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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IX의 살과 피)
본문<요6:45~59> 우선 44~46절 읽고 나눔.
지난주에 44절을 공부한바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야 IX(헬라어 /예수 그리스도의 약어)를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근거(출처)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내가 결단하고 의지를 가지고 ㅎ님을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아주 많습니다만 벧후1:1절에서는 ‘우리와 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너희들에게 편지를 쓴다’라고 언급합니다. 즉 사도들과 같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라구요? 벧전1:2절에 나오지요?(IX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자요, ㅎ님이 미리아신 자라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나옵니다.)
놀라운 비밀을 밝히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IX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신 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ㅎ님이 예정하신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IX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기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자들을 구원하는 일을 일컬어 39절에서 밝히시듯, ‘ㅎ님이 내게 주신 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지요. 마1장의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천사의 말을 통해 밝히시고 있잖아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처럼 분명히 ㅎ님의 자기백성이 따로 있습니다. 눅2장의 수태고지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하늘에서는 ㅎ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중에 평화로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별도로 있다는 말이고, 그들을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 ㅎ님이 은혜로 믿음을 주셔서 IX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죄사함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동시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ㅎ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후3:2)에서도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 하십니다. 그렇지요? ㅎ님이 주시는 믿음이 주어지는 구별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무나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ㅎ님 은혜로 믿게 되는 것이니, 정말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ㅎ님의 은혜로다’입니다.
그런데 만일 ㅎ님의 택하심에 따라 구원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기에 따라 구원이 된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 할까요? ㅎ님의 전능성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합니다. ㅎ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 싶으셔서 아들까지 버리셨는데, 인간들이 고집을 피워서 ㅎ님을 믿지 않아 구원받지 못한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헛된 일이 되는 게 아닙니까? 지금 시점으로 봐도 75억 인구 중에 아주 소수만 IX를 믿지 대다수는 불신자들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ㅎ님이 인간의 마음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신이요, 미래도 못 내다보고 아들을 죽인 어리석은 신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가설이지요. 그렇기에 ㅎ님의 택하심에 따른 구원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ㅎ님이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택하신 자들을 미리아신 자라고 성경은 여러 군데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8:30절에서도, ㅎ님이 미리아신 자들을 역사 속에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ㅎ님의 전능성이 여실히 증거되는 구절임. 다 완료입니다. 묵시 속에서는 완성된 상태, ㅎ님이 계획했다는 것은 곧 그 결과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부르셨다’는 말은 ‘믿게 했다’는 말입니다. IX 피를 믿게 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구원입니다. 여김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진짜로 존재적인 의인이 된 게 아니라는 의도가 숨겨진 용어입니다. 의인이 아닌데 의인으로 간주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속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데, 예수님 피로 덮여져서 ㅎ님의 눈으로 우리를 보실 때, 예수 피만 보시니까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내막을 가진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의롭다 여겨주시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만일 예수님 피가 없이 나의 행함만을 볼 때는 과연 그 누가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온 평생 살면서 욕 한마디 안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죽인 착하고 착한 자라도..그런 자가 있겠습니까마는 가령 있다손 치더라도(혹시 석가모니가 그랬을까요?) 아니, 석가모니 할아버지라도 예수 피가 없으면 아담의 후손은 다 죄인인 것이고, 죄인은 자기 죄로 인해 심판받고 지옥가야 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자기 죄로 인해 절대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 성불의 경지에 올랐던 성철 스님이라는 분의 일화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23세에 출가해서 부모처자를 버리고 입산수도한 자인데 죽음을 앞두고 고백하기를 나는 석가모니에 속았고 달마대사에 속았다라고 토설하고 죽었지요. 일찍이 버렸던 딸을 찾아서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80년 동안 포교한 것(사람이 수도나 고행을 통해 선에 이르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헛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다. 죄를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유명한 말을 하고 죽었음/아마도 ㅎ님이 환상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과 거짓을 보게 하신 것 같음)
이처럼 인간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아무리 세상과 담을 쌓고 입산수도를 행한다고 해도, 인간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성철이라는 중이 8년 장자 불와(앉아서 잠자는 수행)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극기의 삶과 10년 묵언 수행이라는 기이한 일들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자기가 한 모든 말들이 거짓말이었다고 임종을 앞두고 찾아온 기자에게 실토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ㅎ님은 이방 종교인을 통해서도 죄사함의 진리를 전파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우리에겐 구원이 없다. 죄를 사해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복음이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석가모니나 성철스님이나 대단한 자들이지요. 인간의 탐심과 욕망을 억누르고 스스로 선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온 평생 입산수도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차원의 경지에 간 것 같지만 그들의 속내는 여전히 욕망으로 타오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속았다고 토설하는 장면이 안타깝고 측은하게 여겨집니다.
그들이 온 평생을 통해 인간의 행함이 허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을,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삶 속에서 ㅎ님 은혜로 내가 태생적 죄인됨을 깨닫게 되고, 그런 내가 ㅎ님 은혜로 구원까지 얻게 되었구나를 생각하면 이런 복이 어데 있겠습니까? 성도야 말로, 정말 찬송가 가사처럼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주 예수 은총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지요.
나는 구원을 위해 아무 공로도 없는데, ㅎ님의 택하심을 입고 ㅎ님의 부르심과 의롭다 여기심으로 받은 구원이니 십자가 은혜,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ㅎ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그저 감격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45~46>절을 보겠습니다.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5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라고 하니까 ‘누가 ㅎ님을 직접 보았나?’라고 오해 할 수가 있기에, 주님은 46절에서 부연 설명을 하기를 ㅎ님을 본 자는 나 예수 밖에 없다고 덧붙이고 계십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온다는 말은, 사람이 ㅎ님을 직접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ㅎ님을 듣고 배웠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54:13절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사54:13절을 보면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참 이스라엘이란 말씀입니다. ㅎ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입니다. ㅎ님의 가르침을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된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ㅎ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ㅎ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회개하고 어린 양의 피로 속죄함을 받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계명과 제사 두 항목으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고(롬7:7-9), 제사규례를 통해 죄사함의 비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1,50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율법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았다면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약속된 평안 즉 마음의 쉼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이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이같이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ㅎ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ㅎ님께서 ‘택함’(election)이라는 극약처방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배경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죽은 인간과 하나님은 관계 단절(즉 소통 단절)이라는 담이 가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귀가 주어진 자들만이 예수의 음성을 듣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장에서도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지만 저희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했다. 너희는 보는 눈, 들을 귀가 있어 복이 있도다.’ 하십니다. 누가 그런 눈과 귀를 주셨나요? ㅎ님이시지요. 이렇게 아버지의 이끄심이 없다면 그 누구도 예수께 나아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보내시는 자들 가운데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47-48절>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1절도 봅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을 들은 무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들을 향해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는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안 믿어지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지는 사람을 도와서 믿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를 가르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하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질 못합니다. 이해가 되어야 믿든지 말든지 할 텐데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에 인간의 개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일하십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 자신이 택한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믿음이 주어지지 않은 자는 제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경을 연구해도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보질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한 치의 실수도 없으십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은 영원히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자가 바로 믿음이 주어진 자입니다. 믿음을 받은 자이기에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은 오직 아버지의 계시로만 깨달아지는 아버지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1:12절에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바울: 육신의 예수 몰라, 다메섹 사건 후 3년 광야..)
롬10: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바로 복음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대다수). 이들이 보고 있고 이들이 설교하는 내용은 사도가 증거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복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방향을 정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의 일꾼을 그곳으로 보내 복음이 선포되게 하십니다. ㅎ님은 알아서 영생이 작정된 자들을 그곳에 있게 하십니다(행16장 바울이 아시아 지역에 복음전파를 계획-성령이 막으심, 그리고 유럽 쪽으로..빌립보에서 루디아 자매 만남. 마음을 여심. 성령이 하심/행13장-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게 행하는 자)
복음을 영접하는 자, 이들을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택하심과 부르심과 복음을 듣게 하심과 깨닫게 하심 모두 아버지의 가르침 안에 포함된 것들입니다. 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일 때 어느 누구도 자기 자랑을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은혜만 찬송되어질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생명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교회로 모여 이러한 아버지의 일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49-50절>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의 만나 사건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출16:2-5절>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애굽 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갖고 나왔던 양식이 다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이들이 모세를 향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출15장은 출애굽의 감격을 노래함.) 생존의 현실 앞에서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을 얻은 기쁨과 감격이 한 순간에 원망과 불평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에 매여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출애굽의 감격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그렸던 구원의 환상이 광야라는 열악한 현실 앞에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애굽에서의 노예 시절도 이것보단 나았다며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3절).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에 무슨 고기와 떡으로 배불리 먹었다는 겁니까? 고작 애굽의 명절에 고기가 헤엄친 국물만 먹었을 것이고 주려 죽지 않을 만큼의 떡만 배당받아 살던 자들이 지금 뻥을 치면서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ㅎ님께서 이들의 불평과 원망을 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 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매일 밖으로 나가 그날에 필요한 양의 만나를 거두고, 6일째 되는 날에 거둔 만나의 양을 두 배가 되게 하여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갈 필요가 없게 하십니다.
하늘의 양식이란 그들의 손으로 일해서 얻어지는 양식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만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ㅎ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치는 도구였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비 같이 쏟아지는 만나의 공급을 받으면서 ㅎ님이 얼마나 자신의 약속에 신실한 분인가를 알아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ㅎ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고자 하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안식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만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믿음의 길로 나아갔다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땅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길로는 나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매일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진 만나를 먹고 생존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실패했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은 인간의 학습이나 경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이 주어진 자는 이스라엘이 40년 경험했던 만나 표적을 경험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신비로움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로 부름 받은 자들이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만나 표적을 경험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이 그들을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치열하게 연구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학습 역시 그들을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영적인 체험과 성경 학습이 믿음과 무관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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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믿음이 많이 자랐다는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의 말을 1%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러한 것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통해 자라날 뿐입니다. ㅎ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하신 도구는 성경 하나입니다. 성경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눈길을 주어선 안됩니다.)) ...
이러한 성경의 증언을 보면서 지금 내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있는 이 큰 복에 참여한 자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큰 복을 받은 자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가 주어진 자들입니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가시는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삶의 현실에 직면해서도 낙담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천국 백성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야 되겠지요.
마지막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6:53~58> 읽고,
이 본문은 새언약을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신 IX의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ㅎ님의 구원의 시나리오는 언약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언약은 옛언약과 새언약을 말합니다. 이 차이를 아시나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구약과 신약, 즉 옛언약과 새언약을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게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역시 ㅎ님께로 받은 믿음의 유무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율법 행함을 통해 구원을 얻어보라고 주어진 구도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너희는 죽었다 깨나도 ㅎ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는 죄인됨을 깨닫고 죄를 용서 하시는 성막 제사를 통해 용서함을 받으라는 ㅎ님의 의도가 깔려 있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같은 율법과 제사 속에 감추어진 ㅎ님의 비밀을 알아먹지 못하고 율법 따로 제사 따로 열심을 내어 ㅎ님을 섬긴다고 살아왔지만 이게 헛된 수고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롬10장3절에서 밝히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ㅎ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ㅎ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ㅎ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했노라’
그렇지요? ㅎ님을 알지 못한 열심은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상실된 맹목적인 열심은 오히려 ㅎ님을 더욱 배신하는 것이니 더 큰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방향을 모른 채 열심히 배를 타고 노만 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필연코 사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제 경험, 대4학년 때 주문진 바다 썰물에 휩싸여 눈감고 헤엄치다..더 해변 반대쪽으로 떠밀려 가다가 가까스로 구조됨)
-이처럼 ㅎ님의 의도를 모르고 행하는 열심은 향방 없는 싸움이라고 바울사도는 지적함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고전11:24~25)
유월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포도주 잔을 가지시고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십니다. 행하여 기념하라는 말은 종교적 성만찬을 시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심령에 아로새겨서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옛언약이 사람의 율법 행함에 방점을 둔 구도였다면 새 언약은 IX의 십자가로 이루신 의를 말합니다. 옛언약으로 인간의 실패가 증명되었기에 이제 인간은 뒤로 빠져라, 오직 ㅎ님 홀로 구원을 이루어 선물로 주겠다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IX의 십자가 공로입니다.
유월절에 피흘려 죽는 어린양은 IX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모형이고 그림자였습니다. 어린양의 몸이 떡으로, 어린양이 흘리는 피를 포도주 잔으로 비유한 것이지요. 따라서 주님이 배설하신 유월절 만찬은 진짜 양을 잡지는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오늘 저녁에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6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저녁 6시에 끝납니다. 주님은 이 밤의 만찬 후에 잡히시고 고문당하시다가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이 날이 금요일이며 안식일 전날인 예비일입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겸 무교절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에 서둘러 장례를 치루어야 했지요, 그래서 ㅎ님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을 등장시켜서 빌라도에게 시신을 인계받아 장례를 치루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된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저주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신 IX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고 저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53장에서 이렇게 증언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래서 이같은 ㅎ님의 뜻을 다 성취하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다 이루었노라’외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ㅎ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구원을 우리는 아무 조건이나 공로 없이 받았습니다. 이 바탕에는 ㅎ님의 선택이라는 어마무시한 ㅎ님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누가 자기 독생자(외동아들)를 버리고 대신 죄인을 살리겠습니까? 그러나 이게 ㅎ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입니다.
이것에 대해 성경 요일 4장에서 이같이 증거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ㅎ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ㅎ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느니라.
ㅎ님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지나가는 청년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게 한 게 아니라, 당신의 하나뿐이 아들인 독생자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 하셨습니다. 이같은 ㅎ님의 사랑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까? 아직도 ㅎ님 앞에 나아와서 내 소원 들어주세요. 내 문제 해결해 주세요 하겠습니까?
벧전 2:9절에 이렇게 말씀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성도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라구요?
ㅎ님의 일하심-즉, 그 망극하신 사랑과 그 혜량할 수 없는 은혜로 주신 구원, 그 신비하고 아름다운 구원을 주신 ㅎ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본분이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모여서 우리에게 베푸신 ㅎ님의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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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