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석야 신웅순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보물 제1524호
서울 노원구 하계1동 12번지 소재
묵재 이문건이 부친 이윤탁의 묘를 모친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묘갈이다. 이윤탁은 조선 중종 때 종9품 벼슬인 승문원의 부정자를 지낸 인물이다. 앞면에는 묘주의 이름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고비묘갈음지’ 라는 제목 아래 묘주의 일대기가 적혀 있다. 측면에 ‘불인갈’, ‘영비’라는 제목 아래 한자와 한글로 특이한 추기문이 새겨져 있다. 아들 이문건이 묘갈문을 짓고 썼다. 가정 15년, 1536년(중종 31)에 세웠다.
좌측면
靈碑 녕ᄒᆞᆫ비라거운사ᄅᆞᄆᆞᆫᄌᆞㅣ화ᄅᆞᆯ니브리라
이ᄂᆞᆫ글모ᄅᆞᄂᆞᆫᄉᆞᄅᆞᆷᄃᆞ려알위노라
영험한 비이다. 건드리는 자는 화를 입을 것이다.
이를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린다
우측면
不忍碣 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毁之石不忍
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免夫
부모를 위하여 이 묘갈을 세운다, 그 누가 부모가 없어 차마 이 비를 훼손할 것인가?
비를 훼손하지 않으면 묘도 범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만세 후라도 화를 면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례적인 다른 비와는 다르게 좌우측에 한글·한문의 경계문이 있어 꺼림칙하고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 비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국조인물지』, 『기묘록속집』, 송시열의 『이문건행장』등에서 묘갈을 세운 이윤탁의 아들 이문건은 강직하고 효심과 우애가 깊었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시열은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사되자 그 문인들마저 해를 입을까 두려워 문상하기를 꺼려했는데 이문건만은 형 충건과 함께 문상할 정도로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효행 또한 각별했으며 서법에도 능해 중종의 시책문을 쓰기도 했다.
이문건은 7세에 1501년 아버지 이윤탁을 여의었다. 아버지 묘소는 선산인 양주 영동에 조성되었는데 위치는 지금의 태릉(중종의 세 번째 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그의 아들 명종의 자리)자리였다.
형들은 기묘사화로 1521년 세상을 떠났고 누님 한분도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며 자식 역시 하나같이 세상을 떴거나 병으로 바보가 되었다.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1535년에 어머니마저 여의였고 아버지 묘가 있는 선산이 태릉조성 대상으로 수용되자 부친의 묘이장까지 해야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버지의 묘광을 파던 날 그의 일기이다.
아버지의 시신이 드러나게 되니 몹시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했다. 다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 는 상황에서 이리 된 것이나 눈에서 눈물이 난다. 참아가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1536년 2.11일)
그는 1536년 4월 16일 아버지를 어머니가 묻힌 양주 노원 율리재에 합장했다.
이런 일기도 있다.
분묘에 올라가 묘갈면에 몇 글자를 새겼다. 왼쪽 무릎이 더욱 시리다(1535.11.27.)
흐리고 바람불다. 외막을 지키며 상식예를 행했다. 묘갈 새기는 일을 시작하다.(1536.2.27.)
맑음 조카 휘와 함께 여막을 지키며 묘갈에 글씨 새기는 일을 마쳤다(1536.4.16.)
이 비는 그가 한 겨울 추위, 육신의 수고로움과 고통, 마음의 비통함을 삭여가며 한 자 한 자 직접 파내려간 노력과 정성의 결정체이다. 한글고비 좌우 경계문은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옮겨야 했던 아버지의 묘를 두 번 다시 옮기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이런 방어 장치를 해 놓은 것이다.
비문을 읽어본 사람의 마음 속에 일종의 두려움을 심어 묘갈 자체와 분묘 모두 함부로 함께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혼이 노원 율리재에서는 영원히 평안하기를 기도했던 아들의 마음과 고심의 흔적이 그 작은 크기의 한글 고비에 크게 서려있는 것이다.(http://blog.daum,net./gijuzzang/8515562)
이 묘비는 근래에 와 또 한번의 시련을 겪었다.
1971년 중계 2지구 택지 개발 사업의 도시계획이 결정되었고 1989년에는 택지개발 실시계획에 대한 건설부 승인이 떨어져 직선 도로가 한글고비가 있는 곳을 관통하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 위원과 성주 이씨 정자공파 종중, 지역 주민들의 협의에 의해 교통 여건과 문화재 보존이라는 난제를 절충, 묘역을 전체적으로 15미터 후방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1996년 3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이다.
이 비석은 신내 택지개발지구로 이어지는 폭 6차선의 도로부지중 3차선을 점유, 주민들의 이전 민원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노원 구청과 대한 주택 공사는 지난 4년 간 일곱 차례나 서울시 문 화재위원회에 요청했으나 한결 같이 ‘이전 불가, 우회도로개설’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우회 도로로 개설할 경우 곡선 각도가 너무 크고 택지개발 완료 후에는 차량 통행이 많아 묘비 보존 문제가 많은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서울시 문화재심의위는 그러다가 12월 드디어 이전에 긍정적 인 반응을 보였다.대한 주택공사측이 종중과 협의, 인근공원에 이전 장소를 마련하되 비각 설립 등 고비를 보존하기 위한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다는 조건. 그동안 문화재 관리 위원들이 한사코 이전을 반대하는 것은 이 비문이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한글을 새긴 금석문으로 16세기 언 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특히 비석 측면에 새겨진 문구는 이전을 주장하는 사람 들에게 꺼림찍한 느낌을 줘왔다.
서울 노원구 하계 1동 12번지, 현 지금의 위치이다.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는 위와 같은 사연으로 경계문구에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또 한차례 옮기게 되었다.
비석 죄측 한글 경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고, 국어사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 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 (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 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 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 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 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문화재청)
근대 이전 비석 가운데 한글이 새겨진 것으로는 현재까지 문경새재의 산불됴심비(경북문화재 226호)·인흥군 이영 묘역 내 묘표·이윤탁 한글 영비 등 총 3건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한글고비’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문화재적 가치가 재평가되어 2007년 9월 18일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명칭도 ‘이윤탁 한글 영비’로 변경되었다.
-한국주간문학신문,2015.5.20.(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