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지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곳은 얼마든지 우리가 방문할 수 있는 인접 거리에 존재하며, 거기에 구축된 생태계나 거주하는 생명체들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우리의 지구와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또 다른 나조차도 그 또 다른 지구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는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건 지금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몹시 힘겨운 사람들이에요. 사랑하는 가족 또는 연인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거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거나, 인생이 밑바닥으로 추락해 더는 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현재 이 지구에서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그래서 또 다른 지구를 동경하게 됩니다.
그곳에 가면 지금껏 잘못되어 왔던 자신의 삶을 원상태로 되돌리거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죠. 이렇게 다른 지구는 일종의 낙원과도 같은 이상향으로 화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로다(브릿 말링 분) 또한 그렇습니다. 그녀는 명문대 합격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중, 잠깐의 부주의로 인해 반대편 차선에 서있던 다른 차와 충돌사고를 일으켜 한 가족을 몰살시키게 됩니다. 그녀 자신 또한 자신의 인생 속에서 무슨 일이든 실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이 느끼던 전능감에서 추락하여,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일개 범죄자가 되어버리죠.
몇 년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후, 끝없는 죄책감과 낙오감에 시달리던 로다는 결국 또 다른 지구를 방문하려는 프로젝트에 지원하여 지금 이 지구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 하고 있는 청소잡역 일도, 가족들도, 옛 친구들도 모두 그녀가 처한 현 상황을 더 비참하게 느끼게만 할뿐, 어디에서도 그녀가 진정 용서받아 쉴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러던 중, 로다는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한 가족의 생존자인 존(윌리엄 마포더 분)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덜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나 아내와 아들을 잃고 삶을 거의 포기한 채로 살고 있는 존의 앞에서, 그녀는 차마 용서를 구할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청소도우미로 자신을 소개하며 그의 곁에 머물게 되죠.
날이 갈수록, 로다의 헌신적인 봉사 덕분에 존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 회복되어 가고, 둘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로다가 또 다른 지구를 방문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날, 그녀는 마침내 존에게 그의 가족을 모두 죽게 만든 사고의 범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존이 자신을 용서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또 다른 지구로 향할지, 이곳에 머물지를 결정하겠다고 하죠.
그 결과, 존은 끝내 로다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 대신에 로다에게서 또 다른 지구로의 방문 권한을 양도받고, 어쩌면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존재할 수도 있는 그곳으로 떠나게 되죠. 둘은 그렇게 적절한 타협을 이룹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이가 서로 괴롭게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공간에 머물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존이 떠난 후 남겨진 로다는 이제 마음의 여유를 어느 정도 회복합니다. 자신에게 죄책감을 제공했던 원인이 이제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었으니, 그녀 자신은 한결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동안 방치해왔던 자신의 삶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 앞에 등장하는 것은 또 다른 로다입니다. 또 다른 지구에서 온 또 다른 자신입니다. 그렇게 두 로다의 조우를 그리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또 다른 지구의 로다 역시 같은 사고를 냈고,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로다가 용서받을 수 없었듯이, 또 다른 지구의 로다 또한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지구의 로다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이 지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이 얘기는 즉, 이곳에도, 그곳에도 로다가 찾아 헤매던 구원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 살아있을 가능성을 꿈꾸며 또 다른 지구로 떠난 존이 목격하게 될 것은, 상심에 빠져 삶을 포기한 또 하나의 비참한 자신일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마법적 세상과 같은 피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자신, 또 다른 구조로의 변화와 같은 개념을 우리는 꿈꿉니다.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신에 대한, 아트만(참나)에 대한, 낙원에 대한 추구가 이러한 꿈들에 해당되죠. 여기에 대해 영화는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변화가 실현된 다른 세계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것, 즉, 여기에 없으면 거기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대단히 불교적인 사유입니다. 모든 형이상학적 기제를 부정하고, 일상의 대지에 천착하게끔 요청하고 있는 비이원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동시에 이러한 불교적 사유는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두 번째 사실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건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떤 변화를 맞든, 결국 우리가 마주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마음의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는 스스로 만나지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로다가 아무리 존에게 용서를 받으려고 발버둥치고, 끝내 존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공했다고 한들, 그녀 앞에 나타나 끝없이 그녀의 죄책감을 조장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녀 자신의 모습입니다. 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희망을 통해 상실을 극복하고자 또 다른 지구로 떠난 그가 최종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 또한 상실의 마음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일 뿐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신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 스스로에게 용서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마음의 문제는 완결되지 않습니다. 그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몫입니다. 그 이름이 용서이든, 상실이든 간에, 오직 자신만이 그것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는 자기 처벌의 아픔을 멈출 수 있습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 또한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품은 자 또한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진 자 또한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자 또한 이미 충분히 아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픔, 아픔, 또 아픔뿐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아픔 + 아픔은 아픔의 상쇄가 아니라 그저 2배의 아픔입니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아픔이 없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거나, 또 다른 자신을 드러낸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똑같은 형상의 아픔일 뿐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이, 우리가 아파하고 있을 때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아픔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 아픔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곧 자신에 대한 용서이자 수용이기 때문입니다. 화살에 맞은 자가, 화살을 쏜 자를 비난하거나, 화살의 성분을 분석하거나, 화살에 맞은 자신의 나약함을 질책한다고 해도 그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는 동안 화살에 맞은 자는 죽어갑니다.
아픔을 멈추는 길은 자신의 아픔에 모든 관심과 정성을 갖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미 아파하는 자신에게 매질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채찍을 쥔 손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미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매까지 맞고 있는 이 존재는 얼마나 가엾은가요. 그 존재를 알아보고 거기에 손을 내미는 것이, 곧 아픔이 없는 현실을 열어가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로다가 또 다른 자신을 만났을 때 멈칫함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의 다음을 우리는 이제 응답해볼 수 있습니다. 응답은 언제나 피안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펼쳐집니다. 응답은 늘 즉시적이고 현재적입니다. 그리고 응답만이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나는 정말 힘들었고, 괴로웠고,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 참 고생 많았구나."
아픔은 아픔에 응답하는 목소리를 만났을 때 멎습니다. 아파하는 자신은 아픔을 알아주는 시선을 만났을 때 쉬게 됩니다. 이처럼 아픔이 멈추는 자리는 바로 여기입니다. 아픔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아픔을 알아주는 시선이 비치는 지금 이 자리입니다.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아픔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그리고 들으세요. 우리의 입과 우리의 귀 사이의 한뼘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가 곧 진짜 낙원에 도달하기까지의 거리입니다. 또 다른 지구(another earth)와 또 다른 우리(another us)는 이만큼이나 가깝습니다. 이미 한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