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꽃
제9회 작품상
송심순
초등학교(국민학교) 오학년 방과 후 다른 날보다 마음이 급해 뛰다 서다를 반복하며 집에 도착했다. 책 보따리를 마루에 던져놓고 숨 가쁘게 집 근처 골짜기 감자밭으로 달려갔다.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가 오늘은 감자 캐는 날이라고 알려주셨기 때문에 학교 수업도 건성으로 이미 마음은 감자밭에 빼앗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유별나게 찐 감자를 좋아하고, 혹시 감자 꽃을 볼 수 있을지, 땅속에서 어떤 색의 감자가 탄생할지 엉뚱한 호기심에 관찰해보겠다는 의욕이 앞섰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헉헉거리며 밭에 올라가니 이미 캐낸 감자는 흙더미에 묻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직 자루에 끌려가지 않고 있어 반갑기만 했다. 요리조리 손바닥에 넣고 만져주며 흙을 털어주었더니 흰색 감자, 자주색 감자 구분이 또렷해져 금세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말끔해졌다. 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호미가 스칠 때마다 이번엔 흰 감자일까, 아니면 자주색 보랏빛 감자가 뽑혀 나올까 아리송하기만 하다. 은근히 나는 보라색 감자가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다 흰 감자가 먼저 올라오면 반갑지 않아 흙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밭이랑 위에 캐 놓은 감자를 어른들은 자루에 마구 주워 담기에 바쁜데 꼬마 소녀는 자주색 감자와 흰 감자를 붙여 눈사람도 만들어 이랑에 세워놓기도 하고 흰색과 보라색을 섞어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소꿉장난에 푹 빠져 신발에 흙이 들어앉은 것도 잊고 있었다. 이런 엉뚱한 놀이에 감자 수확이 끝난 것도 모르고 해 질 무렵 어른들이 너 떼어놓고 가야겠다고 겁을 주시니 벌떡 일어나 양손에 자주색 감자 한 개씩 쥐고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내려왔다. 그날 저녁 감자 캐던 날이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썼는데 아직도 그 동심의 일기를 잊을 수가 없다.
내용은 우리 집 감자 캐던 날 나는 자주색 감자가 더 많을지, 흰색 감자가 더 많을지 전날부터 궁금했는데 흰색이 더 많은 것 같아 내가 좋아 하는 자주색 감자가 불쌍해 아껴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감자 꽃이 너무 예뻐 아버지께 그 꽃은 남겨두라고 했는데 밭에 가보니 꽃은 말라버려 없었고 감자 잎도 볼 수 없었다. 아버지께 심통을 부리며 투덜거렸더니, 원래 감자는 꽃을 미리 따줘야 많이 열리고 잎은 말라야 캐는 시기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런 설명은 듣지도 않고 더 심통을 부렸다. 세월이 지나 대충 요정도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일기 검사를 하신 후 너 는 지금은 동시를 지어보고 성장한 후엔 어떤 글을 계속 써보는 게 좋겠다는 칭찬을 들으며 고개만 숙여 뜻도 모르고 부끄럽기만 했다. 수십 년 이 지나 육십 중반, 선생님의 칭찬을 믿고 따른 것인지 지금도 매일 써 내려가는 일기는 이제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 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작년 여름 귀농을 시작해 감자를 수확했다는 후배가 종이봉투에 쪄먹는 감자, 반찬 해 먹는 감자 이렇게 구분해 자상함과 정성이 가득한 감자 두 봉지를 택배로 보내온 것을 받았다. 감자는 조리법이 다양해 튀기거나 굽고 볶아 여러 가지 맛을 내지만 나는 포슬 포슬 하게 쪄 먹을 때 가장 흡족한 맛을 느낀다. 주로 쪄 먹기만 하다 가끔 근대나 시금치 된장국에 얇게 썰어 넣었더니 한층 된장국이 구수하고 맛깔스러워 입 맛 돋게 했다. 감자는 섬유질이 풍부하고 성인병 예방에 좋아 당분은 적으나 단백질은 고구마보다 많아 식사대용으로도 충분해 누구나 쉽게 요리 할 수 있고 어린이들도 좋아해 가족들의 건강 간식으로 적당할 것 같다.
어느 날 뒤 베란다 정리를 하던 중 후배가 보낸 감자 봉지를 버리려다 그 안에 싹이 나 있는 감자 몇 개를 발견하고 아차 미안함이 앞섰다. 그 싹튼 감자를 먹을 수도 없고 더더욱 버릴 생각은 아예 없어 순간 고민에 빠졌다. 결국 텃밭 관리자 남편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수확은 미리 포기할 테니 ‘감자 꽃’만 보게 해달라는 내 애원을 외면하지 않고 남편은 텃밭에 이랑을 만들어 겨우 파종 시기에 맞춰 심던 날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감자는 심고 거의 두 달 정도 지나야 감자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데 잎이 허약해 보여 거름이 부족한 것은 아닌 지 전전긍긍 꽃은 볼 수 있으려나 애를 태우며 기다려본다. 감자 꽃은 흰 색이나 자주색으로 6월경에 핀다는 것도 감자를 심어놓고 정확히 알게 되었고 소박한 감자 꽃을 보기 위해 나는 일찌감치 수확은 포기하기로 했으니 꽃이 피기만을 기다렸다.
자연은 정직하기도 하지, 개화시기에 딱 맞춰 내가 좋아하는 자주색 감자 꽃 비슷하게 드디어 흰 바탕에 노란 암술이 은은하게 초록 텃밭을 수놓았다. 비록 몇 송이지만 환호가 절로 호들갑 떠는 순간 초등 오학년 고향 감자밭 이랑에서 소꿉놀이하던 소녀가 되어있었다. 아버지한테 감자 꽃이 안 보인다고 심통 부렸던 오학년 철부지 짓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꽃이 피기 전에 꽃줄기를 제거해줘야 꽃으로 가는 영양분을 미리 막 을 수 있어 감자가 많이 달려 수확이 늘어난다는 것을. 감자 꽃을 보는 행복과 더 많은 감자 수확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감자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것을 알고부터 수확 목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하며 희생해 꽃이 제거되고 있다니 미안함에 더 안쓰럽기만 하다. 몇 송이 피었나 세어보며 꽃이 말라질 때까지 건드리지 않고 오래 보고 싶어 옆에서 위에서 여러 각도로 찰칵찰칵 밭이랑에서 폴짝거리며 호들갑 떠는 어린아이가 되어있다.
후배가 보내준 감자 보관을 소홀히 한 탓에 나는 동심의 일기장 감자 캐던 날을 떠올려 볼 수 있었고 선생님의 일기장 칭찬은(동시나 글을 써 보라고) 감자꽃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처럼 글 쓰는 취미를 놓지 않고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꿰맞추어 본다. 루이 16세가 사랑했다는 감자 꽃, 왕비는 머리에 꽂아 꽃 장식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꽃말이 누구에게나 순종만 하고 희생하는 것 같아 아련하기만 해 꽃이 질 때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다. 감자 꽃이 한 아름 피면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다가올 수 있다고 전해 오는 옛말에 나는 아직도 고향 감자밭이랑 흙냄새를 간직하고 있으니 이 보다 더 값지고 반짝이는게 무엇일까 싶어 꿈결 같기만 하다. 또한 나의 텃밭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감자 꽃을 오래 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런 경사가,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첫댓글 감자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가 감자꽃에 홀리듯~그 잔잔함에 그만 풍덩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