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주요명소
낙화암 (백화정)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 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 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 관북리, 구교리 일원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1330, 830-2523
정림사지 박물관
98년 건립기본계획을 시작으로 총150억원의 막대한 예산으로 지하1층, 지상1층으로 총 1,000평의 건축면적에 750여 평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구조는 불교의 상징적 형태의 조형으로 범어인 만(卍)자를 모본으로 삼고 있다.
한국과 일본 불교의 시원으로서의 의의를 지닌 백제 불교문화를 통해 백제인의 우수한 기술력과 동북아의 중심적 백제에 대해 재조명하고, 백제 불교의 정점에 있던 사비시대, 정림사를 재현하였다.
특히 기존 박물관들의 결과론적인 나열에서 벗어나 그 과정에 가치를 두는 전시연출로 영상, 패널, 모형, 체험, 유물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중층의 기획전시실에는 백제사비도성 新 자료전을 개최하여 백제사비도성 내에서 출토된 미 공개 유물을 전시할 계획이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401번지 정림사지 박물관 041-830-2721
무량사
무량사는 부여에서 가장 큰 절로 외산 만수산기슭, 소나무가 울창하고 물이 넉넉하게 흐 르는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하며, 고려 때 크게 융성했고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조선 인조(1636~1646)때에 재건되었다.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 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유랑생활 을 하다가 말년에 이 절에 들어와 59세 때 입적하였는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화장할 때 발견된 사리를 모신 부 도와 직접 그렸다는 자화상이 보존되어 있다.
절 주변에는 무진암, 도솔암, 태조암 등 여러 암자가 있으며, 무량사에서 도솔암을 거쳐 태
조암에 이르는 1.5㎞의 숲 길은 참 아름답다. 절 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 오층석탑
( 보물 제185호), 석등(보물 제233호),미륵불괘 불탱(보물 제1265호)과 당간지주 (유형문화재 제57호), 김시습 영정(유형문화재 제64호) 과 부도(유형문화재 제25호) 등 많은 지방문화재
가 있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16번지 무량사 041-836-5066
정림사지 5층석탑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해당된다. 이 문자와의 발견수는 이곳에서 출토된 고려 기와 중에 가장 수량이 많았으며 고려 재건시의 정림사를 대표할 수 있는 유물이다.
가람배치형식(伽藍配置形式)을 보면 전형적인 일탑식배치(一塔式配置)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一直線上)에 세워졌으며 주위(周圍)를 회랑(廻廊)으로 구획(區劃)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 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 물 제108호)이 남아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1330, 041-830-2523
고란사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여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시대에 건립된 듯하다.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유명하며,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경관이 비길데없이 아름답다. 고란약수와 고란초의 전설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 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 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 관북리, 구교리 일원 고란사 041-835-2062
고란사유람선 (낙화암)
유람선을 타고 백제역사를 품에 안고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장대, 낙화암,조룡대,구드래,부산·대재각,자온대,수북정 발길닿는 곳마다, 뱃길 가는 곳마다 백제를 만나볼수 있다.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구드래 선착장 041-835-4689 / 고란사 선착장 041-835-4690
백제역사문화관
백제역사재현단지내에 건립된 백제역사문화관은 출토 유물의 전시가 아닌 백제시대의 중요한 유적이나 역사적 사실을 축소모형이나 그래픽 또는 영상으로 표현하여 관람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예를 들면, 성왕의 사비천도행렬, 사비도성, 미륵사, 정지산 제사유적 등은 축소모형으로 재현하고, 금동대향로, 일본속의 백제유물, 은산별신제, 무령왕릉 등은 영상으로 설명과 함께 보여준다.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575번지 041-830-3600
서동공원과 궁남지
궁남지(사적 제135호)는 선화공주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왕궁의 남쪽 별궁에 속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 35년(634)에 “궁성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현재의 연못은 1965~67년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자연늪지의 1/3정도의 규모이다.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무왕조(武王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직경 4.8m,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 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6-1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1330, 830-2523
만수산자연휴양림
차령산맥 끝부분 만수산(해발 575m) 아래에 자리한 자연휴양림으로 산세가 연꽃처럼 여덟계곡으로 형성되어 경관이 수려하고 노송과 천연림이 조화를 이룬 절경에 각종 야생 조수가 서식하는 곳이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과 맑은 계곡사이에 산막과 복합시설,물놀이장 등 각종 편의 시설이 잘 갖취진 자연휴양림이다
부여군 외산면 삼산리 산 40 관리사무소 041-830-2348~9
부소산(부소산성)
부여에 들어서면 시가지 북쪽에 검푸른 숲을 이룬 해발 106m 의 나지막한 부소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에는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낙화암, 백화정, 사자루, 반월루, 궁녀사, 고란사, 부소산성(사적 제5호), 해맞이하는 영일루, 성충ㆍ흥수ㆍ계백의 백제 충신을 모신 삼충사, 곡식 창고터였던 군창지, 백제 군인의 움집 수혈병영지 발길 닿는 곳마다 발걸음을 붙잡는 토성들,백제의 역사와 백제왕실의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신라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관북리, 구교리 일원
사적지관리사무소 041-830-2512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1330, 041-830-2523
백마강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란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의 금강을 일컫는다. 부소산을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정대, 낙화암, 조룡대, 조각공원이 있는 구드래, 부산ㆍ대재각, 스스로 따뜻해졌다는 자온대, 수북정 등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뱃길이 가는 곳마다 옛 전설이 있다.
부여군 부여읍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830-2523
구드래국민관광지 (구드래공원)
부소산 서쪽 끝자락에 있는 구드래는 백마강과 어울려 빼어난 경승을 이루고 조각공원이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휴식공간이다. 구드래 나루는 백제시대에 도성인 사비성을 출입하는 항구와도 같은 큰 나루였으며, 현재는 백마강을 오르내리는 유람선의 선착장으로 주변에는 토속음식이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식당들이 많이 있다.
1985년도에 국민관광단지로 조성된 구드래에는 옛 백제인의 조각 기술을 이어받은 지역 출신 유명 조각가 작품 30점과 1999년도 국제현대조각 심포지움에 참가한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 29점 등 총 59점의 조각 작품으로 옛 정취와 함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갖춘 공원을 조성하여 관광객에게 상시 개방,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부여 사람들의 휴식처이기도 하며, "백마강과 물새가 울고,일엽편주 돛단배를 홀로 저어가는 사공"으로 시작하여 널리 알려진 '백마강 달밤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왜 '구드래' 라고 부를까? 백제시대 왕을 부를 때 지배족은 어라하(於羅瑕),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다. 구드래는 '구ㄷ으래' 로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에 접두하고 두말사이에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 가 되고 다시 줄어들어 '구ㄷ으래(구드래)'로 변천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또한 '구드래'는 '大王'의 의미로 일본서기(서기 720년 편찬)에 백제를 '구다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 '구다라' 도大王國이란 뜻으로 높여 부른것이라 할 수 있다.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사적지관리사무소 041-830-2512
규암 나루터 (자온대)
규암면 옛 규암 나루터, 곧 백제대교 남쪽에 강옆으로 높이 20여m의 바위, 속칭 엿바위가 자온대로 알려져 있다.『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백제 의자왕이 강 건너 왕흥사로 예불을 들이기 위해 갈 때 이곳에서 잠시 쉬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강쪽으로 돌출한 부분에 우암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진 自溫臺(자온대)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옛 규암나루터 (자온대)
충남종합관광안내소 041-1330, 830-2523
무진암
무진암의 소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리 만수리 125번지이다. 무진암은 비구니 스님의 정갈함이 묻어나는 작은 비구니 암자로, 햇빛이 풍부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예쁜 절집이다.
무진암으로 오는 도중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잘 생긴 소나무가 마치 산개와도 같은 모습으로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소나무의 모습은 마치 높은 이를 경외하고자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낌이므로 놓치지 말고 감상하고 오길 바란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인 무진암은 남쪽을 향해 햇볕이 잘 드는 양지에 있으며, 야트막한 만수산의 줄기를 따라 비교적 평평하고 너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깨끗한 만수산의 자연을 닮아 사역 전체가 맑으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최근에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제법 규모가 큰 대웅전이나 삼성각과 함께 여러 채의 요사를 갖추고 있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125번지 041-836-5092
정각사
바른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정각사. 그 이름처럼 정각사에는 깨달음을 실천한 스님들의 부도가 사찰 입구에 서 있어서 절집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끈다.
몇 천 겁의 인연으로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부도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이끼가 되어 머물러 있었다. 내 발길 끌고 내 눈길 기다린 그 분은 누구였던가? 한때는 부처님을 향해 용맹 정진하여 구도의 길을 따랐을 스님의 이름은 이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마모되고 지워지고 흔적만 남아 공부 짧은 나그네가 아무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음을 모아 보아도 정확히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간신히 한 두 분의 법명을 겨우겨우 찾아내고 작은 기쁨을 가져본다. 이 정각사에는 다섯 분의 부도가 있다던데.... 또다시 주지 스님을 졸라 다른 스님들이 모셔진 부도밭에 가길 조른다. 고희를 바라보는 주지스님은 하룻밤을 정각사에 머물며 절집과 깊은 인연을 맺은 속인들의 청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시곤 깡마른 체구로 축지법을 쓰듯 휘휘 앞서 걸어가는데, 해뜰녁 새벽 공기를 가르며 두 번째 부도밭을 가는 길은 큰스님들의 구도의 길마냥 인상적이다.
절집에서 나와 논두렁밭두렁을 지나 한참을 걸어 억새풀이 사람 키보다 더 큰 실개천을 건너 야트막하나 낙엽이 한 자나 쌓여 발 디딜 길을 잘못 찾아 푹푹 빠지거나 헛디뎌 가곤 했다. 그러길 10여분이 지나자 줄지어선 것같은 송림 사이로 나란히 서 있는 세 기의 부도가 한 눈에 들어 왔다. 드디어 부도밭에 다 온 것이다. 종 모양을 닮거나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아담하게 서 있는데 스님의 법명이라도 알아내려고 손을 더듬고 만져 확인한다.
이처럼 정각사는 그 역사가 다 밝혀지진 않았으나, 마을 이름이 정각리라고 할 만큼 한때는 꽤 규모 있는 사찰이어서 이곳에 인연을 지은 여러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지금도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언덕에는 법당이 서 있고, 그 곳에서 사방을 내려보면 부처님의 큰 법이 온누리에 가득차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354 정각사 041-836-6413
부여 청마산성
부여 능산리 월명산에 있는 백제 산성으로, 당시 수도였던 사비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 골짜기를 성 안에 두고 산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전반적으로 성벽이 많이 무너져 있으나,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계곡의 물이 흐르는 서쪽 성벽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성이라 남문이 없다.
현재 성안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높이 쌓은 망대와 각시우물이라 전하는 우물터, 경룡사터, 의열사터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석성산성·성흥산성·증산성과 함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서 의미가 크다. * 면적 - 415,808㎡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1-1 문화재청 042-481-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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