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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어머니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褥多羅三먁三菩提
(3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1)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
경에는 '3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부처님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신앙 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을 석가모니불에 한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불보살님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한량없는 불보살님은 어떻게 계시는가?
경에서는 부처님이 3세에 걸쳐서 계신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3세란 과거, 현재, 미래로 이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이다. 그런데 시간이란 것은 시간 그 자체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을 불교에서는 시방(十方)이라 부른다. 열 가지 방향이라는 말로 동, 서, 남, 북의 4방과 4간방 및 상, 하의 2방을 합한 것이다. 이 영원한 시간과 끝없는 공간 안에 무수한 부처님이 과거에 계셨고, 지금 계시며, 미래에 계실 것이라 했다. 이것이 3세의 모든 부처님이다. 그렇다면 이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누구인가?
우리들이 지금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말은 한자 '불(佛)'을 우리말화 한 것이고, 불(佛)은 산스크리트어 붇다(Buddha, 佛陀)를 줄여서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그리고 붇다란 말은 '깨달음[覺], 깨닫는 것,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시방3세의 모든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누구누구를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다.
누구라도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 된다. 바로 일체의 구도자, 일체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때 부처님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경전에는 많은 부처님의 명호가 나온다. 그 대표적인 명호로 과거불로서는 아촉불이 있고 현재 우리들의 본사이신 석가모니불이 있으며, 미래불로서는 미륵불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부처님께서도 부처를 이루기 전에는 중생으로서의 구도자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3세의 모든 부처님이 별개의 몸을 가졌다는 말은 아니다. 명호는 각각 다르지만 본래의 몸은 하나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3신불(三身佛)이다.
먼저 법신이란 영원불멸한 만유의 본체를 몸으로 하고 있는 부처님이다. 즉 진리를 그 자체를 몸으로 하고 있는 것, 내지는 영원한 법으로서의 부처님이 바로 법신불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불교신행은 이 법신불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두 번째의 보신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몸이다. 즉 과거 한량없는 시간에 걸쳐 어려운 수행을 쌓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진리와 하나가 되어 무궁무진한 공덕이 갖추어져 나타난 부처님이다. 그 예를 48원(願)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이룩한 아미타불에서 볼 수가 있다.
세 번째의 화신은 응신(應身)이라고도 하는데, 보신불을 친견하지 못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여 출현하는 부처님을 말한다. 우리들은 그 예를 석가모니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우리들과 같은 몸을 나투어 생사를 보이면서 진리를 일깨워주셨다.
이 세 가지 관계는 곧잘 달과 달빛 그리고 그림자로 비유되곤 한다. 즉 법신이 진여실상 상주불변인 것을 달에 비유하고, 보신의 온갖 공덕이 법신에서 생겨 일체를 두루 비추는 것을 달빛에 비유하며, 화신은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부처님 몸이기 때문에 달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2)불모(佛母)로서의 반야바라밀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열 가지 방향에서 수많은 부처님이 계셨고 또한 계실 것이다. 그런데 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은 무엇을 닦아서 부처를 이루었는가. 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써'라고 설시하고 있다.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부처님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에 관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불모(佛母)'의 사상이다.
사실 우리들은 '불교를 믿는다.'고 할 때 그 귀의처로서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라는 3보를 든다. 그러나 <반야경>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관념을 초월한 신행사상이 나타나 있다. 이미 위에서 밝힌 것처럼, 반야바라밀이라는 어휘는 자의(字義)만을 생각할 때는 해석이 가능한 하나의 단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반야경>은 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어휘에 숭배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해서 반야바라밀을 완전히 인격화(人格化)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반야바라밀은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이 법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 법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무엇을 이 법이라고 하는가?
소위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물고,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대품반야경> [문상품 제49])
반야바라밀은 일체 불, 보살의 어머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어머니인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한다. 어머니인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인격체로써 신앙의 대상이 되어 우리들의 귀의처가 된다. 즉 '나무 반야바라밀'이 된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은 '불, 보살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일체의 불, 보살을 낳아서 키우는 생모(生母)이자 양모(養母)가 되어 중생이 반야바라밀을 받아지니고 보살행에 노력하면 멀지않아 그들을 보살로, 나아가서는 부처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대품반야경> [불모품 제48]에서는 다시 이렇게 설시하고 있다.
부처님은 항상 부처님 눈[佛眼]으로써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이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방에 계시는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또한 부처님 눈으로써 항상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이 능히 모든 부처님을 탄생시키고, 능히 모든 부처님에게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주며,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은 항상 부처님 눈으로써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능히 선정바라밀 내지 보시바라밀이 생기고, 여덟 가지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八聖道分]이 생기며, 능히 부처님의 열 가지 지혜의 힘[十力] 내지 일체종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은 능히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벽지불, 모든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수보리야, 지금 계시는 모든 부처님이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고, 지금 얻고 있으며, 마땅히 얻음은 모두가 깊은 반야바라밀의 인연에 의하여 얻은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실로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인 일체종지를 모든 부처님에게 주어서 부처님을 부처님이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불법(佛法)은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생기고, 모든 성현은 반야바라밀로 말미암아 탄생된다.
(2)불모(佛母)로서의 반야바라밀②
이렇게 반야바라밀이 일체의 불, 보살을 비롯한 모든 성현과 중생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인 반야바라밀의 건강과 안녕과 번영을 항상 염원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불모품 제48]에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시하고 있다.
비유컨대 어머니에게 자식이 있음과 같다.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 마흔 명, 쉰 명, 백 명 혹은 천명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병이 들면, 모든 자식들은 각자가 힘써 치료법을 구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 어머니를 편안하게 하고, 병고(病苦)로 즐겁지 않는 모든 일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모질고 찬 바람과 뜨거운 열기, 모기, 등에, 뱀, 살무사가 어머니 몸을 침범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걱정거리다.'
자식들은 언제나 안락한 도구를 구하여 어머니를 공양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낳아서 길러주고, 우리들에게 세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어머니의 고통과 장애를 없애고, 병을 낫게 해서 장수를 누리게 하려고 수많은 자식들이 일심정성으로 노력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자신들을 낳아주었고 숱한 고통을 참아가며 생명을 있게 했으며, 이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이 부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의 건강과 번영을 언제나 염원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을 지켜야 하는 불자의 의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정법인 반야바라밀을 널리 펴는 활동이 시작된다. 반야바라밀의 서사, 연구, 독송, 기억을 종용하고, 이 경에 관하여 사색과 설법을 행하는 일을 장려하는 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에 정성을 기울이고 수호하여 반야바라밀이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책임이 부과된다. 반야바라밀 법문이 그리고 그 법문을 배우는 이들이 나쁜 무리들의 장해를 받지 않도록, 즉 반야바라밀의 정법이 영원히 중생을 이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불자들은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펴야하는 것이다.
(3)지도원리로서의 반야바라밀①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반야바라밀은 교리상 6바라밀의 한 덕목이지만, <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을 6바라밀의 한 덕목인 지혜바라밀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여, 반야바라밀이 6바라밀을 포섭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즉 반야부(般若部)의 모든 경전은 반야바라밀로 하여금 다른 다섯 가지 바라밀을 인도하는 안내자, 지도자로 표현하여 지도원리(指導原理)라고 간주하고 있다. <대품반야경> [조명품 제40]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이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보다 수승한 것은, 비유컨대 태어나면서 눈이 먼 사람은 가령 백 명, 천 명, 백천 명이 있다고 해도,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능히 길을 나서서 성(城)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교시가여, 다섯 가지 바라밀[五波羅蜜]도 이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맹인이 안내 없이 길을 나설 수 없는 것처럼 일체지(一切智)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시가여, 만약 다섯 가지 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인도자를 얻으면, 이때 다섯 가지 바라밀을 이름하여 눈이 있다[有眼]라고 합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인도자가 바라밀(波羅蜜)의 이름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3)지도원리로서의 반야바라밀②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다른 모든 바라밀은 어느 곳으로 자기가 향하여 나아가는 것인지, 혹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지를 자신만으로서는 이것을 모른다. 따라서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의 인도가 없으면, 마치 황야에 있는 맹인의 무리와 같아서 길을 잃고 실재로 가고자 하는 장소에 들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눈이 없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인식할 수도 없고, 눈이라는 인도자가 없는 까닭에 그들의 온갖 노력도 무위로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가지 바라밀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 바라밀(波羅蜜)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눈인 반야바라밀이 있기 때문이다. <대품반야경> [법칭품 제37]에서는 이렇게 설시하고 있다.
보살마하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明導)가 되어서, 능히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지계를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지계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인욕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인욕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정진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정진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선정을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선정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을 관할 때에 반야바라밀은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반야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보살이 보시를 행할 때에 반야바라밀이 현명한 인도자(明導)가 되어서, 능히 보시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하고, 나아가 모든 법을 관할 때에 반야바라밀이 현명한 인도자가 되어서, 능히 반야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게 한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경>은 반야바라밀을 단순한 인도자로만 부르지 않는다. 위의 [법칭품 제37]에서는 '현명한 인도자(明導)'라고 칭했지만, [존도품 제36]에서는 '존귀한 인도자[尊導]'라고 부르고 있다. 비유컨대 대지에 씨앗을 뿌림에 인연의 화합이 맞으면 바로 싹이 트고, 이 온갖 씨앗은 땅을 의지하여 자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란아,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생기게 되고, 네 가지 관찰법[四念處] 내지 일체종지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아란아,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 내지 열여덟 가지 부처님만이 갖는 특성의 존귀한 인도자인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온갖 초목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대지(大地)와 같은 것이다. 종자가 생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온갖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대지가 없으면 결코 생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반야바라밀도 꼭 이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다른 모든 바라밀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거기에는 생명이 없어진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다른 바라밀 및 제법(諸法)은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존귀한 인도자[尊導]라고 칭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불교신행의 전체를 확실하게 바라보고, 보살의 발걸음이 어느 곳으로 또한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눈이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은 우리들이 존중해야 할 큰 광명이다. 그것은 세간 일체의 오염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서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온갖 암흑을 타파해서 일체 중생들에게 평화와 안위를 준다. 눈이 먼 사람에게는 광명을 주어서 무명의 어두운 밤을 편안하게 가게 한다.
(4)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곳은 우루빈라(Uruvilva)의 나이란자나(Nairanjana; 尼連禪) 강가에 있는 보리수(菩提樹) 아래였는데, <방광대장엄경> [제 9권]에서는 그 때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보살은 후야(後夜)에 이르러 명성(明星)이 반짝일 때에 불(佛), 세존(世尊), 조어(調御), 장부(丈夫)의 성스러운 지(智)와 알 바, 얻을 바, 깨달을 바, 볼 바, 증득할 바의 일체에 일념으로 상응하는 혜(慧)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3명(三明)이 구족하게 되었다.
고오타마, 싣달다 태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증득에 의한 성불은 결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반야심경>에서 '3세의 모든 부처님은 다름이 아닌 부처님의 어머니인 반야바라밀을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으로써 부처님이 되었다.'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기실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모든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님'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부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엇인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 Anuttara-samyak-sambodhi의 음사로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바로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든 오시지 않든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진리이다.
이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불멸의 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큰 위신력과 대지혜가 필경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것을 얻었을 때 지금까지 망념에 의하여 가리워져 있던 진리의 실상이 드러나서 범부가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증득은 의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라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말이나 관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도달하는 과정과 방법과 반야바라밀의 내용과 세계를 우리의 생각 나름대로 이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오직 스스로 반야바라밀 자체가 됨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야바라밀 자체를 의론이나 관념 이전의 소식으로 파악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인가? 그 한 예를 보자. <전등록>에는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인 마조(馬祖)와 그의 제자 방거사(龐居士)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법담을 전하고 있다.
방거사가 물었다.
"만법(萬法)과 짝하지 않는 자가 누구입니까?"
만법은 무상하여 변천을 반복한다. 이는 이러한 만법과 관계없는 도리를 어떤 이론이나 존재재로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진리 주체자, 즉 구체적 실권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마조가 대답했다.
"네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시고 나면[一口吸盡西江水]일러주지."
방거사는 이 말 아래 크게 깨달아 이렇게 게송을 읇었다.
"시방에서 다 함께 모여서 모두가 무위(無爲)를 배우니 이곳은 불(佛)을 고르는 과거장이라. 마음이 공(空)하니 장원이더라."
어떻게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 것인가? 거기에는 서강의 물도 마시는 입도 따로 없다. 따라서 무명도 없고 제거할 번뇌도 없으며, 닦을 반야바라밀도 없고 다시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오직 일체 불보살과 중생과 산하대지가 동일생명으로 해탈의 태평가를 부르고 있을 뿐이다.
<혜담스님의 반야심경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