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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성동구청 신우회 예배 설교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3. 십자가, 아브라함의 복을 여는 열쇠
https://youtu.be/Gjbu7WXuutw?feature=shared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13~14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 수요예배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신약성경에서 복음서 기자들이 소개하는 방식에 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제 그 첫번째 시간으로 마태복음에서 강조되어 소개되는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복음으로 소개한다. 예수님과 아브라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소개하는 것이 이번 설교의 주제가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작년에 이와 유사한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때의 설교제목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였다.
이번 주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주제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설교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좀더 명확하게 정리해 볼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역할임을 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아브라함의 복을 열어 주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설교 개요
1.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란?
2. 율법의 저주는 무엇인가?
3.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인가?
4.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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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란?
성경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진 묶음의 책입니다. 그렇게 여러 권의 책을 묶은 것을 전서(全書)라고 부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은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의 책을 모두 모아서 한 곳에 묶어서 154권 76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여유당전서’라고 부릅니다. 그 책에는 정약용의 고전을 연구한 것, 관리로서의 생각, 보고서와 편지, 그리고 일기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성경전서도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거기에는 이야기도 있고 시와 노랫말, 교훈이 될 짧은 글, 그리고 역사와 편지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와 문학양식(장르)을 담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설교를 통해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씩 듣고 배웁니다. 그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 그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계속 하면서 성경에 대하여 좀더 관심을 갖게 되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제가 이 질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대답을 발견한 책은 프랭크 바이올라의 ‘영원에서 지상으로’(From Eternity to Here, 2009)입니다. 이 책은 성경 이야기가 결국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요약하여 들려줍니다. 그 책을 찾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동일한 제목으로 2010년에 출간된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주와 시간의 역사에 대하여 숀 케럴(Sean Carroll)이라는 물리학자가 쓴 것입니다.
‘영원에서 지상으로’라는 책에서 프랭크 바이올라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암시하고 그려주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처소를 마련하신다는 것, 그렇게 해서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다는 것을 그 책에서 소개합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이유는 어려서부터 들은 성경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서 주제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멋진 대답이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 후로 저는 성경을 더 연구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한다는 말은 설교를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며, 또한 성경에 대한 학자들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그분들도 결국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글로 정리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을 읽는 것도 성경 연구에 포함되며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성경의 연구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성경이 무슨 책이며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좀 더 명료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신만의 대답을 갖고 있듯이 성경도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의 대답을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계속 새롭게 만들어 가시면서 마침내 완성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이며 마침내 그 창조를 완성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는 창조로 시작하여 새 창조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어지는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 성경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과정에서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사역을 위하여 부르시고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시는 것을 성경은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 합하여 289회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부르시고 그에게 홍수 이후의 세상을 맡기실 때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이후로 세상에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언약을 맺으셨고 다윗에게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때가 되면 하나님은 새 언약을 자기 백성과 맺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언약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돌보시고 치료하시려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며 지금도 일하십니다(요한복음 5:17). 사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는 창조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시 일을 하셔야 하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땅이 저주를 받을 일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땅이 저주를 받은 계기는 땅의 관리자이며 하나님의 동역자인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땅을 치료하시고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그들을 이 거룩한 일에 초대하시는 것이며 함께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창조는 이미 이루어졌고 새 창조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일은 회복과 치유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언약의 책’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어로 언약은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카비넌트(covenant)이고 다른 하나는 테스타먼트 (testament)입니다. 어원으로 보면 covenant는 약속을 맺는 쌍방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 간다’(convenire)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영어의 컨벤션(convention)도 같은 어원에서 온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컨벤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테스타먼트(testament)는 두 사람의 언약을 증명하기 위해서 증인을 불러 남기는 유언을 가리킵니다. 라틴어로 증인으로서 유언이 참되다고 말하는 것을 테스티스(testis)라고 합니다. 성경을 영어로 테스타먼트(Testament)라고 부를 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을 증언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서 그 언약을 성실히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며 그 언약을 깨뜨리고 상대방을 배반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간 사이의 언약에도 이와 유사한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우리는 저주라는 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율법의 저주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 저주의 이름은 율법의 저주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에는 축복과 저주의 항목이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보여줍니다. 율법은 언약의 표시이며 상징입니다.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언약의 돌판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담은 상자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그 언약궤를 모신 천막을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릅니다(민수기 17:7). 무엇을 증거합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깨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신명기에는 그 조항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신명기 29:24~28
율법의 저주는 바로 언약을 깨뜨린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결과 그들은 번성하지 못하고 망하게 되며, 황폐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고 그 땅이 척박하고 황폐하게 되며 열방의 비웃음거리가 된 이유가 바로 율법의 저주 때문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들이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하나의 설명입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표현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배와 포로생활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자주 들었던 유행가 가사에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수에 젖을 때 부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노랫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저주로부터 형제살인과 전쟁, 그리고 온갖 종류의 포악이 확산됩니다. 성경 이야기는 인간의 상태가 저주 가운데 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려줍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사실 불교에서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으로 말하는 것도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한 가지 표현입니다. 그것은 저주 상태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용어로는 율법의 저주이며 인간이 실존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시려고 자신을 바치셨다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3. 아브라함의 복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는 말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14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면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그에게 모든 것을 다스려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반대가 되면 이 세상은 저주를 받는 것이고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역할에 대하여 잘 보여주는 성경말씀이 시편에 있습니다: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편 8:4~8
인간이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입었고 그 영광 가운데 살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으며 영화와 존귀의 관 대신에 수치와 방탕의 관을 쓰고 세상을 저주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인간 세상을 보여주는 성경의 표현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이 겪을 저주를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 저주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의 저주이며, 그 저주는 이 땅에서 뽑혀 다른 나라에 던져지는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뽑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 던져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만한 왕 헤롯에게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굴한 통치자 빌라도 앞에서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사람이 외치는 바로 그 고통의 외침을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6:47)
이것이 예수께서 받으신 저주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만물을 예수님처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사실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 세계에 흘러가게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어지고 우리를 통하여 이제 실현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4.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 – 십자가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아브라함의 복을 여는 열쇠’라고 정했습니다. 그 열쇠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저주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바로 그 인간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우리 인간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을 다시 멋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흘러가게 하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묵상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바로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와 존귀의 관을 쓰고 품격 있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제사장이며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왕들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왕 노릇을 할 것이다.’
‘우리의 왕 노릇은 타락한 세상의 군왕들이 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우리의 왕 노릇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고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복이 세상에 흐를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존귀한 왕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