이며,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46년(인조 24) 식년시(式年試)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하였다. 저서로는 『인재집(忍齋集)』이 전한다.


관련인물
- 신석우
신석우(申錫祐): 1816(순조 16)~1881(고종 18).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덕문(德文)이며, 호는 가헌(可軒)이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황조산 아래 봉정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1866년 유후조(柳厚祚)의 천거로 경상도도유사(慶尙道都有司)에 올랐다. 저서로는 『가헌집(可軒集)』이 전한다.

마을이야기

의성 > 중남권 > 분토리
- 비옥한 흙을 토해 내는 동네란 뜻으로 분토(粉吐)
봉양면은 의성군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 67.1㎢, 인구 5,734명, 13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 의성읍, 서쪽으로 비안면, 남쪽으로 금성면, 북쪽으로 안평면에 접한다. 면의 북부는 100~300m의 구릉성 저산지를 이루고, 북동쪽에서 흘러오는 남대천(南大川)과 남동쪽에서 흘러오는 쌍계천(雙溪川)이 면의 중앙부에서 합류하여 봉천(鳳川)이 되어 서쪽으로 흐른다. 그 유역에 기름진 평야가 형성되어, 경지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면에 비해 높은 편이며, 주요 농산물은 주곡 작물외에 원예 작물 재배가 성하여 배추, 참외, 호박, 수박 등 채소 생산이 군내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과일로는 전국에서 품질이 최상인 자두가 유명하다.

분토리(粉吐里)는 주위에는 구봉(九峰)이라고 불리는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이를 찾아온 어떤 지관(地官)이 이 구봉 중 봉두산(鳳頭山)이 봉의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어 길지라고 기뻐하였으나 앞산 갈모봉이 사혈(蛇穴)임을 알고 분함을 토해 냈다는 뜻으로 분토(憤吐)라 하여 그대로 지명으로 전해 왔다. 그 후세에 마을 이름에 분할 분[憤]은 좋지 않은 뜻이라 하여 비옥한 흙을 토해 내는 동네란 뜻으로 ‘분토(粉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360년 전에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바 있는 신열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후에 신석우(申錫祐)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침에 단구라 칭하다가 1879년에 와서 고종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마을의 안 고개의 이름을 따서 엄고개 또는 엄현(奄峴)이라 불렀다. 인근에 새로 생긴 또 하나의 자연마을은 신기(新基)라고 불려진다. 원래 아주신씨 집성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조성과 더불어 수몰 지역의 주민이 이주해 와서 신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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