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작년 봄에 이웃에서 파초 한 그루를 사 왔다. 얻어 온 것도 두어 뿌리 있었지만 모두 어미 뿌리에서 새로 찢어 낸 것들로 앉아서나 들여다볼 만한 키들이요 ‘요게 언제 자라서 키 큰 내가 들어선 만치 그늘이 지나!’ 생각할 때는 저윽* 한심하였다. 그래 지나다닐 때마다 눈을 빼앗기던 이웃집 큰 파초를 그예 사 오고야 만 것이다.
워낙 크기도 했지만 파초는 소 선지가 제일 좋은 거름이란 말을 듣고 선지는 물론이요, 생선 씻은 물, 깻묵 물 같은 것을 틈틈이 주었더니 작년 당년으로 성북동에선 제일 큰 파초가 되었고 올봄에는 새끼를 다섯이나 뜯어내었다. 그런 것이 올여름에도 그냥 그 기운으로 장차게 자라 지금은 아마 제일 높은 가지는 열두 자도 훨씬 더 넘을 만치 지붕과 함께 솟아서 퍼런 공중에 드리웠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큰 파초는 처음 봤군!”
하고 우러러보는 것이다. 나는 그 밑에 의자를 놓고 가끔 남국의 정조(情調)를 명상한다.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 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 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珠簾) 안에 누었으되 듣는 이의 마음 위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오늘 앞집 사람이 일찍 찾아와 보자 하였다. 나가니,
“거 저 파초 파십시오.” 한다. “팔다니요?”
“저거 이전 팔아 버리셔야 합니다. 저렇게 꽃이 나온건 다 큰 표구요, 내년엔 영락없이 죽습니다. 그건 제가 많이 당해 본 걸 입쇼.” /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보는 날까진 봐야지 않소?”
“그까짓 인제 둬 달 더 보자구 그냥 두세요? 지금 팔면 파초가 세가 나 저렇게 큰 것 오 원도 더 받습니다……. 누가 마침 큰 걸 하나 구한다니, 그까짓 슬쩍 팔아 버리시죠.”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다. 이왕 죽을 것을 가지고 돈이라도 한 오 원 만들어 쓰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얼른 쏠리지 않는다.
“그까짓 거 팔아 뭘 허우.”
“아, 오 원쯤 받으셔서 미닫이에 비 뿌리지 않게 챙이나 해 다시죠.”
그는 내가 서재를 짓고 챙을 해 달지 않는다고 자기 일처럼 성화하던 사람이다.
나는, 챙을 하면 파초에 비 맞는 소리가 안 들린다고 몇 번 설명 하였으나 그는 종시 객쩍은 소리로밖에 안 듣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늘 오후에도 다시 한 번 와서
“거 지금 좋은 작자가 있는뎁쇼…….” 하고 입맛을 다시었다.
정말 파초가 꽃을 피면 열대 지방과 달라 한 번 말랐다가는 다시 소생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마당에서, 아니 내 방 미닫이 앞에서 나와 두 여름을 났고 이제 그 발육이 절정에 올라 꽃이 핀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가 한번 꽃을 피웠으니 죽은들 어떠리! 하물며 한마당 수북하게 새순이 솟아오름에랴!
㉠소를 길러 일을 시키고 늙으면 팔고 사간 사람이 잡으면 그 고기를 사다 먹고 하는 우리의 습관이라 이제 죽을 운명의 파초니 오 원이라도 받고 팔아 준다는 사람이 그 혼자 드러나게 모진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무심코 바람에 너울거리는 파초를 보고 그 눈으로 그 사람의 눈을 볼 때 나는 내 눈이 뜨거웠다.
“어서 가슈. 그리구 올가을엔 움이나 작년보다 더 깊숙하게 파 주슈.”
“참 딱하십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돌아갔다.
- 이태준,「파초」
*저윽: ‘적이’의 방언, 어지간한 정도로.
14 ㉠에 내재된 글쓴이의 태도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매정한 세태에 대한 비판
② 상대방의 인물됨에 대한 평가
③ 다양한 삶의 양상에 대한 인정
④ 바람직한 삶의 습관에 대한 강조
⑤ 약자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 강조
15 <보기>는 윗글의 글쓴이의 수필관을 정리한 것이다. 윗글을 읽은 학생 의 반응을 <보기>와 관련지어 볼 때, 그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ㄱ. 수필은 글쓴이의 습성, 취미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자연관, 인생관 등을 재료로 하기 때문에 수필처럼 글쓴이를 잘 드러내는 글은 없다.
ㄴ. 수필은 글쓴이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상, 의견, 비평 등을 솔직하게 특별한 계획이나 양식 없이 써 내려간 것이다.
ㄷ. 수필은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으로 글쓴이가 지닌 삶의 묵직한 철학을 담아내는 묘미가 있다.
① ㄱ: 파초를 기르는 글쓴이의 취미, 이익을 따지지 않는 성품 등 글쓴이의 모든 것이 수필의 재료가 되고 있군.
② ㄱ: 자연물인 파초를 친밀하게 여기는 글쓴이의 자연관을 통해 글쓴이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는군.
③ ㄴ: 파초의 가치에 대한 비평을 제시하며 우리 인간 문화의 개 선을 목적으로 하여 쓴 수필이로군.
④ ㄴ: 파초가 내년에 죽을 것이니 팔아버리라고 하는 앞집 사람의 말을 듣고, 이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특별한 양식 없이 써 내려 간 글이군.
⑤ ㄷ: 파초를 기르면서 생긴 일상의 평범한 일을 다루고 있지만, 이 수필에는 글쓴이가 지닌 생명과 인연에 대한 묵직한 철학이 담겨 있군.
도움자료
[2014 EBS N제]-(A형)
14~15
14 ① 15 ③
이태준,「파초」
이 글은 파초가 성장하면서 마당에 만들어 준 남국의 풍경에 대한 감상과 파초에 대한 인간적이고 애틋한 마음 등을 편안한 어조 로 서술하고 있는 수필이다. ‘나’는 처사의 면모를 지닌 사람으로, 앞집 사람은 세속의 논리를 강조하는 사람으로 제시된다. 이를 통해 현실의 영역에서 통용되는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으로 파초를 대하고자 하는 글쓴이의 삶의 태도가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파초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파초에 대한 애정
■ 처음: 파초에 대한 ‘나’의 마음
■ 중간: 파초를 팔라는 앞집 사람과 거절하는 ‘나’
■ 끝: 파초에 대한 ‘나’의 애틋함
14 구절의 의미 파악 ①
㉠은 오랫동안 농사일을 함께했던 소라도, 늙으면 그것을 내다 팔고 그 고기를 다시 사다가 먹는 우리의 삶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자연물과 교감하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대하는 세태의 매정함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15 외적 준거에 따른 작품 감상 ③
이 글은 파초에 대해 느낀 글쓴이의 솔직한 심정을 다루고 있는 글로, 우리 문화에 대한 언급이 간단하게 드러나기는 하지만, <보기>의 ㄴ에 제시된 수필의 특성으로 보아 이 글의 목적이 우리 인간 문화를 개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글쓴이는 일상에서 파초와 관련하여 느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① 파초에 대한 글쓴이의 경험과 정서가 이 글의 재료가 되는 것처럼, 수필은 글쓴이의 모든 것을 제재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이 글의 내용을 통해 글쓴이가 식물에게도 정을 줄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④ 파초가 내년에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파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특별한 양식 없이 자연스럽게 글에 담아낸 것이다.
⑤ 글쓴이의 일상의 평범한 일을 담고 있지만, 이 수필에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글쓴이의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