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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구는 내 인생의 소모품>의 줄거리:
소모품(消耗品)은, 쓰는 대로 닳거나 줄어들어 없어지거나 못 쓰게 되는 물품이고, 비유적으로는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버려지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즉 소중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써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가 바로 그런 소모품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구와 그에 속한 모든 유형 무형의 것들은 다 소모품입니다.
지구는 내 인생의 소모품
(마가복음 13:24~27)
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구는 내 인생의 소모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구는 내 인생의 소모품’
소모품(消耗品)의 사전적 정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쓰는 대로 닳거나 줄어들어 없어지거나 못 쓰게 되는 물품으로써 종이, 볼펜, 연필, 빗자루 따위의 사무용품이나 일상물품 따위를 일컫습니다. 두 번째는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버려지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소모품을 소모하는 이유는 더 소중하고 본질적인 일을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소모품 중에 비누가 있습니다. 비누가 아깝다고 쓰지 않는다면 청결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또 회사에서 사무용품이 아깝다고 쓰지 않는다면 일은 진행될 수 없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에 차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있는 돈을 다 모아서 백만 원 조금 넘는 11년 된 폭스바겐 파사트를 샀습니다. 그때 먼저 유학하시던 분의 충고를 듣게 되었는데 참 특이합니다. 가능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운전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를 자주 밟게 되면 브레이크 패드가 닳아서 교체해야 되는데 오래된 차일수록 부품을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비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운전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습관은 몇십 년 동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운전하면서 온통 브레이크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저는 브레이크 패드를 갈아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전에는 교회명의로 되어 있는 차를 탔기에 직접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타는 차는 11년 되었는데 비로소 브레이크 패드를 갈 때가 되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끽끽 소리가 나고 느낌도 좋지 않아서 정비소에 갔더니 브레이크 패드를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자 독일에서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더 조심해서 탔으면 브레이크 패드를 오래 쓸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브레이크 패드를 바꾸는 데는 큰 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또 바꾸고 나니 굉장히 부드럽고 소리도 나지 않아서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애초에 브레이크 패드는 소모품입니다. 차는 달릴 때에 잘 달려야 하고 설 때에 잘 서야만 합니다. 브레이크 패드가 닳는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브레이크를 잘 쓰며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고작 브레이크 패드를 바꾸었을 뿐인데 요새는 운전이 즐거워졌습니다. 브레이크 패드라는 소모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비로소 운전이 재미있어진 것입니다. 참 어리석은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지구조차 하나님을 얻기 위해 써야 할 소모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환난 후 재림 직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4~25절을 보면 ‘그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환난과 재림의 묘사는 사도들을 통해서도 언급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서는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6장 14절에서는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우주 속에서 티끌 같이 작은 행성임을 압니다. 그리고 태양계에서 해와 달과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이 중력에 의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밀한 기계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완벽하게 움직이듯이, 드넓은 우주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움직이고 또한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계산하기 위해 우주상수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주를 붙들고 계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태양계에서 지구는 해와 달과 별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다른 모든 행성으로부터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생태계가 존재하고 인간의 문명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는 물론이거니와 지구를 유지하는 우주 전체가 나의 삶을 위한 소모품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지구가 나를 위한 소모품이라면 제대로 된 방식으로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브레이크 패드를 아끼기 위해서 덜 밟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비누를 아끼기 위해서 몸을 더럽게 하는 일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종말 때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소모품이 소모되었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무한함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인간이 느낄 수 있게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무한함을 보며 떠올려야 할 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우주가 무한하기에 다른 생명체가 사는 행성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물리학자들에게는 우주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겠습니다만 신앙적 관점에서 한 개인에 대해서 우주의 무한함이 갖는 의미는 곧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대한 비유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을 위해서는 사무용품이 소모되어야 합니다. 몸의 청결을 위해서는 비누가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차를 원활하게 운행하기 위해서는 브레이크 패드가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가치들은 나의 삶을 위해 바르게 소모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큰 사고란 앞서 말씀드린 환난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이란 마치 브레이크 패드를 아끼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음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일모레면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십자가에 집중되어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은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이 첫 번째 현실이 된 상황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 땅을 점령하여 성전의 번제단을 허물고 제우스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상번제를 폐지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상번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양을 번제로 바치는 의식이었습니다.
상번제는 모든 이스라엘 선민들이 어린양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 드려졌던 제사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도 상번제를 드리든지 제우스 신상을 세우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상번제는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제우스 신상을 세우듯 마음에 세상의 가치를 들여놓고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으면 마음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제우스 신상을 세우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마음이 닿는 첫 번째 현실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을 수 있으나 마음이 첫 번째로 닿는 사실만이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 아래에서 다른 모든 사실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첫 번째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닿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이 아닌 대상이 들어왔다면 제우스 신상이 서게 된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는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외아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마음자리에 외모가 들어올 수도 있고 건강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제우스 신상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제우스 신상으로 섬기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었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까지 이 세상에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마음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인가 혹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번제단을 세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에 따라 하나님을 잃을 수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환난의 내용입니다. 환난이란 무엇인가를 잃는 사건입니다. 큰 가치를 잃을수록 큰 환난입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가질 수도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잃게 되었다면 이보다 큰 환난은 없기에 창조하신 시초부터 이런 환난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의 재림은 있게 될 것입니다.
26~27절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과 그로부터 나타날 일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지구를 왜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모으는 자들은 택하신 자들입니다. 택하신 자들이라는 말씀이 다소 어렵습니다. 믿는 자들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들을 모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것처럼 승리한 자들을 모으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택하신 자들이라는 말씀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택하신 자들이란 물론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의 증거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의 자리,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의 자리와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드렸던 이유도 우리의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 대상으로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간단히 말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면 돈이 첫 번째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진 상태입니다. 이때에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돈 벌기가 틀렸으니 자녀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자녀가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제우스 신상이 서게 된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승진을 선택할 수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주식투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의 첫 번째 관심으로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근거로 선택합니다.
우리도 이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슬퍼하고 우울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녀가 형통치 않아서, 돈이 없어서, 회사에서 승진이 안 돼서, 배우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등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지구 위에 있는 것들을 마음에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눈 뜨면 지구 위에 있는 것들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도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택하신 자들이라면 이때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우울하고 짜증나는 이유를 살펴보니 마음에 제우스 신상이 서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 마음에 들어와 있는 지구 위에 있는 것들을 소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물이 마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침에 일어나면 돈 걱정부터 생겨납니다. 장사는 안 되는데 월세는 내야 되기에 걱정이 생겨납니다. 돈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돈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돈이 들어와 있는 상태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장사가 잘 되어서 집세도 잘 내고 이윤도 많이 나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재물을 십자가에서 소모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이 소모된 빈자리에는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계속 소모시키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관계를 시작하시며 처음으로 요구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치안이 부재한 시대에서 삶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었던 안정된 삶을 소모시킴으로써 그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비누를 소모시킴으로써 얼굴에 묻은 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소모됨으로써 마음은 청결해지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조차도 마음에서 버려야만 했습니다. 아름다운 아내를 지키고자 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12장 11~13절을 보면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들어와 있던 아내인 사라를 비누처럼 소모시켜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독자인 이삭까지도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22장 12절에서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입니다.
앞서 제가 자동차를 타면서 브레이크 패드가 닳을 것이 아까워서 가능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려 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호등이 보이면 일찌감치 페달에서 발을 떼고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입니다. 그렇게 속도를 줄이고 브레이크를 가볍게 밟을 수 있는 거리를 측정하느라 운전은 항상 부담스럽고 피곤했습니다. 브레이크 패드를 아껴야 한다는 율법 아래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브레이크 패드를 바꾸자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지도 않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편리함이 훨씬 컸습니다. 브레이크에 쏟았던 마음이 아깝기 그지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 위에 태어나서 얻게 된 독자까지도 하나님을 얻기 위한 소모품으로 써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 태어나서 평생 해야 할 일은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을 소모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마음자리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지구에 태어나서 지구에 있는 것들을 소모시키며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해를 만드시고 달을 만드시고 별들을 만드시며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좋아하여 번제단을 세울 것인지, 세상을 좋아하여 제우스 신상을 세울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을 얻는 소모품으로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 위에서 내게 주어진 것들을 그저 아까워하며 제대로 소모하지 못합니다. 시편 14편 3절에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지구 위에 있는 것들은 소모시켜야 하는 대상이지 마음에 담을 대상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주하는 배우자는 마음에 담기 쉬운 대상입니다. 그러나 배우자와의 관계 또한 하나님을 얻기 위한 소모품입니다. 비누나 브레이크 패드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까워하고 마음에 붙잡는 것은 제우스 신상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환난은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환란은 소중한 것을 잃는 사건입니다. 가장 크신 하나님을 잃었으니 가장 큰 환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노아홍수 때 섞여 있다가 물에 빠져죽는 것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때 가스를 마시고 죽는 것보다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제우스 신상이 서게 된 것이 더 큰 환난의 상태입니다. 자녀, 건강, 재물, 배우자, 승진 등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 26절을 보면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목격할 때에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에서도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볼 수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시간과 공간에 묶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세계 어디서든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조차 소모품으로써 제공되고 있었던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투과하여 나타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경험과도 같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실은 영이 육체의 옷을 벗고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재림을 목격할 것이며, 육체가 죽고 잠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깨어나서 예수님의 재림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지구에 있는 것들을 소모품으로 써서 하나님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제우스 신상으로 세웠던 세상의 가치들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자면 배설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하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 인간세상의 모든 일들을 망각하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좋으심 앞에서는 재물도 인기도 명예도 권력도 성공도 마음에 담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배설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재벌들만큼 돈을 모아 본 적도 없고, 대통령처럼 권력을 얻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들을 소모품으로 삼아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네 것이다”라고 확증을 해주시며,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관계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얻기 위해 제공된 소모품입니다. 내가 이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떠난 대상과 관계들을 붙잡고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갖고자 고향도 버리고 아내 사라도 버리고 독자 이삭도 버렸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재산을 지키시고 아내 사라를 지키셨으며 독자 이삭을 지키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어진 것은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한 소모품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을 가지시고 하나님 부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까지 소모품을 소중히 여기고 아까워 붙잡고 살았습니다. 환난을 당하기에 마땅한 어리석은 삶을 십자가를 통해 중단하게 하여 주시고 이 지구 위에서 주어진 모든 대상과 관계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한 소모품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소모품들을 다 사용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