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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의 아픔을 보듬는 것도 하나의 업무였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현장 숙련공이지만 120여명 정도 되었다. 대졸 출신들도 편부모 슬하가 반반이지만 현장은 그 비율이 더 심했다.
현장을 다니던 중 한 주임이 다가와서 특별한 부탁이 있다며 꼭 들어 달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 퇴근시간에 주임이 직원과 함께 머뭇거려서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주임은 ‘낮에 말씀드린 건인데 과장님이 꼭 해 주시어야 합니다’라며 설명을 했다.’
들어보니 ‘이 친구가 득남을 했는데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좋은 일이군, 축하해요’’ 하고 직원과 악수를 했다. 하지만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아, 자네 귀한 아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지을 수 있나, 부모님께 지어 달라고 하게, 어른들은 손자 이름을 짓는걸 큰 행복으로 여기네’ 했더니 주임이 다시 말을 했다, ‘이 친구는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처가 쪽도 장모님만 계셔서 과장님께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걸 부탁할 만한 친인척도 없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이름은 가문의 항 열에 따라 지어야 하고 자칫하면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한학을 배운 적도 없고 더욱이 성명철학책을 본적도 없다면서 은근히 사양했다. 직원은 ‘과장님이 꼭 지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부탁을 해 오는 것이다. 한시간쯤 이야기하다가 그의 진심을 느끼자 지어 주어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본관과 항열자를 물었더니 본관은 아는데 항열자는 모른다는 것이다. 집에 족보도 없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가서 고향마을의 아저씨들과 사촌들, 조카들 이름들을 아는 대로 적어오도록 하고 나도 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 부장님께 사항을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 성명을 하나 지어 달라고 부탁드렸다. 부장님은 ‘그거 어려운데' 하시며 '직원들의 어려움을 풀어주는 것도 간부의 할 일이니 성명철학책을 읽어보고 지어주라’고 하셨다.
아침회의가 끝나자 마자 주임과 직원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시골 친인척의 이름을 적어왔다. 그런데 모두 한글이었다. 그 이름들을 한문으로 써 달라고 했더니 주임이 한문을 모른다고 귓속말로 해 주었다. 다행히 동항열에서는 공통으로 쓰는 자가 있는데 조카뻘 두사람은 공통자가 보이질 않았다. 더 이상 본인에게 물어도 참고 자료가 나올 것 같지 않아 ‘그래 시간을 좀 달라'고 하면서 약속은 했지만 방안이 없었다. 차라리 항열을 다 무시하고 영업적인 성명철학자에게 부탁해서 지어줄까 도 생각했는데 그의 진심에 반하는 것 같아 퇴근 길에 부장님 말씀대로 시내에 둘러 ‘성명철학책’ 두 권을 사서 밤새 읽었다. 막상 읽어보니 알 것 같은데 더 읽고 나면 이래저래 앞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 다음날 그 성씨의 종친회를 찾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은 종씨의 직원을 통해 겨우 종친회 연락처를 얻었다. 전화로 전후 사정이야기를 좀 드리고 항열자를 좀 알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어느 파 몇 대 손 누구의 자녀인가를 물었다. 죄송하지만 이름 외에는 아는 게 없다며 친인척 중 공통인 글자가 자가 항열로 보이는데 좀 찾아서 그 아래 항 열 자를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드렸다. 종친회에서는 여러 차례 전화 끝에 거의 한주일이 지나서야 그 자가 항열자가 맞고 그 다음 항열 자를 알려주면서 파에 따라 중간자 또는 끝자에 쓰기도 한다고 했다. 본인의 성명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어느 파인지만 알려주면 더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성명 철학책을 2권을 독파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두번씩이나 읽었지만 만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 그것 마저 샀다.
수리구성(數理構成)에 따라 성씨와 항 열자를 중간과 끝자로 넣어서 삼원오행(三元五行)에 좋다는 획수를 고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또 최근 이름은 부르기가 좋아야 한다고 해서 한글로 부르는 음이 부드러운 3개를 겨우 선택해서 부부가 협의해서 정하라고 주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 아이가 이름때문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후 아이만 출생하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지어 달란다. 그만큼 현장직원들의 가정여건은 어려웠다. 금전적으로 보다 자라난 환경이 그랬다. 내가 성명철학을 공부한적도 없다고 거듭 사양했지만 누구는 지어주고 누구는 지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몇 아이들의 이름을 더 지어주었더니 소문이 났다. 지금은 성년을 지나 중년이 되어갈 사람들이라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또 한번은 한 어른의 편지가 돌고 돌아서 내게 왔다. 수신인은 직원 이름의 어른 귀하였다. 그 직원이 어느 부서에 근무하는가를 찾느라고 몇 곳을 돌아다니다가 인사부서에서 개봉 확인해서 전달된 것이다.
편지는 한글 맞춤법도 맞지 않고 붓으로 쓴 것이라 꼭 중국 초서를 읽는 것 같이 한참 걸렸다. 내용인 즉 ‘학교에 물어보니 큰 회사인 포항제철에 취직했다는데 2년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명절이 되어도 오지도 않아 우선 소식이 궁금하니 소식을 좀 알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직원의 신상을 확인했더니 시골 출신으로 공고를 졸업하고 취업한지가 2년여가 되었다. 신상명세서에 가족이라고는 아버지 한 분이고 형제도 없었다. 우선 서무에게 그 편지를 전해주라고 했다.
그 다음날 서무는 편지를 받지 않겠다는데 어떻게 하지요 했다. 직원을 다시 불렀다. 둘이서 상담실에서 한참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다가 아버님 이야기를 하니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가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니 전화한번 해 드려라고 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께 여기 주소와 소속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했다.
남의 가정이야기는 간단하게 개입하는 게 아니다 싶었지만 자식을 찾는 부모의마음을 생각해서 편지에 적힌 대로 전화를 드렸다. 전화는 이장 댁이어서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았고 연락해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저녁 퇴근할 무렵에 전화가 왔다.
대뜸 ‘어르신 제가 누구 애비입니다’라고 하시고는 ‘그 놈 살아있는 겁니까’고 물으셨다. ‘예, 현재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제분과 함께 일하는 관리자인데 며칠 지방출장을 가서 돌아오면 전화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른은 우시면서 ‘이제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되십니다. 그 놈 우리집 장손이고 외아들이니 좀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시고는 앞으로 이리로 전화화면 연락이 되지요.’ 했다.
전화를 하지 않겠다는 걸 보니 그 가정에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주임에게 아버지가 통화하고 싶은데 전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무슨 사연인지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했더니 본인하고 이야길 나누었는데 ‘오늘은 그냥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그리 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 그날은 그것으로 끝을 맺었다
며칠 후 주임은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눈이 팔려 어머니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 밥을 먹으며 학교를 졸업했지만 엄마를 돌아가게끔 한 아버지가 미워서 그러는 것 같다’는 이야길 전해주었다. 인사부서에서 호적을 보니 새엄마 소생의 여동생이 있지만 부서 신상명세서에서는 아무도 적지 않았다. 게들도 보기 싫어 앞으로 고향은 절대로 안 간다고 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남의 가정이야기는 간단하게 개입하는 게 아니다 싶어 주저 주저하고 있는데 어른께서 또 전화를 하셨다. ‘아들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습니까? 해서 솔직하게 이야길 드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께
전화를 드리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했더니 ‘회사로 찾아갈
터이니 먼 발치에서 좀 바라보게 해달라’는 애타는 부탁을 해왔다. 난처했다. ‘우선 제가 설득을 해보겠으니 좀 시간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다 내 탓이지요’ 하면서 계속 우셨다. 전화가 길어질 것 같아 ‘건강하게 잘 근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아버님, 제가 급한 일 마치고 수일내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그날부터 그 직원을 특별관리 했다. 주임에게 회식자리를 만들게 하고 그 자리에 나도 참석했다. 회식이 끝나고 주임하고 단 셋이 다방에서 만났다. ‘아버님께 전화 드렸니?’ 하고 물었더니 답이 없다.
그 다음날 그를 다시 불렀다. ‘내가 부탁하는데 내 앞에서 아버지 저 잘 있어요’라고 만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세상에서 자식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이고 그 다음은 아버지이다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 뿐인데 왜 아버지를 그리 피하느냐’ 피하는 것 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설득을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며칠 생각할 시간을 더 주고 다시 직원을 불러서 강요하다시피 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그러면 안된다. 누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고 누가 널 공부시켜 주었는 대 ‘아버님께 저 잘 있어요’라고 한마디만 하라고 설득을 해서 다시 전화를 걸어서 넘겼는데 정말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고 달아났다. 또 전화가 울렸다. 긴 이야기를 하실 것 같아 근무가 끝나고 조용한 시간에 전화를 드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무언가 부자간에 오해가 많았던 것 같다. 또 며칠이 지났고 어른은 전화를 또 해 오셨다. 어른의 말씀은 ‘자기가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애가 일가를 이루고 재산도 정리해주고 싶은데 …’하며 애원하다시피 했다.
‘아, 재산이 있구나’ 생각하며 며칠 후 그를 불렀다.
‘부친은 네게 재산을 물려주고 장가를 보내주려고 한다. 너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의 재산을 물어봤더니 과수원도 있고 전답도 꽤 된다고 했다. 시골에서는 꽤 잘 사는 편이었던 것 같았다.
‘네가 계속 그러면 그게 다 어디로 가니? 새엄마와 네 이복동생들에게 갈 것인데…’하고 말을 끊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가 평생 여기서 월급을 받는 것하고 아버지 말 잘 듣고 장손으로서 물려 받을 재산 중 어느 게 더 큰지 잘 생각해 보라’고 하며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른께서 ‘고맙습니다’고 하면서 전화가 왔다. 아들하고 통화했다는 것이다.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휴가를 좀 주시라는 것이다. 결혼휴가는 정해져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우리집 주소를 가르쳐 달랜다. 농사 지은 것을 좀 나누어 먹자고 했다. 사양하고 그 직원을 불렀다. 내가 ‘아버지께 전화해주어 고맙다’고 했더니 웃는다.
그 다음은 잊어버리고 지냈다. 어느 날 찾아와서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 달라고 한다. 나도 삼십대인데 어떻게 주례를 서냐? 부장님께 부탁해 보지하고 헤어졌다.
부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래 해 주지’ 하고 일정을 확인하셨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주례를
예식장에서 사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보다 상사들이 해주는 게 낮다면서 나 보고도 앞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결혼 후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집으로 인사를 왔다. 아버지가 주신 농산물을 가득싣고서..’ 부인은 아버지가 정해준 고향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그 부부와 외식을 하며 나도 몰래 내 마음이 기뻣다. 공장 현장에서는 남모르는 속 사정이 있는 가정의 자녀가 많다는 걸 새삼느끼며 연륜이 깊은 부장님을 따르는게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부부는 그 이후 설날때는 꼭 세배를 왔다. 소득이 없는 부인에게 세배돈을 주어서 돌려보냈다. 먼 조카 같이 느껴졌다.
첫댓글 석포, 아주 잘 하신 일이오. 서양의 개인 문화와 달리 우리는 다중 문화[situation culture] 니 더불어 산다고 하지요. 홀로 문화의 [digital dictatorship 시대] 창궐로 지금은 모든게 사라지는 것 같소. 감사.
내 삶의 넋두리입니다. 이제 얼마를 살지 모르지만 그 옛날이 생각나서요......읽어주어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