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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떠들지 말라! 하나님 생각 좀 듣게>의 줄거리:
청년 유두고가 3층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죽게 되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의사로서 의학적으로 유두고의 사망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유두고의 시신을 끼어 안은 사도바울은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죽었지만 생명이 있음을 알아 챘습니다. 이 이율배반이 너무 희한합니다.
떠들지 말라! 하나님 생각 좀 듣게
(사도행전 20:1~12)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10. 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떠들지 말라! 하나님 생각 좀 듣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떠들지 말라! 하나님 생각 좀 듣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에서 그 귀향길의 여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7~12절에서는 귀향 도중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과 일행이 합류한 뒤에 있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드로아는 소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에게해 연안의 항구도시입니다.
우리는 요즘 계속하여 십자가 작정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작정을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작정을 지켜나가는 사람이 가정에 있을 때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산되어 갑니다. 또 그 사람이 직장을 가면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산되어 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시시각각 그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 작정을 하는 사람을 중심점으로 삼아 몸을 통해 관계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창조적인 뜻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하면 나의 나라를 산다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다섯 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 명은 십자가 작정을 하는 사람이고, 나머지 넷은 그렇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십자가 작정을 하는 한 사람에 의한 하나님 나라와 그렇지 못한 네 사람에 의한 나의 나라가 존재하게 됩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건에 대해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각각의 나의 나라들이 동시에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명백한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었다 살아난 사건을 통해 그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나의 나라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감이 세상을 향하여 열리게 되면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느낌으로부터 좋음과 싫음을 판단하고자 합니다. 그로부터 생각과 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오감을 통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의 사건이나 사물들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들이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를 통해 들어오게 됩니다.
TV를 보면 많은 광고가 나옵니다. 이 모든 광고들은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를 노리고 제작되고 방송됩니다. 간단히 말해 “많은 사람들이 샀으니 당신도 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홈쇼핑 방송 등을 보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진행자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수량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시간이 15분밖에 안 남았는데 벌써 2,000개가 팔렸습니다. 남은 시간 안에 주문하지 않으면 이런 기회는 다시없습니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명백한 선동이고 군중심리의 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 넘어가서 실제로 그다지 필요도 없는 물건을 구입했다면 부화뇌동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생각과 말들을 주입합니다. 세상에 갇혀서 자기 생각을 갖고 살 기회조차 박탈당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말로 나의 나라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생각과 말을 받아서 남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일지라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남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에 휩쓸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삶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본문의 구절들이 그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일행과 합류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출발할 때에는 일곱 명의 일행이 있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에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거쳐서 고린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들은 사도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의 음모를 알게 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함께 배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일행만 먼저 드로아로 보내고 자신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합류한 후에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낸 후에 드로아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착하게 된 드로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어떤 사람에게 3층으로 된 집을 빌리게 됩니다. 그곳에서 머물다가 떠나게 되었는데 떠나기 전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떡을 떼고 하나님 나라의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란 해가 질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녁 무렵에 강론이 시작되었는데 이 강론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복되다, 다행이다”라는 뜻으로써 좋은 이름이지만 헬라 지역에서는 하층민에게 붙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이로부터 청년 유두고는 비천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당시 하층민들의 일상은 고됐습니다. 유두고 역시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내고 나서야 이 강론에 참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피로가 몰려와 졸게 되었고 3층 난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가 바닥으로 추락하여 죽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머물렀던 집이 얼마나 큰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유두고가 난간에 기대어 강론을 들었다는 점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강론을 듣다가 갑자기 쿵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니 청년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 자리에는 의사인 누가도 함께 있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써 제일 먼저 달려가 청년의 상태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심장은 멎었고 호흡도 없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써 청년 유두고의 죽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강론을 멈춘 바울도 내려와서 현장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죽은 시신을 끌어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외칩니다.
이 본문의 구성은 참으로 특이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바울이 유두고를 안음으로써 의사인 누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호흡과 심장 박동을 알아챘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유두고가 아직 안 죽고 살아있다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말한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살리는 장면을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던 모습과 비교해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을 살리실 때나 무덤에서 썩은 냄새가 났던 나사로를 살리실 때를 떠올려봅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는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명령하셨고, 나사로에게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바울은 유두고에게 딱히 명령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유두고를 살려낸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음을 알아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론을 하는 중에 쿵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윽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몰려 내려가게 되었고 강론은 중단됩니다. 이에 바울도 3층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 작정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드로아의 3층 집에서 중심인물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확산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로부터 나타난 바울의 반응은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에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외침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떠들지 말라고 강조한 것에서 짐작컨대 사도 바울의 인격 내부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바울이 하나님의 생각을 묻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의사인 누가는 죽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미동도 않는 유두고를 보며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유두고의 육체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장임을 알았기에 사람들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하나님의 생각이 전해져오게 됩니다. 유두고의 생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장 유두고의 몸은 죽었을지라도 아직 하나님께서 유두고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려는 생각과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의 방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선동에 넘어가고 부화뇌동하고 군중심리에 휩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죽음이 판단된 상황에서조차 먼저 이 사건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묻습니다. 유두고는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죽었지만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는 아직 유두고를 데려가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믿으며 유두고의 몸을 안고서 죽었다는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 또한 육체의 오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오감은 유두고의 죽음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육체의 오감에서 오는 판단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생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이 전달되어졌고 유두고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유두고에게 생명이 있다고 외치게 됩니다. 이렇게 보자면 본문의 사건은 사도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살려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히 듣고 전했을 뿐입니다.
봄에는 꽃이 핍니다. 봄이니까 꽃이 핀 것일까요? 꽃이 피었으니까 봄인 것일까요? 꽃이 봄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봄이 되어 꽃이 핀 것입니다. 봄이 꽃을 가져온 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사를 가져오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에만 집중하고 그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먼저 접촉하게 되면 좋고 싫음의 판단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생각과 말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세상을 접촉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진짜 나를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판단에 근거한 생각과 말들을 듣고 사는 동안 내가 아닌 남을 살게 됩니다. 유일한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유일신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황에서만 오직 나에게 해당되는 생각과 말씀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갖고 계신 유일성 또한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일한 내가 없어졌다면 이는 곧 하나님도 잃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이 오감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두고의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외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나 자신에게 “떠들지 말라!”는 명령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대찌개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전국에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에 투자해서 지점을 내게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와서 부대찌개를 먹어보고 맛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리고 점포의 자리 또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목이 좋은 곳이기에 기대가 됩니다. 아이템도 좋고 손님의 반응도 좋고 목도 좋으니 장사가 잘되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장사가 잘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이템도 별로 좋지 않고 손님의 평가도 좋지 않고 목도 별로 좋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장사가 잘되겠다는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한하게 장사가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청년 유두고는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판단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면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렸을지라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장사 아이템이 세상의 판단에는 죽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판단에서 안 죽었다면 장사는 됩니다. 반대로 아이템이 아무리 좋고 점포의 목이 좋더라도 하나님 생각 속에서 죽은 것이고 없는 것이라면 장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 집도하는 수술이니 잘 되겠지.”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이 수술에 대한 의지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를 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의사가 유명한 것에 믿음을 갖고 잘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의사가 유명하게 되기까지 그가 집도한 모든 수술의 결과 또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단지 의사가 실력이 뛰어나서 잘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헛된 믿음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봅니다. 유명한 의사가 시간이 없어서 초보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상황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잘되기로 결정하셨다면 아무리 초보 의사라도 수술을 잘 마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되도록 결정하셨다면 아무리 유명한 의사라도 수술은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뛰어난 의사라도 돌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수십 수백 가지의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변수를 제거해주시고 성공으로 이끌어 가셨기에 성공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직장에서 부장님이 직원들에게 올해 목표를 제시해줍니다. “지금까지 한대로만 하면 올해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의 판단입니까?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어떠한 결정이 이루어졌는지를 묻지 않고는 누구도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꽃이 봄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봄이 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사를 대할 때에 사건과 사물과 사람에 대하여 먼저 마음의 접촉이 이루어지면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먼저 접촉하게 되면 마음은 시끄러워집니다. 세상의 판단들이 뒤섞여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떠들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한 세상의 판단과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떠들지 말라! 하나님의 생각을 듣자”라고 명령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갈 때 취해야 할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마음이 하나님께로 먼저 가야만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건이나 사람이나 물건들보다 하나님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판단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합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세상의 경험과 지식을 판단으로 삼은 생각은 절대 금물입니다.
12절을 보면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위로라고 번역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을 다룰 때 한 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았다”는 부분의 원문을 보면 파레칼레테산(παρεκλήθησαν)로써 “위로하다”라는 뜻의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의 수동태입니다. 파라칼레오는 “옆으로”의 뜻을 가진 파라와 “부르다”의 뜻을 가진 클레오의 합성어로써 “높은 사람의 곁에 부름을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유두고가 살아난 사건으로 사람들이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다는 구절에는 사람들이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십자가 작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통하여 마음이 천국과 연결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천국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천국의 현실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현실이 아니라면 천국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드로아는 사도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방팔방에서 복음을 얻어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비로소 바울을 통해 온전한 십자가 복음을 듣게 됩니다.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이란 “삶의 어디서든지 십자가 작정을 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금 내가 연결되어 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이 현실이 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닿는 대상을 현실로 느낍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마음이 닿지 않으면 그것은 사실일 뿐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현실로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이 천국으로 가야 하고 닿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천국이 현실이 되고 천국에 마음이 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유두고의 죽음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론이 실제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확신한 유두고가 살아난 것을 보자 단번에 하나님과 천국이 마음에 닿게 되었습니다. 드로아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 곁으로 부르시고 계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입니다.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천국을 현실로 삼을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는 유두고가 죽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죽고서도 살아났습니다. 드로아 사람들은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게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고 계심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과의 연결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드로아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유두고의 사건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들은 유두고의 사건을 통해 “나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고 싶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당신 곁으로 부르고 계신다.”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드로아 사람들이 받은 위로의 정체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천국을 현실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기 원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우선적인 현실은 천국입니다. 마음이 닿은 사실만이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마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가 풀가동되고 있는 천국이 우리의 현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이 현실이 될 때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 갈 때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가 바로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식과 경험과 이 세상에서의 여건들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꽃이 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봄이 꽃을 가져온다는 평범한 진리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범사를 주관해 가십니다. 오늘도 하루종일 쉬지 않는 기도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상의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가 끝나고, 나를 위해 준비하신 유일한 하나님의 생각을 시시각각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작정이 유지되는 가운데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확산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마주하며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또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매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시며, 그로부터 일어나는 범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