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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으려면 속여야 하고 속아야 한다>의 줄거리 :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서 자신이 에서라고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들들에게 속아서 피 묻은 채색옷을 받아 들고서 편애하던 아들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이렇게 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13년 동안 요셉을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전권을 위임받은 총리가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속임과 속음이 바로 믿음의 내막입니다.
믿으려면 속여야 하고 속아야 한다
(창세기 37:29~36)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야곱은 아들들에게 속아서 요셉이 죽은 줄로 압니다. 믿음은 속임 없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속였다면 반드시 속게 되어 있습니다. 속임과 속음이 바로 믿음의 내막입니다. 굳이 믿음의 내막이라고 한 이유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안을 들여다보면 믿음은 끊임없이 속이고 속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자기가 에서라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야곱의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석하면 이 사건은 하나의 예언적 비유입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야곱의 윤리적 잘못으로 해석한다면 성경의 본의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예언이란 앞뒤 맥락 없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하여 비유적인 사건으로 만드셔서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속는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아들들의 악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인과응보라는 말이 기억날 정도로 속아 넘어가는 야곱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언적 비유입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믿음의 내막은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다르게 말하는 것이 속이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다르게 여기는 것이 속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이삭이 야곱의 음성이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버지의 장자 에서라고 속이고 우기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언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적 말씀입니다.
한편 아버지 이삭을 속인 야곱이 본문에서는 아들들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형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찢고 염소 피를 묻혀서 야곱에게 가져옵니다. 야곱은 피 묻은 옷을 보며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믿고 속아 넘어갑니다. 야곱의 마음에서는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 또한 예언적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영광의 하나님으로 마주하고 관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야곱처럼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속임과 속음이 없으면 믿음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굉장히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한정적으로 선별해서 받고자 합니다. 야곱은 마음에서 요셉이 죽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요셉은 살아있고 야곱은 속은 것뿐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애틋한 관심과 배려는 요셉의 죽음 앞에 모두 중단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가 완전히 끊어진 13년 만에 요셉은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신 것일까요?
요셉을 통해서 선민의 노예 프로젝트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아래에서 요셉은 먼저 애굽으로 내려가 총리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옆에 끼고 편애하고 관심하고 배려하고 아끼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지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자꾸 요셉의 삶에 관여했을 것입니다. 선민의 노예 프로젝트는 죄와 저주에 찌든 선민을 위한 복된 계획입니다. 이 복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적 계획을 따라 요셉을 마음껏 이끌어가셔야 했습니다. 그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 야곱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요셉에 대한 주권적 계획을 방해받음 없이 수행하시기 위해서는 야곱을 죽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야곱대로 선민이기 때문에 야곱을 향한 계획 또한 따로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야곱을 죽일 수는 없으나 야곱이 가진 요셉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끊으실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야곱을 속이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사건을 통해 형들의 악함이 드러났습니다. 마치 가룟 유다의 악함이 드러나되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대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형들의 악함은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주권적 계획 또한 진행됩니다. 야곱이 속음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실제로는 살아있는 요셉이 죽었다고 여긴 13년 동안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과 배려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당시 애굽은 완벽하게 제도가 정비되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주변을 향한 지배력을 갖춘 강대국이었습니다. 일개 유랑 민족인 히브리 족속의 열한 번째 아들이 이러한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이러한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녀들 혹은 가깝게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요셉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 탓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관심하고 배려하듯이 마음으로 그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방해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사랑과 배려 때문에 자녀나 아끼는 사람들이 별 볼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중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처럼 더 이상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보일 수 없는 상태라면, 사랑하는 대상들에 대한 아버지의 주권적 계획은 방해받음 없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과 관심과 배려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방해하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더 그들의 삶이 복된 경지로 유지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은 예언적 비유의 말씀입니다. 앞서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삭이 야곱의 음성을 의심하는 중에도 ‘나는 에서입니다. 당신의 장자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속였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이번에는 아들들에게 속아 넘어갑니다. 찢어지고 피 묻은 채색옷을 보고는 요셉이 죽었다고 속아 넘어갑니다. 이 속임과 속음이 어떻게 믿음의 내막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이란 끊임없이 속이며 속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야곱이 속아 넘어갔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이끄심은 방해받음 없이 요셉에게 온전히 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속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살아있지만 내 마음에서는 죽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와 다르기에 속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속음은 내가 속이는 것과도 무척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내가 속이는 것의 의미를 짧게나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속음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 생각함을 통해 믿음의 내막을 온전하게 파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 개의 ‘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본래의 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겠다고 계획하실 때 디자인하신 나의 모습이 본래의 나입니다. 이 ‘본래의 나’는 세상에서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붙어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판단을 따라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되더라도 내 마음이 그 상황을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있지 않고 하나님께 가 있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본래의 나’는 마음이 육체를 입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옆에 있는 상태에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가장 온전하게 이루어진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본래의 나’의 모습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나는 ‘실제의 나’입니다. ‘실제의 나’는 지금 삶의 현장에 있는 나입니다. 우리가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나타난 가장 큰 결과는 마음이 육체를 입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었다는 것은 유착이 빈틈없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대상에게 마음이 빨려 들어갑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다는 효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을 때 육체에 종속됩니다. 마음이 육체와 떨어져 있을 때 육체가 죽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육체와 떨어져 있을 때 육체가 아픈 것은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마음이 빗나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붙어야 할 마음이 땅에 있는 육체에 붙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기에 육체가 죽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습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기에 육체로 사는 삶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손해나 손실을 두려워하고 염려합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에 찌든 ‘실제의 나’의 상태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나는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육체로 만나는 것에 대해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표현해 왔습니다.
세 번째 나는 ‘믿음의 나’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생기는 새로운 나입니다. ‘믿음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 믿음이 작동하는 동안에만 성립합니다. 믿음이라는 의식 작용이 끝나면 ‘믿음의 나’는 없어집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만 표현되고 나타나고 존재하는 내가 ‘믿음의 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던 ‘실제의 나’를 죽었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살아있지만 죽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속임과 속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에서라고 여기며 주장하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또한 야곱은 요셉이 실제로는 살아있으나 죽었다고 여기며 속았습니다. 이러한 속임과 속음으로부터 ‘믿음의 나’가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6장 5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믿으면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지는 6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마음이 육체를 입고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빨려 들어가는 빗나감의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마음이 육체를 옷 입은 상태가 끝났다는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3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세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보혈로 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믿음의 나’와 ‘실제의 나’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믿음의 나’와 ‘실제의 나’의 싸움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자동으로 육체를 입은 나를 나로서 인식합니다. 쉽게 말해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거울에 비치는 나를 나라고 여깁니다. 거울을 보며 ‘많이 늙었네. 어쩌다 이렇게 쭈글쭈글해졌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곧바로 나를 의식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그 모습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에서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직장에서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심지어 예배당에서 교인들을 만나는 중에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육체를 입은 상태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의문을 제기해 봅니다. 언제 어디서나 육체를 입은 나를 나로서 의식한다면 ‘믿음의 나’인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는 언제 나타납니까? 목사님을 마주하고 있어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예배를 드릴 때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직장에서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가정에서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고, 친구를 만날 때도 육체를 입은 것이 나라면 대체 언제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는 나타날 수 있을까요? 내가 정말로 새사람이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면 실제 생활 속에서 그러한 나는 언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믿음의 나’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든 모습이 ‘실제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실제의 나’와는 다르게 내가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나로서는 육체를 입은 것이 나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옷 입었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의 나’가 아닌 ‘믿음의 나’를 주장하지 못하고 우기지 못하고 속이지 못하기에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자동으로 육체를 ‘실제의 나’를 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옷 입은 ‘실제의 나’를 나라고 여기는 경향은 자동적일 뿐만 아니라 강력하고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실제 상태와는 다른 ‘믿음의 나’를 주장하고 속이고 우기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는 삶의 어디에서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죄와 저주에 찌든 내가 ‘실제의 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와는 다른 ‘믿음의 나’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실제의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여겨야 합니다. 로마서 6장 11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제와는 다른 나를 주장하는 것이기에 속이는 것이 됩니다. ‘실제의 나’는 자동으로 육체를 입었다고 생각하기에 ‘믿음의 나’로 여기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속이고 있으니 ‘믿음의 나’는 가짜이고 허상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나’는 진리의 나입니다. 실제의 나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죄와 저주에 대해 이물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와 저주의 상태를 자연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 육체를 입은 상태를 나라고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사실도 아닙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마귀에게 속고 있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를 입고 있다는 ‘실제의 나’란 결국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자아의식입니다. 이것이 실제이기에 우리는 육체를 벗는다는 말을 하고 육체의 장막이 무너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러한 ‘실제의 나’와는 다른 나를 고집하는 것이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음성을 의심받음에도 불구하고 장자 에서임을 우기고 속이고 주장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우기고 속이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삶의 어느 현장에서도 오직 육체를 입고 있는 ‘실제의 나’만 나타나고 예수님의 몸을 입은 ‘믿음의 나’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거듭났다,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이야기는 오직 삶의 현장에서 속이고 주장함으로써만 성립합니다. 자동으로 ‘실제의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제의 나’와는 다른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가 나라고 속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속임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는 한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이야기는 교리에 갇힌 말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한 번도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로서 인생을 살아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나’는 속여야만 존립할 수 있습니다. ‘실제의 나’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육체를 입고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라고 여기는 나와는 다른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속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육체를 입은 나를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속이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속임이 없으면 곧이곧대로 ‘나는 육체를 입은 존재다.’라고 의식하고 말하게 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자동으로 나는 육체를 입은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속이는 것과 본문에서 야곱이 속은 것처럼 내가 속는 것에는 무슨 관계성이 있을까요?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실제의 나’와는 다른 ‘믿음의 나’를 우기고 주장하고 속여야 속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속는 일이 가능해져야 내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 몸이 있기 때문에 맺게 되는 모든 관계가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마음에서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면 요셉은 끝내 애굽으로 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형들이 채색옷을 찢고 염소 피를 묻혀 요셉이 죽은 것으로 유도하지 않고 형제들 중 하나가 야곱에게 귓속말로 ‘사실은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를 속이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야곱의 성질상 당장 미디안과 이스마엘 상인들을 쫓아가서 돈을 주고 요셉을 되찾아 왔을 것입니다. 설령 늦어서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더라도 애굽 전역을 수소문해서라도 요셉을 찾아내고 데리고 갈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거지가 되더라도 요셉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완전히 속아서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나’를 회복할 때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됩니다. 그때 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서 아버지를 마주 보고 계시기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내 마음은 아버지를 마주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내 마음이 하늘로 가게 되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신 상태에 참여하여 내 마음도 하나님만을 관계하게 됩니다. 이제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기존의 육체를 입고 관심과 배려와 온갖 감정으로 대하던 모든 관계들이 죽은 것이 됩니다. 다만 이것들은 요셉이 실제로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있기에 결과적으로 내 마음이 속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을 입음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란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을 때 관계하던 모든 대상들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속아 넘어갔을 때, 13년 동안 유랑민 히브리 족속의 아들인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십니다. 당시의 히브리 족속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사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유랑민 집안의 열한 번째 아들이 초강대국 애굽의 전권을 위임받은 총리가 되는 길은 달리 없습니다. 야곱의 마음에서 요셉이 계속 살아있다면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서 살아있는 요셉을 실제로 만나기 위해 찾고자 했을 것이고 결국 끌고 왔을 것입니다. 요셉을 되찾겠다고 하는 야곱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던 것처럼 아무도 야곱을 막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13년간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야곱을 죽이셔야만 했지만, 야곱도 선민이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기에 야곱도 살리고 요셉을 향한 주권적 계획도 이루시기 위해서 야곱을 속여야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속여야 합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을 때 육체로 만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없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관여하고, 내가 관심을 갖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애틋해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방해받지 않고 내려와 마음껏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이 요구됩니다. ‘실제의 나’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언제 어디서나 자동적입니다. 내가 믿음의 의식을 발동하지 않으면 저절로 육체를 입은 내가 됩니다.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다고 의식함으로써만 나는 하나님의 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의식을 켜고 유지하고 있을 때 내 마음에서는 실제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속아 넘어감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오직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만이 내 앞에 살아계신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실제의 나’와는 다른 ‘믿음의 나’를 주장함이란 실제와 다르기 때문에 속이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속이면 몸이 있기 때문에 관계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죽은 것 같이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당신 지금 그 일에 빨리 관여해야 돼. 아니면 당신 망할 거야.’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는 사업이 죽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요셉이 죽었다고 속은 사건은 단순합니다. 요셉이 죽었다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결정적인 신앙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13년 후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요셉이 사라진 그 틈을 타서 비로소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이후 요셉이 살아서 총리가 되었음을 알게 되고 총리의 아버지로서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납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바로 왕을 축복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누리는 세상에서의 모든 좋음과 영화는 복이 아닙니다. 오직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에 진정한 복이 되십니다. 저는 130년 험악한 인생 끝에 비로소 그 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가장 사랑했던 요셉을 하나님이 죽은 자로 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요셉의 빈자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 사람으로서 당신을 축복합니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는 자라는 ‘믿음의 나’를 주장할 수 없다면 믿음은 없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음이 실제입니다. 그러한 실제로부터 육체를 입은 것이 나라고 자동으로 인식되는 상황이 ‘실제의 나’입니다. 그러므로 이 실제와는 다른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있다는 ‘믿음의 나’를 속이는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사는 공간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와는 다른 나를 속이고 주장하지 않기에 육체를 입고 사는 ‘실제의 나’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쪼록 속이고 속아서 온전한 믿음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자연스럽게 죄와 저주에 찌들어 육체 입은 나를 나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 강렬한 ‘실제의 나’를 실제와는 다르게 속이며 ‘믿음의 나’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멀쩡히 살아있는 몸과 관계된 모든 대상들이 사람이든 문제든 사건이든 다 죽은 것으로 속아 넘어감으로써 그 모든 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막힘없이 내려와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한 믿음의 내용을 충만히 이룰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