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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읍 온천지구의 용배공원(장군의 전투지역인 평천지를 주시하고 있다)
용배공원 표지석 장군의 흉상 주 전투지역인 성주봉과 평천지
대표 제목 김용배 준장
●작 성 자 : 전쟁기념관 ●감 수 자 : 전쟁기념관
●발 행 일 : 2004/10/18 ●갱 신 일 : 2004/08/04
요약 정보
● 한문 : 金龍培 ● 생몰연대 : 1921. 4. 17. -1951. 7. 2.
● 출신지역 : 경북 문경 ● 최종계급 : 육군 준장 ● 상훈내용 : 태극무공훈장
● 참고문헌 :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 영웅,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1집, 세월의 이끼에 가려진 보석
상세 설명 (※ 약력)
*1921. 4 경북 문경 출생 *1934. 4 호서남보통학교 졸업(제5회)
*1948. 4 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제 8연대 작전장교 *1949. 7 제 6사단 7연대 1대대장
*1950. 7 육군중령 *1951 제 6사단 제 19연대 부 연대장
*1951 제 6사단 7연대 부연대장 *1951 제 7사단 5연대장
*1951. 7.2 전사(양구지구) *1951. 10. 육군 준장(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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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21년 4월 17일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 흥덕리에서 출생한 김용배(金龍培) 장군은 호서남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가 되던 1935년에 고향의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 현립(縣立)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비를 조달하지 못한 그는 졸업을 1년 앞두고 학업을 포기한 채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고향에서 가사를 돌보던 그는 1938년 12월 일제의 의해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나남(羅南)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26연대에서 3년 6개월간 복무하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일제의 최후 발악적인 제물로 1945년 6월 일본 관동군에 재소집되어 복무하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해방을 맞이한 그는 해방 조국의 간성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국방경비사관학교 제5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후 1948년 4월 군번 10828의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보병 제8연대에 배속되어 작전장교로서 산악전 연구에 몰두하던 중 1949년 8월 15일 육군 소령으로 진급되어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제7연대 1대대장으로 그는 오대산 지역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유격대를 소탕하는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제7연대의 예비로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1950년 7월 4일 충청북도 음성군 동락리에서 제7연대는 북한군 제15사단 예하의 48연대를 기습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개전 이후 국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로서 북한군의 음성진출을 1주일간 지연시킨 전투였다. 7월 7일 제7연대는 이 전투의 공적으로 개전 이후 최로로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하는가 하면 연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였으며, 따라서 김용배 소령도 육군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1951년 1월 20일 제6사단 19연대 부연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된 그는 3월 10일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전보되었으며, 6월 20일에는 육군 대령으로 진급과 함께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영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1년 7월 2일 강원도 양구군 북면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던 중 적의 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 31세에 불과했다. 용감하고 침착하면서 대범한 지휘관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김용배 장군은 6.25전쟁 기간 내내 최전선에서 뛰어난 지휘 통솔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정부는 그의 살신보국 정신과 불굴의 투혼을 기리기 위해 육군 대령에서 육군 준장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1951년 9월 10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52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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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
김용배 육군 준장은 1950년 7월 5일부터 10일까지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음성전투에 참가하여 발군의 전공을 수립하였다. 동락리전투로 불려지는 이 전투는 한강방어선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국군 부대들이 평택과 안성으로 집결하고 있을 때, 원주에서 충주로 남하한 제6사단 7연대가 이천-장호원-충주로 이어지는 3번 도로 축선을 따라 남진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호원 방면으로 진출하던 중 음성 북방의 동락리에서 적의 선두부대인 제48연대를 기습, 격퇴하고 남침을 지연시킨 공세적 방어전투이다. 제1대대는 이 전투에서 보현산을 야간에 점령한 후 배후공격을 가하여 패주하는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45㎜ 대전차포 등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1951년 7월 12일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양구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하면서 작전을 지시하던 중 지근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 타의 귀감이 됨으로써 1951년 9월 10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5호)을 수여받았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적으로 남침을 강행하자 국군은 차령산맥을 연한 선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계획하였다. 1950년 7월 4일부터 10일 사이에 제6사단 7연대와 제1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과 일전을 벌인 음성지구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이 중앙부에 형성된 분지로서 지리적으로나 교통상의 요충이었던 까닭에 피아간에 이곳의 선점(先占)이 곧 중부지역 제압의 관건으로 보고 쟁탈의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음성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이 도착하기에 앞서 음성 전방에서는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 7연대가 엄호부대로서 북한군 제15사단과 접촉 중이었다.
7월 4일 충주, 장호원 방면으로 남진중인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고 장호원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은 제7연대는 이날 밤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출발시켰다. 제2대대로부터 동락리 부근의 조우 상황을 보고 받은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적이 이미 무극리 및 생극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다음날 아침 1개 대대를 급히 진천으로 투입하여 이천 방면에서 철수하고 있는 제19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장은 제2대대를 진천으로 전환토록 하고 제1대대로 무극리를 그리고 제3대대로 생극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반면에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초 제2군단 예비대로 있다가 3일 장호원으로 투입되어 무극리에 제49연대, 생극에 제48연대를 전개하고 제50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여 음성 돌파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제15사단은 10,000여 명의 병력과 장갑차 20여 대 등 많은 병력과 각종 장비에도 불구하고 훈련 정도가 낮고 전투경험이 없는 부대였다.
7월 5일 쌍방은 기름고개와 동락리에서 조우하였다. “무극리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임부택 연대장의 명령을 받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06시에 부대를 집결지에서 출발시켰다.
제3중대 3소대장 이상우 중위가 지휘하는 정찰대가 음성 서북쪽 3㎞에 위치한 소여리를 지나 일명 기름고개라 불리는 유현(油峴)으로 접어들 때, 고개를 넘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였다. 정찰대장 이 중위는 정지신호와 함께 차량을 우측 숲속에 은폐시키고 대원들을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언덕 위로 배치하여 접근하고 있는 무리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다. 무리의 선두에는 자전거를 탄 군인과 사복차림을 한 몇 명의 사람이 앞장서고 1개 중대 병력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찰대가 피아 확인을 위해 망설이는 동안 무리는 100m 거리로 접근하였고,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쓴 모습으로 보아 북한군이 틀림없었다. 500m 후방에 있는 제3중대 본대에 보고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이 중위가 사격명령을 내리자 대원들의 사격이 적에게 집중되었다. 기습을 당한 적은 퇴각을 시도하였으나 제3중대가 발사한 60㎜ 박격포탄으로 인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어 본대가 가세할 즈음에 적은 40여 구의 시체만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이후 약 3시간이 경과하여 제1대대의 주력이 기름고개의 정상 부근에 이르자 패주한 적의 본대로 보이는 1개 대대 규모의 적이 기름고개 서쪽의 507고지인 보현산 동쪽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포격을 가하면서 제1대대의 전진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로 인해 제1대대는 연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기름고개 동쪽의 385고지 일대에 포진하여 그들과 대치하였다. 18시경에는 음성 북쪽 4㎞ 지점에 위치한 용산리로 전진한 제2대대와 연계하여 적의 야간 침투에 대비하였다.
7월 6일 날이 밝아오자 교착된 기름고개의 동과 서에서 총격이 한층 가열되었다. 연대장은 04시를 기해 제1대대와 제2대대의 공격을 재개시키고 무극리의 확보를 명하였다. 각 대대는 지난 밤 사이 적이 알지 못하도록 간헐적인 사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제1대대가 보현산 북단부의 376고지를, 제2대대는 385고지를 각각 확보하고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04시 약정된 신호에 따라 제1대대와 제2대대 그리고 제2포병중대는 각종 화기의 화력을 보현산으로 집중하였다. 이에 적도 385고지를 향해 각종 화기를 집중하였지만, 아군의 배후사격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기회를 잡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81㎜와 60㎜ 박격포로 계속 제압토록 하고 관측장교로 하여금 105㎜의 포격을 346고지 북향으로 연신시킨 다음 제1중대를 우일선에, 제2중대를 좌일선으로 하여 보현산을 목표로 반격토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 고지를 포기하고 346고지 방향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제1대대는 공격을 개시한지 1시간도 못되어 보현산을 점령하고 제2대대와 제2포병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12시경 무극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는 적 연대 규모의 반격을 받고 무극리 남동쪽에 위치한 백야리의 351고지에 진지를 급편하고 방어태세에 돌입하였다. 제1대대는 이 전투에서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획하였으며, 45㎜ 대전차포 등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제3대대도 조우전에서 적의 압력이 강해지자 철수하여 다음날 가엽산 남쪽 290고지를 점령하였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중앙지역의 방어력 강화를 위해 예비대인 제2대대를 동락리 남쪽 부용산 일대에 투입하고, 제1대대에는 제19연대 2대대를 지원.배치하여 백야리에서 적을 저지토록 하였다.
한편 동락리에 진입한 적 제48연대는 제3대대가 철수한 것으로 판단, 6일 밤부터 이동대형을 취하지 않고 경계대책을 소홀히 하였다. 정찰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제3대대장은 부대를 즉각 310고지, 용원리 부근으로 이동시켜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날이 밝을 무렵 정찰활동에 나섰던 제3대대 9중대가 용원리 부근에서 적의 선두를 공격하자 적은 소규모의 국군이 저항하는 것으로 판단, 첨병중대만을 공격에 투입하고 주력은 차량에 탑승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기회를 잡은 제3대대 주력은 적을 측방에서 공격하였다. 이 무렵 동락리 일대에서도 제2대대가 적을 기습공격하고 있었다. 부용산 일대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제2대대는 동락리 앞 도로에 병력을 수송하고 있는 적 차량을 관측하고, 일제 약진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방심하고 있던 적은 제2대대와 제3대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차량과 장비를 유기한 채 분산.도주하였고, 그들 중 상당수가 아군의 추격을 받고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동락리전투에서 제7연대는 적 제48연대를 기습공격하여 군수참모를 비롯한 적 132명을 포획하고 각종 포 54문과 차량 75대 등 수많은 장비를 노획하였을 뿐 아니라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도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7연대의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전사의 귀감으로 기억되야 한다”고 전승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제6사단 7연대가 전개한 동락리전투는 개전이래 패배감에 젖어있던 국군에게 자신감을 안겨 준 가장 통쾌한 전투였으며, 북한군의 음성 진출을 1주일이나 지연시킴으로써 국군이 진천-음성-충주로 이어지는 저지선을 형성,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다 준 의미 있는 전투였다. 제7연대는 이 공로로 대통령 부대표창과 연대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기록을 세웠으며, 김용배 소령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그 후 제6사단 7연대 1대대는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음성 부근에서 적의 남하를 10일간 저지하였고, 용기동과 군위-의흥, 신령지구 등에서 적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총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후 조림산지역에서 적을 격퇴하고 단양-충주선을 따라 진격에 나섰다.
10월 6일 38선을 돌파한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화천-김화 축선으로 진격, 원산을 점령하고 계속하여 성천-순천-개천-희천으로 북진하였다. 제1대대는 초산 남쪽 6㎞ 지점에서 저항하던 연대 규모의 북한군 혼성병력을 2시간에 걸친 교전끝에 격퇴하고 초산에 돌입하여 10월 25일 14시 15분에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리하여 그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만에 한만국경선에 가장 먼저 도달한 최선봉부대의 명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명령을 받은 제1대대는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극적으로 탈출, 개천에서 사단 주력과 합류하였다. 1951년 6월 제7사단 5연대장에 임명된 김용배 대령은 1951년 7월 2일 양구 북면 토평리지구에서 중공군 제5군단 예하의 1개 연대와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앞두고 최전선 예하부대를 방문하여 현장지도 중 지근거리에서 작렬한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하였다.
1. 경과보고 2. 김용배 장군 약력 3. 추모비문 4. 김용배 장군 회고담 5. 건립기
2000. 1. 21 :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으로 향토출신 호국인물, 참전용사 등의 명예 선양사업 결의
2001. 1. 20 : 장군의 서거 50주기인 7월 2일에 맞춰 흉상 건립키로 결의,
“김용배장군 추모사업 추진위원회”구성
2002. 2. 26 : 실무위원회 1차회의 개최, 자료수집 및 관계기관 협조요청
2001. 3. 05 : 전국 동상 현장 답사에 착수
2001. 4. 03 : 문경시청에서 각급 기관단체와 보훈단체, 시민 등이 참여한 연석회의. 건립장소 등 논의
2001. 4. 09 : 건립장소, 흉상규모, 추모비문 등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
2001. 4. 16 : 흉상조각 의뢰(엄태정 교수), 추모비문 의뢰(김안제 박사), 글씨 의뢰(서예가 조용철 선생)
2001. 7. 02 : 문경시 문경읍 하리 온천지구 내에 흉상 및 추모비문 건립
출 생 : 1921년 4월 18일 경북 문경시 호서남면 흥덕동
학 력 : 호서남 보통학교, 日本山口懸立農業學校
군 경력
- 1948. 4 육군사관학교 제5기 졸업(군번 10828)
- 1950. 6. 25 당시 소령, 6사단 7연대 1대대장
- 1950. 7. 07 중령 특진(음성 무극리 전투공로, 전장병 특진)
- 1951. 6. 08 7사단 5연대장 부임
- 1951. 6. 12 대령 진급
- 1951. 7. 02 전사(양구북방 군령현 토평리 전투)
묘 지 :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52 (산양면 반곡리에서 이장)
전투경력
- 1950. 6. 25~7. 4 6사단 7연대 1대대장, 춘천-홍천-신림
- 7. 4 ~ 7. 10 음성 무극 동락리 전투에서 개전 이래 최대 전과로 연대 전장병 1계급 특진(중령으로 특진)
- 7. 13 ~ 7. 16 문경 백화산, 분지리, 옥녀봉, 황학산, 성주산, 평전치
- 7. 19 ~ 7. 28 점촌-유곡-가은 뇌정산, 옥녀봉, 조봉, 불정산, 수정봉에서 격전
- 8. 02 ~ 8. 12 의성(용기동)
- 8. 13 ~ 8. 29 군위, 의흥(불노동)
- 8. 30 ~ 9. 15 신령(조림산, 화산)
- 9. 15 ~10. 6 신령, 원주, 춘천(조림산-충주-원주-화천)
- 10. 12 ~10.22 금화, 원산, 영변(금화-원산-양덕-성천-개천-영변)
- 10. 23 ~10.26 초산(압록강 제1착 선봉부대)
- 1951.1. 4 ~3.22 1.4후퇴 철수작전(광주-용인-오산-장호원-제천-삼척)
- 3. 22 ~ 4. 06 춘천 서북방
- 6. 07 ~ 6. 12 7사단 5연대장 군량현(마석봉 757고지) kansas선(6.8 연대장, 6.12 대령진급)
- 7. 02. 13:00 전사 (양구북방 7㎞ 토평리에서 전투지휘중 적포의 직격탄으로 전사)
추모하고 있는 장군의 후배인 호서남초등학교 학생과 모교 엄00 교장
서훈기록
- 1950. 12. 30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 1951. 10. 15 태극무공훈장
김용배장군은 서기 1921년 신유(辛酉) 4월 18일 문경시 호서남면 흥덕동 665번지에서 김복진(金福鎭)과 경주손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시니 시조 김녕(金寧) 김공시흥(金公時興)의 29세손이시다. 장군은 1934년 호서남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산구현립농업학교(日本山口懸立農業學校)로 유학하셨으며 1941년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원분(元分)과 결혼하여 슬하에 창후(昌厚) 송조(松朝)의 1남1녀를 두시다. 해방을 맞은 조국은 온 국민과 기쁨과 희망이 컸으나 사회는 매우 혼란하였던 바 장군은 장차 조국의 간성이 되어 헌신코자 군문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입교하여 군번 10828번을 부여받고 1948년 졸업과 동시에 육군소위로 임관되시다.
1949년 8월에는 소령으로 승진되어 제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보임(補任)되어 강원도 오대산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시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최전방 대대장으로서 초전을 분투하고 춘천, 홍천, 원주, 신림, 음성 등지의 전투에서 연일 연전고투 하였으며 특히 1950년 7월의 음성전투에서는 동 부대가 최대 전과를 올리게 되어 개전 이래 최초로 부대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하는 사상초유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장군도 중령으로 특진하시다. 장군의 고향인 문경지역 전투에서는 주력부대장으로서 이화령을 지나 백화산, 분지리, 옥녀봉, 황학산, 성주산, 평전치 등과 뇌정산, 옥녀봉, 조봉, 불정산, 수정봉 등지를 연하는 선에서 15일간이란 긴 기간에 걸친 유례가 드문 격전중 용전분투 끝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 지연시켜 국군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시다.
때는 바로 촌각이 황금과도 같은터이라 그 공훈의 혁혁함은 말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장군의 고향수호에 대한 절대적인 애향심 발로의 일면이라고 보아진다. 이어 남하하면서 영천 신령 등지의 최후의 격전을 거쳐 상주, 문경, 단양, 충주선과 화천 금화선을 거쳐 계속 북진하여 원산을 탈환하고, 1950년 5월 25일 오후 2시 15분에는 최북단 초산에 최선봉으로 진출하여 압록강에 태극기를 게양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동안의 공훈으로 화랑.충무.을지무공훈장을 받았으며, 1951년에는 제6사단 19연대 및 7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하고 동년 6월 12일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전군에서 가장 전통이 빛나고 명성이 높은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하시다.
때마침 북진중이던 동연대를 지휘하여 연일 연전연승하면서 춘천 북방까지 진격하여 강원도 양구군 군량리에서 중공군 제5군단 1개연대와 교전하게 된 토평리 전투에서 진두지휘중 적의 직격탄에 의하여 장열히 전사하시니 때는 1951년 신묘(辛卯) 7월 2일 오후 1시 40분이었고, 장군의 나이 방년 31세이셨다. 국가는 동년 10월 5일 장군의 높은 공을 기려 육군 준장으로 추서하고 이 나라 최상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제7사단에서는 북한강에 건립한 교량을 용배교라고 명명하다.
장군의 유해는 잠시 양산 통도사에 안치하였다가 후일 문경군민장으로 선산인 산양면 반곡리로 이장하였으며, 1972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하여 영면(永眠)케 하다.
장군은 과묵침착한 성품에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탁월한 전투지휘력을 갖춤으로서 상하동료로부터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은 명실공히 용지를 겸한 덕장으로서 조국과 고향을 사랑하고 수호한 참된 군인이요 애국자이시다.
장군은 동난발발 이후 전사하실 때까지 13개월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진중에서 오로지 전투지휘만을 하셨으며, 6.25동란중 일선 연대장인 대령으로서는 유일한 전사자이기도 하며 그가 세운 전투공적과 호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국가는 호국의 인물로 지정하여 온 국민과 함께 추모토록 하였으며, 이는 6.25동란 기간을 망라하여 호국의 인물로 지정된 6명중 한 분이시기도 하다.
장군의 숭고한 애국심과 호국의 헌신은 청사에 창연히 빛날 것이며, 문경시민을 위시한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져 오래도록 우리가 나아갈 바 참된 등불이 되시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사표가 될 지어다. 우리의 오늘의 영광과 안녕이 장군과 같은 호국의 수호신 음덕임을 회상하면서 백척간두의 조국과 고향을 수호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강력한 적에 맞서 신명을 바친 격전장인 이곳 조령산하 고향땅에 모든 기관과 시민의 뜻과 정성을 모아 장군을 기리는 상과 추모의 비를 세우고 삼가 우리 모두 옷깃을 여며 장군의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비나이다. 바라건데 이 곳 주흘산 아래 우뚝서시어 생전에 사랑하던 고향 문경과 조국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영이 이루어지도록 길이길이 보살피고 지켜주시는 영험한 수호신이 되소서.
서기 2001년 7월 2일
장군 서거 50주기에 즈음하여
이대용(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 저서 중에서
이 글은 월남이 패망할 당시 주월공사로 계시다가 공산 베트남정권에 의해 불법억류 돼 5년여간 갖은 고초를 이겨내고 극적으로 송환되신 이대용장군(현,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장)이 그의 저서에서 6.25전쟁 발발 이후 김용배 장군께서 산화하실 때까지 가장 가까이서(당시 중대장) 보필하면서 장군의 투철한 사명감과 애국충정, 불굴의 의지를, 그리고 참군인의 표상이요, 전쟁영웅으로서의 삶과 인간적인 면까지 장군의 진면목을 진솔하게 담고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 실어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어느 군인의 반액 인생
전쟁기념관 앞에서
서울시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 정면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호국추모실이 나온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수호를 위하여 목숨바쳐 용전분투하신 선열 중에서 뽑은 스무 분의 생전 모습을 담은 상반신 동상이 양쪽에 열을 지어 안치되어 있다. 그 중 오른쪽 줄의 네 번째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새겨져 있다.
김용배(金龍培) 준장(1921.4.17~1951.7.2)
경북 문경(慶北 聞慶) 출생, 육사 제5기로 임관. 1950년 6월 제6사단 제7연대 대대장으로서 춘천전투(春川戰鬪) 및 음성전투(陰城戰鬪)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여 지연작전(遲延作戰)을 성공시켰으며, 1951년 제7사단 연대장으로서 군량리전투(軍糧里戰鬪)시 전사(戰死), 1계급 특진(特進)과 태극무공훈장(太極武功勳章)이 수여됨.
나는 위의 글이 그 분을 알리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분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날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대대를 이끌고 북한 공산군을 맞아 싸움을 시작하여, 1951년 1월 6일까지 계속 제1대대장으로서 하루도 최전방 대대장 자리를 뜨는 일이 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적탄에 부상을 입은 일이 있지만, 후방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을 거부하고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그 분이 혁혁한 공훈을 세운 전투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 중 치열한 격전을 벌인 전투는 춘천전투, 음성전투뿐 아니라 이에 못지 않는, 아니 이 전투들보다도 더 격렬했던 낙동강전투· 신령화산전투· 지촌리전투· 복계전투· 양덕전투· 구장전투· 초산전투 그리고 중공군과의 풍장전투· 가창지구전투 등이 있고, 이 외의 소규모 전투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분은 소양강에서 낙동강까지, 그리고 이어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그리고 다시 압록강에서 남한강까지, 그 후는 남한강에서 소양강 북쪽 양구까지를 질구하면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내가 그분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5월 15일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와 동시에 원주에 있는 제8연대로 파견되어, 육사생 교육대에 들어가서 기초교육을 받을 때, 김용배 소위는 구대장 겸 교관이었다. 그 당시는 육사생들이 태릉에 있는 본교에서 교육받기 전, 각 연대에 25명씩 파견되어 위탁교육을 3개월간 받게 했다. 각 연대는 그 연대에서 가장 우수한 위관급 장교를 선발해서 육사생 교육을 담당케 했다. 따라서 김용배 소위의 우수성은 이때 이미 입증된 셈이다.
1948년 11월 11일, 내가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어 부임한 곳이 공교롭게도 내가 기초위탁교육을 받던 제8연대였다. 그래서 그분을 다시 만났다. 1949년에는 그분이 발탁되어 제8연대 작전주임이 되고, 나는 그분 밑의 작전보좌관이 되어 함께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분이 또 발탁이 되어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 간 후, 나를 전입요청해서 나는 그분 밑의 제1중대장이 되었다.
그분이 육군 소위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그분이 주번사관 근무를 하고 있는 어느 날 밤, 심심해 하던 황필주 중위가 주번사관실에 놀러갔다. 주번사관실에 들어서자마자 장나기가 발동한 황 중위는 주번사관실에 놓여 있는 칼빈 소총을 재빨리 들어, 만일 공비가 이렇게 총을 얼굴에 겨누면서, “손들엇!”하면 어떻게 대항하겠냐면서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실탄이 장전돼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꽝”하는 총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당긴 황 중위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총탄은 귀신이 재주를 부리듯 김용배 소위의 눈 옆 살점을 뚝 뜯어가면서 뼈를 살짝 건드리며 지나갔다. 총에 맞은 주번사관 김용배 소위는 손 바닥으로 상처를 꽉 눌러 지혈을 하면서 “어허!”하며 서 있었다. 현장에 달려간 장병들은 김용배 소위의 대담성과 침착성에 모두 혀를 찼다.
이러한 그분의 용감성과 침착성, 그리고 뛰어난 지혜와 성실성은 싸움터에서도 늘 돋보여, 사단장 김종오 준장, 연대장 임부택 대령으로부터 무한한 신임을 받았으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1950년 7월 9일에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을 했다. 이때 그분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 대부분은 육군 대위였다. 김용배 대대장은 맑은 물, 흙탕물을 모두 포용하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대대장 밑에 있는 장병들은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과 같이 모두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예외적으로 겁많은 제2중대장 오 대위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 대위는 전술적 지식도 있고 평상시에는 중대원 교육훈련을 잘 시키고 모든 일을 열심히 하여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7연대에서 가장 유능한 중대장으로 손꼽히고 있었으며, 연대장과 대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과 전투를 하게 되자 그는 항상 꽁무니를 빼며 후퇴를 임삼았다. 김용배 중령은 오 대위의 담력을 길러주고 전투에 쓸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워 보려고 애를 써서 꽤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타고난 천성을 완전히 바꿔 놓지는 못했다. 1950년 8월 30일, 전투가 치열해지자 오 대위는 바위에서 넘어져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연락병에게 남기고, 무단이탈하여 후방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그래도 자기를 따뜻하게 인도해 준 김 중령을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다른 못된 장교들처럼 마산이나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에 가서 폐결핵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거나, 멀쩡한 맹장수술을 받거나 하는 따위의 요령을 피우지 않고, 최전방 일선에서 약 12km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에 나타나서 대죄(待罪)하며 근신하였다. 제1대대 장교들 대부분은 오 대위를 제1대대에 불러다가 총살이라도 시키는 것이 군기확립상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김 중령은 그를 잘 타이르고 용서하여 일선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오 대위는 상황도도 잘 그리고 작전명령도 잘 작성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1950년 9월 16일, 김 중령은 대대병력을 이끌고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 동쪽 능선으로 올라가서 적군과 전투하고 있었다. 산에 올라 오느라 땀이 비오듯 흘러서 잠시 철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는 순간,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났다. 적탄이 김용배 대대장의 머리 윗부분을 때리며 지나갔다. 정면에서 날아온 소총탄이 이마 위 머리 중앙을 7~8cm의 긴 자국을 남기며 머리가죽을 벗기면서 유성같이 지나간 것이다. 만일 1cm만 아래에 맞았다면 머리가 두 갈래로 터졌을 것이다. 머리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대장님, 속히 병원으로 가시지요. 피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처가 꽤 큰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나, 김윤환 대위, 그리고 주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권했으나, “아냐, 괜찮아. 만져 보니까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하며 위생병으로 하여금 약을 듬뿍 바르게 하고 붕대를 두둑히 감게 한 후, 철모는 못 쓴 채 산 위에서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하 장병들은 저렇게 훌륭한 대대장을 따르며, 언제든지 나라 위해 이 한 목숨 깨끗이 바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했다.
이와는 대조적인 불미스러운 일이 6.25 초기에 서부전선에서 일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들의 회고록으로 1988년 발간된 “노병들의 증언” 중에 안태갑(安泰甲) 장군(6.25 초기 제8연대 중대장)이 증언하고, 또 그 증언을 더욱 구체화하는 그의 후일담에 의하면, 수도지구방위 임무를 맡고 있던 제×연대장 s중령은 전투가 치열해지자 몸의 급소가 아닌 부분을 쏴서 자해를 하고, 마치 적탄에 부상당한 양 속임수를 써서 후방병원으로 후송되어 교모하게 싸움터를 이탈했다고 했다. 연대장의 비굴한 행위가 전해지자 연대 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혼란이 일어나 분산되어 연대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대 총병력은 겨우 1개 대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상부명령에 의해 대대장 정승화 소령은 이 병력을 이끌고 제18연대로 가서 제3대대로 편입됐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공비토벌작전에서 용맹을 떨친 제×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해산되었다. 문제는 s중령은 제3공화국 시절, 육군대장으로까지 진급하여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고 안태갑 장군은 증언하고 있다. 매우 잘못된 인사관리였다.
추모하고 있는 장군의 후배인 호서남초등학교 학생과 모교 엄00 교장
역전의 명수
1950년 10월 5일 이른 새벽,제7연대 제1대대는 춘천을 출발하여 38선 북쪽에 있는 말고개에 가서 제2연대 1개 대대를 초월하여 화천을 목표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말고개에는 이미 제2연대 병력이 진출해 있으며, 춘천에서 그곳까지는 북한 공산군이 한 명도 없다는 통보를 제2연대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마음놓고 말고개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에게 지시하여 대대 장병들이 새벽 식사를 끝내는 대로 약 1시간 후에 대대 병력을 이끌고 말고개로 도보행군으로 전진해 오라고 하고, 대대 작전관·대대 정보관·대대 통신장교·예하 4개 중대의 중대장들·4개 중대의 무전병들 및 중대장 연락병들, 합계 30여명을 인솔하고 우이동을 출발하여 어둠 속에서 춘천-화도 가도를 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제2연대 1개 대대는 말고개를 점령하고 있지 않았다. 북한강 서쪽에서 말고개를 점령하기 위하여 야간 진격을 한 제2연대 1개 대대의 대대장은, 군수계통에서만 근무해 전투경험이 없는 석 소령이었다. 육사 5기생인 석 소령은 지도를 잘못 판독하여 말고개에서 서남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엉뚱한 고지를 점령하고, 그 고지가 말고개인 줄 알고 상부에 보고를 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대대장 일행은 말고개 남방 약 4킬로 지점까지 태평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넓은 도로는 커브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구부러졌다가 다시 북으로 구부러진 후 북으로 뻗고 있었다. 어둠은 점차 걷혀가고 날은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대대장 일행이 커브길에 다다랐을 때, 일행들은 “앗!”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날려 그 곳을 피하는 돌발행동을 취했다. 북한 공산군 기관총이 3~4미터 앞에서 총구를 우리에게 향하고 있었다. 기관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는 것까지 보였다. 북한 공산군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그리고 탄약수들이 그 기관총 호 속에서 상체 일부를 노출시키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기관총 방아쇠를 당기면서 총구를 좌우로 흔들면, 우리는 모두 삽시간에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 돌발적인 상황에 몸을 긴급히 피해 살아남으려 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M2 칼빈 소총을 어깨에 멘 채 북한군 기관총구를 피해 몸을 날렸다. 이때 “손들엇!”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나는 그때서야 어깨에 멘 칼빈 소총을 내리면서 북한 공산군 기관총구 쪽을 돌아봤다. 김용배 대대장은 적의 기관총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우선 손들라고 소리쳐서 소리로 기선을 제압하고, 겁에 질린 북한 군인들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날 때 허리에서 권총을 뽑아든 것이다.
김용배 대대장의 손이 허리의 권총을 뽑으러 가면서 동시에 “손들엇!”한 것이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이것을 엄격히 순서로 따지자면 대대장의 “손들엇!”소리, 이 소리에 겁에 질려 북한 공산군인들은 일어서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그 다음에야 대대장이 허리에서 권총을 빼서 북한 공산군인들 쪽으로 향한 것이다. 그 대담한 용감성과 지혜로운 순발력. 나는 ‘백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저히 저 분을 따라갈 수는 없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기관총 진지에 있던 북한 공산군인들을 모조리 포로로 하고 그들을 심문해 보니, 그 일대에는 북한 공산군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김용배 중령은 제1대대 주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말고개로 전진했다. 말고개를 점령한 제1대대는 신포리 북방에 있는 고지를 공격했다.
북한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은 마치 닭이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주둥이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닭의 배 부분과 목 부분과 주둥이 밑부분을 스치며 흐르는 냇물이 사창리에서 흘러내리는 지촌천이다. 지촌천은 닭주둥이 끝부분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이 닭 주둥이 끝부분을 제3중대가 이날 오후 늦게 점령했다. 제2중대는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포리 서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고 측방으로부터 아군의 후방으로 북한 공산군이 역습해 올 것을 대비했다. 북한 공산군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이 일대를 방어하고 있는 북한 공산군은 1개 여단 병력이며, 닭의 목부분 고지에 북한 공산군 여단장이 나와서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어두운 새벽, 김용배 대대장은 대대본부·중화기 중대·제1중대를 이끌고 닭주둥이 끝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제3중대 진지로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용배 대대장의 도착과 때를 같이하여 북한 공산군의 역습에 밀려 제3중대는 닭주둥이 밑으로 뚝 떨어져 버렸다. 산 밑은 넓은 개활지이며 몸을 의지할 만한 엄폐물이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공산군이 여기에 기관총 집중사격을 가하던가 야포와 박격포 포격을 퍼부으면 우리 약 500명은 풍비박산이 될 것이다. 대대 참모들과 중대장들은 말고개로 즉시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과 다시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며 계속 여기 머물다가는 전멸당한다고 대대장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김용배 대대장은 머리를 저으면서, 권총을 빼들고 제3중대 앞에 나서면서 북한 공산군을 향하여 권총을 계속 쏘고 있었다.
제3중대 장병들은 대대장을 앞질러 돌격해 들어가 단숨에 잃었던 진지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때를 같이하여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나를 불러 제1중대는 즉시 이곳을 출발하여 지촌천을 상류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약 3킬로미터 지점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90도 각도 꺾어 북한 공산군이 있는 복고개를 점령하고, 거기서 방향을 다시 오른쪽으로 90도 돌려 능선을 타고 올라가서 제일 높은 고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북한 공산군 여단장이 있다는 고지를 기습 점령하라는 것이다. 불과 1개 중대병력을 가지고, 적군 여단병력이 배치되어 있는 심장부를 기습하여 찌르고 이를 점령하라니 그 분의 대담성에 나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북한 공산군 진지 앞을 지촌천이 흐르는 그 앞은 넓게 트인 벌판이다. 지촌천을 건너서 서쪽 벌판에는 북한 공산군 진지로부터 약 150m 떨어져서, 북한군 방어선과 평행선을 그으며 오솔길이 나 있다. 이 오솔길을 걸어서 약 3km 사창리 방향으로 가면 복고개 앞에 다다른다. 거기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적의 진지를 기습하는 것이다.
보통 지휘관 같으면 엄두도 못낼 일이다. 그러나 김용배 대대장의 형안(炯眼)은 5~ 10m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면 적군 방어선의 약 150m 앞을 아군 제1중대가 약 3km나 가로질러 가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며, 복고개의 적군을 기습하고 적군 여단장이 있는 고지도 기습으로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처럼 시계(視界) 제로의 상태에서 기습당하는 쪽은 기습해 오는 쪽의 병력을 실제보다 10배 이상으로 오판하는 것이 상례이다. 제1중대는 김용배 대대장의 의도대로 빠른 걸음으로 복고개 앞에 가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려 지촌천을 건너 전속력으로 복고개에 올라가서 북한 공산군을 포로로 잡기도 하고 북쪽으로 쫓아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즉시 북한 공산군 여단장이 있는 오른쪽 고지로 방향을 꺾어 허리에 총 격투사격을 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그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북한 공산군 제26여단장은 황급히 달아나고, 북한 공산군 방어진지의 북한 공산군은 눈사태 현상을 일으키며 화천방향으로 달아났다. 김용배 대대장이 아니고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유례를 보기 힘든 기습작전이며, 멋진 대성공을 거둔 역전(逆戰) 드라마였다. 나는 북한 공산군 여단장 호 속에서 고등어 통조림을 여러 개 노획했다. 원산에서 제조된 것이며 품질이 괜찮았다. 북한에서 그 당시 생선 통조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때의 식품공업이 남한을 앞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질고 엄격한 대장
김용배 대대장은 용감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어진 군인이었다. 6.25가 일어난지 9일 후, 제7연대 제1대대가 음성 전투를 앞두고 충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허름한 짐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지친 피난민의 홍수가 충주읍을 지나고 있었다. 이 대열을 바라보며 서 있던 김용배 대대장은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연대 s-3에 근무하는 여자 타자수 최양이 조금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더군. 피난민 모두 불쌍해 볼 수가 없더둔. 다 우리 군인들의 잘못 때문이므로 얼굴을 국민 앞에 들 수가 없어.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하고 장탄식을 하면서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 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분은 북한 공산군 포로에 대해서도 따뜻한 동포애를 베풀어 주었다. 부하들에 대해서는 온정을 베풀고 아껴 주었으나, 군기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나도 그 분으로부터 단단히 꾸중 들은 일이 한 번 있었다. 그 때 일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 20일은 바로 나이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으나, 나는 전투를 하느라 잊어버렸을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중에서 우리는 야간행군으로 맹산 북창 방면에서 맹산-순천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철수중에 있었다. 제1대대의 제일 후미에서 행군하던 제1중대가 미럭고개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0분경이며, 제1대대는 여기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있었다. 김용배 대대장은 각 중대장을 집합시키고 고개 마루터기에서 방어명령을 하달했다. 대대장은 제1중대로 오솔길을 차단하고 제3중대는 제1중대 왼쪽에서 신작로를 차단 배치하도록 명령하고, 제2중대는 고개 능선을 따라 예비대로 배치하였다.
나는 오부능선(고개중턱)에 제1중대 병력을 배치하였다. 고개 중턱은 밭으로 되어 있었으며 경사는 완만하였다. 지도상으로 볼 때 대대나 중대의 배치는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불안을 느꼈다. 개인 산병호와 공용화기호를 파야 하는데, 야전삽을 가지고 있는 사병은 고병(古兵)들뿐이며, 이 숫자는 중대원 총수의 5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지금 당장 적이 공격해 온다면 제1중대는 약25도 경사진 밭 가운데 거꾸로 엎드려 산병호 하나 없이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이렇게 되면 저항다운 저항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대대장의 말에 의하면 내일 아침에는 훌륭하게 장비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이 미럭고개에 와서 우리와 교대한다는 것이다. 아군 정찰기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 해질 무렵 중공군 선두부대는 미럭고개에서 약 25km 전방에 진출해 있었다고 한다.
제발 중공군이 내일 해뜰 때까지 이 곳에 오지 않기를 나는 바라며 우선 산병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1개 분대에 두 개 정도밖에 없는 삽이 쨍그렁거리며 얼어붙은 땅을 파고 있었다. 60미리 박격포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 뒤의 좀 움푹한 곳에 차려포를 하였다. 밭 기슭의 나무가 있는 곳에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그 옆에서는 반장 감독하에 기관총 호의 구축작업이 시작되었다. 삽이 없는 신병들은 여기저기 배치되어 전방에 적군이 나타나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엄체(掩體)하나 없이 앉아 있는 신병들은 추위에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 추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공군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더욱 떨었던 것이다. 누구나 전쟁에 나와 적군과 처음 싸울 때는 벌벌 떠는 법이다. 전쟁 배짱이 생기려면 적어도 열 번쯤의 격전을 겪어야 한다. 종합학교 제1기생들이 새로 소대장으로 부임했으나, 이들 역시 전투경험이 없는 초급장교들이다. 믿을 수가 없어 각 소대 배치사항을 돌아보고 있는데, 오솔길 옆에 오막살이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홍인곤 하사가 들어갔다 나오더니 집 주인이 방금 피난을 간 듯 불을 때놓아 방바닥이 뜨끈뜨끈 하다며 언 몸을 잠시 녹여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초가삼간에 들어가서 방 아랫목에 누우니 등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풀리며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느 틈에 나도 모르게 사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이 들자마자 나는 가위에 눌렸다.
사람의 세 배쯤 되어 보이는 검은 곰이 타고 앉아 나의 가슴을 조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 괴로워서 곰과 싸우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흔들어 움직여 본 후, 다시 누워 있다가 또 잠이 들었다. 피곤한 몸은 눕기만 하면 곧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똑같은 큰 곰이 나타나서 나의 가슴을 눌렀다. 나는 곰을 물리치려고 애쓰다가 다시 겨우 깨어나서 홍 하사에게 불을 켜게 한 후, 곰이 나타나 가위 눌린 이야기를 하고 참 별일이 다 있다고 웃고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런데 참으로 괴상했다. 나는 군인으로서 사선(死線)은 벌써 여러번 넘었으며, 또 더구나 권총과 칼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도깨비도 귀신 따위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하물며 곰이나 호랑이 따위의 동물은 문제도 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이면 곰이 생시도 아닌 꿈에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잠이 들자, 세 번째도 다시 그 곰이 나타나서 가위에 눌렸다. 진땀을 흘리다가 겨우 눈을 뜬 후,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나는 그 집을 나와서 3분 거리에 있는 제1중대 오피(OP)로 올라갔다.
중대 전체를 통해서, 아직 호(壕)는 하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단단히 얼어붙은 땅의 표면을 겨우 벗겨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덤 가장자리에 드러누었다. 야광시계는 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전방에 내보낸 국지 경계병이 있는 곳, 내 앞 약 500m 지점에서 딱꽁, 딱꽁 하는 소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에 익숙한 내 고막은 즉각적으로 아군을 향하여 쏘고 있는 적군의 소총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10여 발의 기관총 소리가 나더니 푸른 예광탄이 내 왼쪽 어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뿔사, 중공군의 공격인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기관총의 응사를 명령했다. 소총소리와 기관총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흙가죽만 벗겨놓은 깊이 5cm쯤 되는 미완성 산병호에 들어가 엎드려 보았으나 산병호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밭고랑이 나을 것 같아서 기어가서 밭고랑에 엎드려 보았으나 그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장 1m 70cm, 체중 62km의 몸은 적탄의 피사체로서 완전히 노출될 뿐이었다.
막 일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무덤 쪽으로 몸을 옮기려 할 때였다. 뽕뽕뽕 하면서 아주 작은 포 발사 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오더니 무엇인가 직사탄도 보다 약간 굽은 포물선을 그으면서 쉬쉬 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나는 그대로 밭고랑에 번개같이 엎드렸다. 내 뒤에서 폭발하는 포탄의 위력은 아군 세 열 수류탄 정도의 낮은 위력을 가진 폭발물이었으나 파편과 흙, 돌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그 중 일부가 나의 철모와 군 전투복 위에 후루루 딱딱 떨어진다.
엄폐물이나 차폐물 하나 없이 적의 소총 및 직사탄에 몸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사형대에 올라가서 적군에게 몸을 맡기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개죽음이다’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매에게 쫓기는 참새처럼 신병들은 와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다닥 일어나서 무덤 뒤로 몸을 피하였다. 무덤 뒤에는 박격포 반장과 중대 무전병들이 엎드려 있었다. 제3소대장 대리 박상호 상사가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여기서는 저항이 불가능하며, 산마루에 올라가서 능선에 몸을 숨기고 머리와 총만을 적군 방향에 내놓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꽝!”
적의 수류탄이 눈앞에서 터졌다. 신병들은 모두 달아나고 고병들 20여 명만 남아 있었다. “능선으로 후퇴!” 나는 소리쳤다. 헐떡거리며 고개 마루터기에 올라가니 김용배 대대장이 노기를 띠며 나를 나무랐다. “야, 이놈아, 이 대위, 너 여기까지 후퇴해 오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이대로 나가다간 우리뿐만 아니라 20리 후방에 숙영하고 있는 미 제1기병 사단까지도 전멸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날이 샐 때까지는 이 고개를 지켜야 한다. 여기 1중대 도망쳐 온 놈들을 잡아 놓았다. 이것들을 끌고 빨리 다시 되돌아가라. 김용배 대대장은 나에게 여지껏 한 번도 이 놈이라든지, 이 자식이라든지 하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또 어떠한 급한 상황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분이었는데, 오늘은 저렇게 노기를 띠고 야단을 하시니, 그 분의 가슴에는 오늘 밤의 임무수행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이 임무를 완수하려는 결심인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듣고만 있다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대장이 붙들어 놓은 신병들과 나와 함께 올라간 고병들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여기가 나의 무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죽음은 100% 예견되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값비싸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온 신경이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었다.
“자, 1중대원들은 다시 원진지로 내려간다. 나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 서고 그 뒤에 중대전령·무전병·통신하사들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각 소대원들이 따르기로 되었다. 선두에 선 내가 고갯마루에서 12,3보쯤 내려갔을까? 고갯마루에서 10여 보 내려가면 주막집이 하나 있었다. 이 집은 오고가는 길손들이 땀을 씻으며 막걸리나, 혹은 냉수를 청하여 한잔씩 하고 가는 노상 휴게소이리라.
나는 그 초가집 앞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서 4,5m만 더 내려가면 자동차 신작로인 큰 길과 구길인 오솔길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구길은 직선을 그으며 골짜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신작로는 구길의 왼쪽을 거의 직선코스로 약 4,50m 내려가다가 급커브를 그리며 좌측으로 구부러진다. 바로 그 급커브 지점에는 제4중대(중화기중대)의 수냉식 기관총 1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기관총은 제1중대를 돌파하고 올라오는 오솔길의 적군을 사격하기 위한 종심 같은 후방의 기관총이었다. 그런데 이 기관총이 돌연 총성을 내면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나는 주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ㄱ자로 급커브를 그린 지점의 상황을 응시하였다. 큰길인 자동차도로를 따라 올라오던 먹구름 같은 군인행렬의 집단은 기관총구의 불과 2,3미터 앞에서 정강이를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뒤에 따라오던 군인집단의 일부는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탄약수들을 소총으로 쏘고 있었다. 서로 손을 내밀면 붙들 정도의 근거리에서 죽이고 죽는 판이다.
중공군의 포위망
나는 큰 자동차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군인의 집단을 아군의 제3중대로 생각하였다. 분명히 자동차도로는 고개 중간 지점에서 제3중대가 차단 배치하고 있었다. 그 제3중대가 적군에게 밀려서 올라오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아군 제4중대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및 탄약수와 아군 제3중대의 소총병들과의 싸움인 것 같았다.
야간에는 아군끼리 서로 모르고 싸우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만 같이 보였다. 나는 “야, 아군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냐? 서로 확인해 봐라” 하고 소리쳤다. 이때 누군가, “수류탄, 수류탄!” 하면서 죽어갈 것처럼 외쳤다. 마침 그때, 고개를 올라오는 군인 한 명이 내 앞을 지나쳤다. 나는 그의 왼팔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야 , 너 3중대원이냐? 저기서 싸우는 것은 아군끼리 싸우는 거지? 3중대와 4중대가 싸우는 거지?” 그 군인은, “응, 아군끼리 싸우는 거야” 하고 대답했다.
신병인지 대답이 우물쭈물 시원치 않았으나 아군끼리 싸운다는 것만은 확인된 셈이었다. 그가 나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 비슷이 하는 것이 좀 못마땅하기는 하였으나, 어두운 밤에 계급장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 군인은 방한 전투 작업모를 쓰고 긴 군용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당시 아군은 철모를 쓰고 야전점퍼를 입었으므로 이 군인이 아군이 아닌 것만은 어린애들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야전을 달리는 역전의 중대장인 내가 그것을 식별 못했을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상식 이하의 실수가 여기에 일어났으니 나는 중공군의 길을 안내하는 북한 공산군 사병을 아군으로 오인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나의 죽음을 어떻게 가치있게 마감할 것이냐 하는 일념과, 눈앞에서 아군끼리 싸우는 것을 시급히 말려야 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극도로 긴장된 머리는 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북한 공산군 사병의 팔을 놓고 기관총이 있는 데로 달려갔다. 군인 대열의 선두는 정지된 채 있었으나, 그 뒤에 따라오는 군인의 물결은 뭉게뭉게 쌘비구름같이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대도시의 길 한복판에서 큰 교통사고가 난 직후에 몰려드는 인파와도 같았다. 그들에게 접근한 나는 코를 맞대고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너희들 3중대냐? 조심해라 아군끼리 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의 대답은 한국말이 아니었다. “솰라 솰라, 닐라 닐라…” 아뿔싸! 그들은 중공군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엇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순간적으로 “악!”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 후 무의식중에 되돌아서서 질풍과 같이 고개 마루터기로 달아났다. 이미 그 곳에 아군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 마루터기까지는 약 50m, 이 길을 단숨에 달려 마루터기까지 약 5m 남겼을 순간, 따르르… 하는 중공군 기관단총의 총성과 함께 총탄이 빗발같이 날아왔다. ‘아앗, 이것이 죽는 순간인가’ 하고 나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참, 영문도 모를 일이 일어났다. 벌집같이 총구멍이 난 송장이 되었어야 할 내 몸은 고개를 넘어 가파르게 직선으로 내려간 오솔길로 굴러 떨어진 후, 중공군에 붙들릴소냐 하고 나무 밑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몸을 움칫움칫 움직여 보았으나 총에 맞아 부러진 뼈는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중공군이 따라왔다. 고개 마루터기를 점령한 중공군은 고개 마루터기에서 가창(假倉) 방면을 향하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자동차도로를 따라 무슨 말인가 떠들썩 지껄이면서 줄줄이 걸어나가고 있었다. 중공군이 다 지나가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나는 미럭고개 서남쪽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몸을 점검해 보았다. 적탄에 맞은 자국은 허리 왼쪽에 메달린 수통피에 하나가 있을 뿐, 몸은 완전하였다. 다만 콧잔등이 땅에 마찰되어 벗겨져 피가 흘렀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와 여기 저기 응결된 핏자국이 있을 뿐이었다.
M2칼빈 자동소총은 자동스프링이 빠져 달아나고 총에 끼웠던 탄창은 없어지고 멜빵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약실과 총구와 노리쇠 부분에 흙이 잔뜩 메워져서 큰 손질 없이는 사격이 불가능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소련제 떼떼 권총은 권총집이 새 것이고 가죽 케이스가 권총을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어 이상 없이 좋은 상태여서 적군과 정통으로 마주치면 이 권총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지난 번 국경지대에서 중공군 중포위망 속에서의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이까짓 엷은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지난 1950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된 초산군 일대에서 제7연대가 실행한 중공군 중포위망 돌파 작전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철수작전이었다.
압록강변 신도장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제7연대 제1중대장인 나는 이미 10월 26일에 압록강 뱃사공 영감으로부터 중공군 수만 명이 10월 17일부터 3일간, 야음을 이용하여 중국쪽에서 압록강 뗏목다리를 건너 만포진으로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한 바 있었다. 즉, 10월 20일 중공군 다섯 명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잠시 신도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만포진에서 창성으로 연락차 가는 중이다” 라고 만포진에 들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북한 공산군 포로들 중에서도 뱃사공 영감과 같은 말을 하는 자가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군 정예부대인 제8사단인 희천-강계-만포진 쪽으로 북진하고 있고, 그 뒤에 아군 제7사단이 뒤따르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10월 27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안내를 받으며 압록강 제1중대 진지에 도착한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현재 온정·북진 일대에서 아군 제2연대와 중공군이 교전중인데 상황이 아군 제2연대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어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28일 제7연대장으로부터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에게 제1대대는 10월 29일 새벽에 초산읍에 출발하여 남하(南下), 제7연대본부와 제2 및 제3대대가 있는 고장(古場)에 도착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10월 29일 아침부터 제7연대는 고장 남쪽 풍장에서 아군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29일 낮 동안은 제7연대가 중공군을 돌파하면서 약 30리를 남진했으나, 밤이 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밤 12시에 중공군은 야간 총반격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약 3시간 30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우리 제7연대는 북으로 북으로 밀리면서 어둠 속에 흩어져서 사분오열 상태가 되었다. 제7연대의 재편성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중공군은 신속하고 끈질기게 철두철미한 추격을 계속했다. 재편성을 못하고 계속 쫓기고 있는 제7연대의 지휘계통이 드디어 마비되었다. 무전병들도 전사 또는 포로가 됐는지, SCR300 무전기로 대대장이나 연대장을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각 중대는 중대장의 독립지휘하에 중대별로 뭉쳐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다.
삼지사방으로 광범위하게 흩어진 제7연대 장병들은 적유령산맥과 강남산맥으로 들어갔다. 이때 제7연대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3개사단과 제40군 예하 3개사단이 에워싸고 있는 한가운데 완전히 고리되어 있는 형국이었다. 제7연대 장병들이 중공군의 종심 깊은 이 대규모 포위망을 돌파하고 아군이 있는 곳까지 나가려면 개천-맹산 선까지 걸어나가야 했다. 그 거리는 공중직선거리로 약 100km이고 도로거리로 따지면 150km쯤 될 것이나, 도로에는 중공군과 북한 내무서원들의 왕래가 심하여 이용이 불가능했다. 할 수 없이 태산준령을 넘어 강을 건너야 했다. 또 산속에서도 중공군을 만나면 교전하여 이를 뚫던가, 아니면 이를 피해서 멀리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제7연대 장병들이 걸어야 할 행군거리는 300km가 될 수도 있고 500km가 될 수도 있고 또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산 속에서는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큰 문제이고, 실탄보급도 끊어진 상태여서 아군 전사자가 생기면 그 시체에서 실탄을 급히 회수해야 했다. 이러한 위험천만의 악조건이 겹쳐서 제7연대 장병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포로가 되고, 연대장 임부택 대령,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포위망을 뚫고 겨우 살아나왔다.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장병들은 포위망 속에서 보통 2주일 내지 3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3개월간이나 적의 포위망 속에 갇혀 있다가 살아나온 인성훈 소령 같은 장교도 있었다. 제7연대 예하 소총 및 중화기중대장 12명 중에서 살아나온 중대장 수는 반을 약간 넘었으나,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 중대를 끝까지 지휘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중대장은, 12명의 중대장 중에서 오직 한사람인 제1중대장뿐이었다. 나머지 살아서 나온 중대장들은 포위망속에서 허덕이다가 중대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각자 개별 독자행동을 취했으며, 이들 중 두 명은 군복을 입고 총을 둘러맨 채 살아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군복을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총을 버리고 민간 피난민 행세를 하면서 살아나왔다.
이렇듯 중공군이 첩첩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험난한 길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은 확고한 국가관·사생관·군인관을 가지고 조금도 동요 없이 군복을 입고 총을 허리에 찬 채, 연대지휘부 장병, 대대지휘부 장병들을 지휘하고 살아나왔다.
10월 31일에 새로 부임한 일선 전투경험이 없는 27세의 청년 사단장은 제7연대의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여 압록강 초산진격작전, 그리고 초산에서 개천-맹산 선까지의 철수작전의 일등공신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장 지휘하에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온 유일한 중대인 제7연대 제1중대에 대해서는 사단 사령부에 불러들여 군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신고식을 갖고 환영식을 해주었다. 그러나 훈장수여 같은 것은 이때도 없었다.
또 제7연대 장병들은 자기 목숨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전투에 연일 시달리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장 따위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연대장 임부택 대령,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제1중대장을 위시한 유공장병들은 훈장에 대한 무관(無冠)의 용사로서 처여 있게 되었다. 두뇌가 우수한 청년군인인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전투경험을 쌓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분은 1951년 10월 하순 어느 날, ‘장도영 사단장 취임 1주년 기념 및 압록강 진격 1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으며, 초산에 진격했던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 대한 훈장을 뒤늦게나마 수여했다. 초산진격 당시 제3중대장 김명익 대위 등 유공장병에게 미국 은성무공훈장, 또는 우리나라 을지·충무훈장 등을 수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큰 실수가 있어 압록강변에 진격하여 압록강변 신도장에 배치되어 있던, 그리고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도 제7연대에서 유일하게 끝끝내 중대를 지휘하여 완전무장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온 제1중대장이 수훈자 명단에서 누락되어, 오늘날까지 제1중대장은 그때 그 작전의 유공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1중대장은 1951년 7월 15일, 제2사단으로부터 대대장 요원으로 스카웃되어 제6사단을 떠났으며, 장도영 장군이 초산지구 전투 유공자에게 훈장을 뒤늦게 수여하는 1951년 10월말 경에는 제6사단장 부하가 아닌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금방 남방고지에 있었기 때문에 장도영 제6사단장은 자기 부하가 아니기에 깜빡하고 빼 버린 것이다. 그 당시 우리 국군의 행정력 수준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런 것은 김용배 대령은 전사하자, 즉시 준장으로 진급되고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서의 혁혁한 전공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임부택 대령도 태극무공훈장을 두 개나 추후에 받게 되어 제7연대 전쟁 영웅 두 명은 모두 태극무공훈장을 받음으로써 그 전공이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 철수작전을 하는 동안 김용배 대대장이 겪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중공군 포위망을 뚫으며 나오기 시작한 지 약 2주일이 지난 어느날, 김용배 대대장은 대대작전관 김윤환 대위, 대대정보관 김 소위 등등, 제1대대 지휘부장병 18명을 이끌고 묘향산 높은 봉우리에 다다랐다. 거기서 큰 바위굴을 발견했다. 몸을 숨길 수도 있고 추위도 피할 수 있는 큰 굴이었다. 희천-개천 도로를 내려다보니 유엔군 전폭기가 중공군 집결지를 맹폭하고 있었다. 김용배 대대장은 이 바위굴에 당분간 머무르면서 상황을 살려보고 차기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아군이 반격해 들어오는 징후가 보이면 계속 바위굴에 머무르다가 아군이 묘향산 밑까지 진격해 들어왔을 때 산을 내려가서 만나고 중공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계속 남진하는 징후가 보일 때에는 산줄기를 타고 계속 중공군을 뚫고 나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먹을 것은 좀 있었다. 전날 밤 화전민에게 강냉이밥을 시켜 먹을 때, 돈을 많이 주고 콩과 강냉이를 가마솥에 볶게 하여 장병들의 호주머니에 채우고 일부는 자루에 담아서 배낭 속에 집어 넣었었다. 아껴서 하루 한 끼 먹는다면 여러 날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었다. 밤이 되어 보초 한 명을 굴 입구에 세워놓고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 4시쯤 김용배 대대장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김용배 대대장 앞에 백발에 긴 수염을 기른 산신령님이 나타나셨다. 얼굴 모습은 이승만 대통령을 많이 닮았으나 훨씬 더 위엄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자네가 김용배지” 하고 산신령님이 물으셨다. “예에, 그러하옵니다. 신령님” 정중히 머리를 숙이면서 김 중령은 대답했다. “고생이 많네.” 신령님의 위로의 말씀이었다. “황공하옵니다. 신령님.” 김용배 대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왜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안 되네.” 산신령님은 머리를 무겁게 옆으로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서 일어나서 남쪽으로 떠나게. 오늘 중으로 귀인들을 만나게 될걸세.” 깨고 보니 꿈이었다. 너무도 선명한 꿈이었다. 김용배 대대장은 대대작전관 김윤환 대위와 대대정보관 김 소위를 깨웠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 후 즉시 바위굴을 떠나기로 했다. 19명의 장병은 굴을 나와 남쪽으로 행군에 들어갔다. 바위굴을 떠난 지 여섯 시간쯤 되었을 때 유엔군 전폭기 편대가 날아와서 김용배 대대장 일행 약 6km 앞의 희천-개천 도로를 폭격 및 기총소사를 퍼붓더니 그 남쪽에서 포성이 쿵쿵쿵… 들려오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 후 미군 탱크수색대가 남쪽으로부터 중공군을 밀면서 진격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용배 대대장은 18명의 장병을 지휘하여 그곳으로 내려가서 미군을 만나 중공군 포위망을 벗어났다.
군인의 인생
1951년 1월 7일, 김용배 중령은 정든 제7연대 제1대대를 떠나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날 나는 제1중대장에서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제1대대장 대리근무를 하게 됐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날, 김용배 부연대장은 정든 옛집이라고 할 수 있는 제1대대를 찾아왔다. 나는 경기도 용인군 백암경찰지서에 있는 대대본부에서 그분을 맞이했다. 제1대대 상황보고를 끝내고 나는 그 분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김용배 부연대장은 지난 1950년 10월 10일, 부인이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으며 이름을 ‘송조(松朝)’ 로 지으라고 연락해 보냈다고 했다. 소나무같이 지조있고, 아침같이 신선하게 살아가라는 뜻과 조(朝)자가 시월 십일(十月十日)을 모아 쓴 글자라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했다.
김용배 부연대장은 돈과 권력을 잘못 다루면 성인이 죄인으로 추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 문제가 복잡하면 남의 지탄을 받으며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 좀 있다가 군인의 사생관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 대위, 인생칠십고래희 또는 인생 50년이라고들 하지 않나. 세월따라 가다가 언젠가는 아주 가버리는 것이 인생이야. 군인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애국열사를 말하는 거지. 전시에 전쟁터에서 용감한 자는 가고, 후방의 비겁한 약자들은 남는 거야. 그러나 그러한 손익계산을 하다가는 군인의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어. 누가 뭐라해도 일체의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목숨을 바쳐야 나라가 잘 될 수 있는 거지. 이 충무공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야. 나라를 지키는 중심세력이 일선 군인들인데, 이 세력이 희생정신을 잃으면 나라가 끝장이며, 국민들이 여지껏 쌓아올린 공든탑이 하루 아침에 모두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거야.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 교전국들의 평균 수명이 23.5세였다고 들었어. 그것은 군인의 전시 평균 수명이 보통 민간인의 인생 50년의 약 반액을 말해주는 거야. 나나 이 대위나, 다 군인의 전시 평균수명을 넘고 지금은 덤을 살고 있는 거야. 벽돌같이 네모난 마음가짐으로 청탁을 모두 삼킬 수 있는 넓은 도량과, 돈과 생명을 버리는 무구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싱싱하고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김용재 중령의 그 굵고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1951년 7월 2일, 불과 10일 전에 제7연대를 떠나 제7사단 제5연대장으로 부임한 김용배 대령은 강원도 양구 군량리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굵고 짧은 반액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이 부음이 제7연대에 온 것은 그 다음 날인 7월 3일이었다.
이 비보에 접한 제7연대에서는 김용배 대령이 생전에 가장 아끼며 가깝게 지내던 부하이며, 제2사단 제32연대 대대장으로 확정되어 곧 제7연대를 떠나야 하는 나를 양구로 급파하여 빈소에 머무르다가 장례식에 참석케 했다.
장례위원장은 제7사단장이었다. 나는 두 번째 조사를 읽었다. 남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 야전의 지휘관, 하지만 나는 조사를 읽다가 목이 메어 여러 번 말이 끊기고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장례식은 끝나고 유해는 앰불런스에 실려 장례식장을 떠났다. 멀리서 일선 장병들의 유혈을 강요하는 포성이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슬픈 일이로다. 일선의 용감하고 성실한 강자는 가고, 후방에서 불성실하고 비겁한 약자는 남는구나.” 손익계산하면서 후방에서 병역을 요령 좋게 기피하는 권모술수와 사술에 능한 정치적 위선자들과 군대에 입대하긴 했으나 소위 백을 써서 일선에 나오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나는 남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울분을 토해냈다.
에필로그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 현충일 날, 나는 국립묘지에 잠들고 계신 고 김용배 장군의 묘소를 또 찾았다. 내가 그 묘소에 도착해 보니, 거친 풍파를 겪으며 패인 주름살에서 과거의 고된 삶을 읽을 수 있는 시골 할머니 한 분이 북어·무침·과일 등 조촐한 제사 음식을 고 김용배 장군 묘소 앞에 차려놓는 중이었다.
나는 어디서 오신 할머니냐고 물었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왔다는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고 김용배 장군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바로 부인이라고 했다. 나는 고 김용배 장군과 나의 관계를 길게 설명하였다. 할머니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묵념을 올리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고 김용배 장군은 생전에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신이 아니었기에 우리 마음속에 더욱 친밀하게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나 무인으로서는 남다른 사명감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담한 용기와 누구도 따르기 힘든 순발력을 지녔고 상황을 잘 판단하는 형안과 넓은 도량을 가진 명장이며, 성장(聖將)에 가까운 큰 인물이었다.
내가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 김용배 장군 동상 앞에서 메모를 하는 동안 열을 지어 지나가는 단체관람의 고등학생들은 설명문은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고, “김용배 준장,” “김용배 준장” 하고 큰소리를 내면서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겉돌며 지나쳐 버렸다.
이 비는 우리고장 문경출신으로 6.25의 영웅이며 한국전쟁사에 길이 빛나는 “호국인물” 김용배 장군의 애국충정의 높은 뜻을 추모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이고장의 기관단체와 시민의 정성을 모아 문경시재향군인회가 주관하고 문경시의 후원과 국가보훈처의 협찬으로 건립하였으며 흉상과 조각은 이 고장 산북출신 서울대학교 엄태정교수가 맡았으며 비문은 흥덕출신 서울대학교 김안제교수가 짓고 글씨는 가은 출신 서예가 롱곡 조용철선생이 쓰고 석촌 이창호사장이 시공하여 장군의 호국의지가 서린 이곳에 장군 서거 50주기를 맞아 흉상과 추모비를 세우다.
2001년 7월 2일
문경시재향군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