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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안죽고 내 신분만 죽는다>의 줄거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의 부활입니다.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육체의 몸과 그에 근거 된 신분의식이 죽을 뿐입니다. 이 세상적인 신분의식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착각함으로 인한 인생의 손해는 천문학적이라 계산이 불가능하지요.
나는 안 죽고 내 신분만 죽는다
(마태복음 22:23~33)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안 죽고 내 신분만 죽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안 죽고 내 신분만 죽는다’
신분이 죽는다는 것은 마치 은퇴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사에 30년을 다니던 전무님이 퇴직을 하게 되면 이제 전무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죽게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퇴를 하시면 담임목사라는 신분에 대해서는 죽게 됩니다. 군인이 제대를 하게 되면 군인 신분에 대해 죽게 됩니다. 한편 오늘 말씀의 의미를 살려보자면 우리 육체의 죽음 또한 은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보실 때에 육체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진 신분의 죽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남편과 아내라는 신분을 얻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죽어서 사별을 하게 되면 남편이나 아내라는 신분으로부터 은퇴를 하게 됩니다. 물론 이혼을 하게 되어도 남편이나 아내라는 신분을 빨리 은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부모라는 신분으로 살지만 죽을 때에 부모라는 신분은 사라지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은 세상적인 신분에서 은퇴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죽음이란 세상에 대한 신분이 사라지는 것일 뿐 인격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인격은 육체의 죽음과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이란 복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안 죽고 내 신분만 죽는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본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와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 어려운 질문을 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사실에 근거한 지혜로운 대답을 하심으로써 이들의 사악한 의도를 물리치셨습니다.
한편 오늘은 바리새인과 쌍벽을 이룬 엘리트 계층이었던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제사장들이 사두개인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에 비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귀족층이었으며 산헤드린공회의 회원들로써 유대사회의 실권을 많은 부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극히 현세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기쁨과 만족은 현세에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부활과 천국과 천사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반대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들이 믿었던 부활과 천국에 대한 이해가 정확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교리는 미신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심은 부활할 때에 어떤 옷을 입게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분을 유지하고 상승하는 일에 부활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활이란 육체의 되살아남이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았으면 장애인으로, 90살에 죽었다면 90살로 되살아나게 됩니다. 이들의 부활관은 현세의 특권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즉 현세의 특권과 명예와 영광을 내세에서도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던 사두개인들이 보기에는 바리새인들의 부활관은 다분히 미신적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두개인에게는 부활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논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계대결혼제도입니다. 계대결혼제도는 형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아 형의 이름으로 가문을 잇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둘째 자녀부터는 자신의 아이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여기에 아주 극단적인 예를 하나 적용합니다. 25~28절을 보면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주고 /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한 여자와 일곱 형제가 결혼을 했으니 바리새인의 교리대로라면 부활 때에 과연 이 여자는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을 단순히 육체의 되살아남으로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으리라 여기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놀라게 하셨던 것처럼 사두개인들도 놀라게 하십니다. 29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부활이나 영적세계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여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시면서 30절에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니 누가 남편이었는지 누구의 아내인지 찾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를 짐작해보자면 변화산 사건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절에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8장 3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빈 무덤을 지키던 천사를 묘사합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하였던 것으로부터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마치 빛의 발광체와 같은 몸을 입고 있는 인격이 천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육체처럼 남녀의 성의 구분이 있고 남녀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형태의 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한편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을 보면 천국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라고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키던 천사의 모습, 계시록에 나타는 예수님의 모습 등에서 발견되는 것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려는 메시지에 따라서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 때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는 못 자국이 남아있는 육신으로 제자들을 만나셨으며 문이 잠겨있는데도 벽을 통과해 바람처럼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부활이 지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31~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두고 논쟁했지만 정작 부활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부활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부활을 죽은 자의 육체가 되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부활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믿든지 믿지 않든지 모두 오류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라고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미 아브라함은 600년 전의 사람이었고, 이삭과 야곱도 500년 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이들이 살아있는 것 같이 언급하셨고, 예수님 또한 살아있는 자의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척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아브라함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죽은 것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신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체가 죽을 때에 사라의 남편으로써의 아브라함, 이삭과 이스마엘의 아버지로써의 아브라함, 롯의 삼촌으로써의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라는 인격의 알맹이는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삭의 육체가 죽을 때에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신분에 대해 죽은 것이었고, 야곱의 육체가 죽을 때에 이삭의 아들이라는 신분에 대해 죽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인격의 알맹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세상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신분을 영원한 것으로 환산해버렸던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일시적으로 은퇴가 있고 죽음이 있는 신분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세상적인 신분의 죽음을 인격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회사에서 은퇴하면 직장인으로써의 생명은 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도회장을 하던 분이 그만두면 회장으로써의 생명은 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격이 죽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이 이와 같습니다. 육체로 살던 삶이 끝난다고 해서 인격까지 죽는 것은 아닙니다.
세월호에서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준에서 보자면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아들과 딸이라는 신분에 대해서 죽은 것이지 그 아이들의 인격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인격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혹은 강도를 당해 칼에 찔려서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육체의 신분일 뿐 결코 인격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라는 신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남편이 자신인줄 알고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영원한 존재의식으로만 만나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육체의 몸이 죽을 때 남편이라는 신분은 은퇴할 것입니다. 죽을 자로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두개인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육체로 주어진 신분들이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신분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도 관계하고자 합니다. 부모라는 신분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우리 아이가 잘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하는 동안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부모라는 의식은 죽을 자의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자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짜 신분은 육체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인격의 알맹이입니다. 이 인격의 알맹이로 하나님을 관계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 세상의 신분의식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강도가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는 이유는 돈이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 의식을 가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강도질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다는 신분의식이나 돈이 있다는 신분의식이나 영원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육체가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거울에 비치는 육체는 죽을 자의 모습입니다. 이 죽을 자의 모습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육체로부터 주어진 모든 신분에 대해 은퇴하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육체로 만나는 모든 신분에 대해 죽을 때에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되고 비로소 온전한 인격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육체로부터 주어진 신분의식이 자신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자의 하나님도 아니시고 죽은 자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남편, 아내, 부모, 자녀, 회사의 사장님, 대통령, 국회의원 등 육체에서 비롯된 세상의 모든 신분의식은 죽을 자입니다. 이러한 죽을 자의 신분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기 위해 산 자의 신분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나, 주님과 함께 부활한 나, 주님과 함께 승천한 나,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른 나, 이렇게 주님과 하나 된 신분의식을 가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제시하심으로 마쳐지고 있습니다. 죽을 자의 신분의식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신분이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신분을 잃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격의 알맹이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육체의 신분을 벗어버릴 때에 비로소 부활은 이루어집니다.
연애를 할 때에 서로를 만나면 좋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손도 잡고 영화도 보고 함께 하는 일들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적 알맹이가 하나님과 하나로 밀착된다면 하나님과 함께 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남편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아내를 대하고, 아내 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남편을 대하며, 부모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자녀를 대하게 됩니다. 육체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과의 데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한강을 걸어도 연인과 함께 걸으면 아름다운 산책이 될 수 있지만, 헤어진 후에 걸으면 죽을 자리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는 배우자나 자녀를 대할 때에 기쁨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되지 않는다면 배우자도 자녀도 괴로움을 주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신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격에서 비롯된 기쁨과 만족을 표현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해 얻은 신분의식은 영원할 수 없으며 진짜 자신일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로써의 신분은 살면서 하나님과의 밀착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이고 일시적인 프로그램입니다. 이 육체에서 비롯된 신분이 자신의 전부인줄로 알고 살아간다면 주객전도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평생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자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인격적 알맹이를 추출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육체가 주는 신분의식이 자신이라는 것을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자의 신분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자의 신분을 은퇴시키고 인격적 알맹이를 뽑아내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죽을 자의 신분에 매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격적 알맹이가 예수님 안에 담겨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을 이루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가 아버지와의 데이트 코스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