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의 암시장에서 1달러는 약3000원이다. 노동당 부부장급의 월급이 약 5000~6000원이니 2달러인 셈이다. 1억5000만 달러라면 2100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석 달 정도 먹고살 수 있는 돈이란 이야기이다. 金正日은 1995년부터 5년간 大飢饉(대기근)으로 300만 명의 동족이 굶어 죽어도 당시 4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던 해외 비자금에서 한 푼도 식량구입에 쓰지 않았다.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였던 黃長燁(황장엽)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한 간부가 『군사용 備蓄米(비축미)를 꺼내 굶고 있는 주민들에게 나눠 주자』고 건의했다가 金正日에게 혼이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런 구두쇠 金正日이 1억5000만 달러짜리 불꽃놀이를 벌인 것은 스위스·싱가포르·마카오 등지에 숨겨 놓은, 6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되는 자신의 비자금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러면 우리 체제는 무너집니다』
지난 1월17일 北京인민대회당에서 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하는 金正日. |
지난 1월 金正日이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親北(친북)어용 언론들은 金正日이 중국으로 개혁·개방을 배우러 갔다고 희망적 보도를 했다. 金正日의 訪中(방중)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時事 주간지 「뉴스위크」가 입수한 국가주석 胡錦濤(호금도)-金正日 회담록에 따르면 金正日은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부시의 對北 금융제재가 계속되면 우리 체제는 무너집니다』
작년 11월 부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頂上(정상)회의 참석차 한국에 온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盧武鉉 대통령은 직접 對北 금융제재의 문제점을 거론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은 自國(자국)화폐를 위조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善處(선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 뒤 盧武鉉 대통령과 國情院(국정원)은 북한이 위조달러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강변했으나 국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 뒤 사태는 親北정권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흘러갔고, 盧武鉉 정권은 對北 금융제재를 주도하는 미국 및 일본과 멀어지는 바람에 구경꾼으로 밀려났다가 미사일 발사라는 치명타를 맞은 것이다. 盧정권은, 韓美동맹과 韓·日 우호관계를 악화시켰기 때문에 對北 영향력도 잃고 만 것이다.
작년 9월부터 시작된, 달러 위조 등 북한의 국제범죄 저지를 명분으로 한, 부시의 조용한 金正日 목조르기는 金正日과 공동운명체임을 자임한 한국의 左派(좌파)정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다.
작년 9월 이후 북한과 거래를 트고 있던 몇 안 되던 국제금융기관들도 거래를 끊기 시작했다. 스위스의 주요 은행 등 20개 이상의 은행들이 거래를 단절했다. 북한과 거래를 하다가는 달러 위조, 마약밀매, 가짜 담배 제조 등 북한정권의 국제범죄 자금을 관리해 주는 기관으로 찍힌다는 경계심이 퍼져 갔다. 북한자금을 관리하다가는 미국 은행들과 거래를 금지당할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은, 미국이 북한정권의 국제범죄자금 및 金正日의 비자금 창구였던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을 표적으로 삼아 미국 금융기관에 대해서 이 은행과 거래하지 말 것을 명령하자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이 간단하게 부도사태로 몰리는 것을 보았다. 세계의 어느 은행도 미국의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게 되면 문을 닫아야 한다. 세계 금융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은 이 「傳家(전가)의 寶刀(보도)」를 칼집에서 꺼낸 것이다.
국제은행을 이용하기가 어려워지니 북한의 정상적 무역거래도 어려워졌다. 무역결제를 달러 현찰로 해야 되는데 북한사람들이 가져온 달러를 믿을 사람이 없다. 중국사람들은 북한사람들로부터 물건값으로 달러 현찰을 받을 때는 위조달러가 일정량 들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만큼 값을 올린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북한 노동당의 한 간부가 외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북한 은행으로부터 7000달러의 현찰을 경비로 받아 떠났다. 출장지에서 그 돈으로 호텔값을 내니 100달러짜리 몇 개가 위조로 밝혀졌다. 그래서 7000달러 전부를 검색기에 걸어 보았더니 2000달러가 위조임이 밝혀졌다. 곤욕을 치른 그는 귀국하자마자 위조달러 뭉치를 갖고 은행으로 달려가서 따졌다. 은행에선 『우리는 그런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더라고 한다.
金正日의 스트레스
金正日은 자신의 해외 비자금 줄이 목졸림을 당하는 사태를 만나 1990년대의 大기근 때보다 더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통치하기가 쉽다』고 公言(공언)한 그였다. 통계상으로도 이 大기근 때 가장 많이 굶어 죽은 층은 북한정권이 敵對(적대)계층 내지 동요계층으로 분류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일본 공산당 기관지 「赤旗(아카하다)」의 평양특파원 출신 하기와라 료氏는 300만 명이 굶어 죽은 사태를 「金正日의 餓殺(아살: 굶겨 죽임)」이라고 표현했다. 金正日이 大기근을 악용해 일종의 인종 청소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對北 금융제재가 大기근 사태보다 더 큰 위기로 인식된 것은 金正日을 필두로 하는 북한 지배층에 대한 직격탄이었기 때문이다. 金正日은 해외 비자금을 주로 측근과 一家(일가)의 호화판 생활비, 黨과 軍, 그리고 탄압기구 간부들에 대한 善心用(선심용), 對南공작비, 핵 및 미사일 개발비용으로 써 왔다. 이런 돈줄이 막히면 지배층 안에서 金正日의 권위가 손상된다. 더구나 달러 위조, 마약밀조·밀매는 모두 金正日의 직접 지시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金正日뿐이고,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사람 또한 金正日뿐이다.
1990년대에 金正日은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제에 손을 대면 경제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군대 및 통일사업만 챙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져야 할 大기근 사태의 ?湛?노동당의 농업담당 비서 서관희에게 轉嫁(전가)하여 처형하고, 이미 죽은 정무원 前 농업위원장 김만금의 시체를 꺼내 총질을 하게 한 金正日이 금융제재에 대해서는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없다. 그는 더욱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이다.
金正日의 발작적 미사일 발사 도발을 부른 것은 부시가 직접 지시한 對北 금융제재이다. 이 사태의 핵심은 金正日의 돈 문제이고, 부시의 신념 체계이다. 부시-金正日의 자존심 대결인 면도 있다.
부시는 『金正日, 이자의 이름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집어진다』고 말한다. 그의 對北觀(대북관)은 간단하지만 핵심을 찌른다.
『주민들을 굶겨 가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거대한 수용소를 운영하는 독재자』가 金正日이다. 부시가 그런 열정을 담아서 조용하게 金正日의 자금줄을 조르니 金正日은 부시의 60회 생일을 앞둔 미국의 생일에 맞추어 나름대로의 불꽃놀이를 벌인 것이다.
고립된 金正日
지난 5월24일 100달러 위조지폐를 감정하고 있는 일본 僞幣전문가들. 「슈퍼 Z」로 명명된 이 위조지폐는 북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僞幣의 일부를 확대한 사진과 400배로 확대한 진짜 지폐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眞僞 여부를 판별한다. |
對北 금융제재는 기획부터 발동까지 부시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 이 제재는 그 前단계인 수사와 증거수집에 미국의 10여 개 정보수사기관이 3년간 동원되었고, 수사범위도 汎지구적이었다.
미국 수사팀은 위조달러를 유통시키는 중국계 조직범죄자들을 잡기 위해서 마피아로 위장했다. 이들은 위장 회사를 만들어 중국계 범죄꾼들을 뉴저지의 도박도시 애틀랜틱 시티로 초대했다. 모임은 결혼식으로 위장했다. 롤렉스 시계를 찬 범죄꾼들은 예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들을 태운 차는 결혼식장이 아니라 감옥으로 직행했다.
미국 수사팀은 北아일랜드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아일랜드 혁명군(IRA)의 지도자 숀 갈란드를 기소했다. 갈란드는 아일랜드로 도피한 상태이다. 그는 오랫동안 소련의 KGB 및 북한 정보기관과 접촉해 오면서 주로 북한이 제공한 위조달러를 받아 유럽에 퍼뜨리는 일을 했다고 한다.
金正日 비자금 목조르기는 부시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下에 汎정부적으로 입안되고 추진된데다가 효과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것은 金正日의 신경질적이고 초조한 태도로 드러났다. 金正日은 北核 문제 해결을 위한 北京 6者회담 참석을 거부했다. 미국과 직접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고 나왔으나 미국은 범죄 문제는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잘랐다. 金正日 측은 위조달러범을 엄단하겠다고 굽혔으나 미국 측은 『달러 위조 인쇄기를 파괴하고 그 銅版(동판)을 제시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북한 측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이 동결한 우리 돈(약 2400만 달러)을 풀어 주면 6者회담에 복귀할 것이다』라고 노골적인 구걸까지 하기에 이르렀지만 미국은 못 들은 척하고 있다. 金正日이 아무리 방방 뛰어도 중국은 북한 편을 들 수 없었다. 북한 측 계좌를 많이 열어 주고 무역의 편의를 제공해 온 것이 중국 은행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앙은행인 중국은행도 이와 관련하여 미국 측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처지였다. 年間 1600억 달러의 對美무역흑자를 올리는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금융보복을 유도할 일을 할 수는 없었다. 盧武鉉 정권만이 『북한이 달러를 위조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면서 미국과 맞서는 시늉을 하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이로써 金正日은 고립되고 盧정권은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金正日의 북한약탈과 公金횡령
지난 5월12일 일본 경찰은 사카이港에 입항한 북한 화물선 두루봉號를 마약을 찾기 위해 수색했다. |
미국은 이번의 미사일 발사 도발을 계기로 金正日에 대한 목조르기를 더욱 깊게 할 채비를 차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미사일 발사 사태 이후 기자들에게 『金正日에 대해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엔을 통한 對北 제재가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막힌다면 미국은 우방국들과 함께 對北 금융제재의 폭과 깊이를 확대할 것이다. 예컨대 북한의 국제범죄를 돕는 금융업무뿐 아니라 북한정권이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현금을 제공해 주거나 금융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외국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미국 금융기관이 거래를 해선 안 된다는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국과 한국의 상당수 은행들도 對北송금 업무를 중단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도 타격을 받는다. 한국의 국방연구원은 對北 현금 지원이나 지불은 「黨자금화」되어 군사력 강화에 쓰일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2000년 6월 金大中 대통령이 頂上회담을 매수하기 위해 국정원을 통해서 金正日 비자금 관리은행인 대성은행의 홍콩內 계좌로 거액을 송금할 때 국정원 김보현 차장은 『이 돈이 군사비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진술한 적도 있다.
미국은 중국이 유엔의 對北결의안에 반대할 경우엔 중국의 금융기관에 대한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다. 미국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金正日의 비자금을 동결시킨다면 金正日은 회복불능의 치명타를 맞는다. 이래저래 미사일 도발 때문에 金正日의 돈줄은 더욱 경색될 것이고 그의 권위도 약화될 것이다. 이는 급격한 북한 내부의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을 높여 준다.
對北 금융제재와 미사일 발사 도발의 배경이 되는 「金正日 해외 비자금」의 성격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돈은 북한에 있어야 할 북한주민들의 公金(공금)이다. 이 돈은 북한사람들의 땀과 北韓産(북한산) 자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金正日은 1980년대부터 외화벌이 사업, 즉 비자금 조성을 독려했다. 북한사람들은 전국의 山野(산야)를 헤매고 다니면서 砂金(사금)을 캐고, 송이버섯을 키우고 금광을 개발했다. 기업소는 本業(본업)보다 이 사업에 주력했다. 군대는 헤로인, 필로폰 밀조·밀매 공장을 직접 운영했다.
북한정권은 가짜 담배, 가짜 의약품, 가짜 달러를 만드는 거대한 국제범죄조직으로 전환했다. 외국 주재 대사관들과 외교관들은 마약밀매, 가짜달러 유통의 네트워크 역할을 했다. 이런 국제범죄 규모는 1990년대 후반부터 커져 연간 10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게 됐다.
金達玄 호소: 『金正日 횡령으로 북한경제 망가져』
『金正日의 횡령으로 북한경제가 망가졌다』고 비판하다 자살한 金達玄 前 북한 부총리. |
이런 범죄와 무역으로 벌어들인 자금은 북한의 경제구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金正日이 직접 관리하는 노동당 자금(중앙당 재정경리실, 즉 39호실 자금)으로 들어가 巨額이 스위스·마카오·싱가포르·홍콩으로 빼돌려졌다. 이렇게 조성된 金正日의 해외 비자금은 본질적으로 북한주민들과 북한의 자원을 약탈하고 횡령한 북한의 公金인 것이다.
故 申相玉(신상옥) 감독이 金正日 정권을 평할 때 쓴 말이 「마적단」이었다. 북한이라는 마을을 점령하고 약탈하여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호화판으로 생활하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집단이란 뜻이다.
「金正日 횡령 비자금」이 많아질수록 수탈당한 북한경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경제가 瀕死(빈사)상태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사회주의 경제권의 몰락이 아니라 金正日이 공금을 빼돌려 비자금화한 때문이라고 호소한 사람이 바로 金達玄(김달현) 부총리였다. 金부총리와 친했다는 한 고위급 탈북자 A씨(70代)는 金씨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울분을 터트리더라고 증언했다. 金達玄이 1988년에 정무원의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이 된 뒤의 이야기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우리가 타격을 본 것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에 들지도 않았고 그들 국가와 바터 무역을 조금 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대신 동남아시아와 일본으로 무역을 확대했다.
내가 정무원의 국가계획위원장이 된 뒤 보니까 무역으로 들어오는 자금이면 경제를 돌릴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수출한 돈이 正門으로 들어오지 않고 黨으로 빼돌려져 대성은행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조선은행과 무역은행은 빈털터리다. 송이버섯을 수출하여 연간 9000만 달러를 버는데 다 빠져나갔다. 스위스 은행에 잠긴 돈이 최소한 40억 달러는 된다.
金正日 동지 때문에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 電力(전력)도 내각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도 안 된다. 100개가 넘는 별장에는 수령님이 머물지 않더라도 전기를 끊을 수 없다. 그 수많은 혁명 史蹟址(사적지)에 대해서도 전기를 끊을 수 없다. 군수공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 북한에서는 흥남비료공장의 현대화가 필요해졌다. 한때 연간 160만t의 유안비료를 생산하던 이 공장은 日帝 때의 낡은 시설을 교체하지 못해서 생산량이 줄고 있었다. 관련 기술자들은 공장을 현대화하는 데 외국에서 약 1억5000만 달러어치의 시설을 도입해야 한다는 계산을 하여 金達玄과 상의했다. 金達玄은 金正日에게 외화 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건의했다. 金正日은 거절했다. 자신이 해외로 빼돌린 공금을 비료공장 재건에도 쓰지 않으려 했다.
金達玄이 자꾸 이런 건의를 하자 金正日은 노동당 조직부 생활지도과를 시켜 그를 불러 혼을 내게 했다. 생활지도과에 불려가면 副총리급이라도 반말과 욕설을 듣고 나온다고 한다.
고위급 탈북자 A씨는 『아직도 김달현의 울먹이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생활지도과에선 金達玄을 불러다 놓고 「왜 당에다 대고 돈 달라고 하는가」라고 추궁했다고 합니다. 「외국에 돌아다니더니 노랑물이 들었는가」라면서 「왜 우리 것을 낮추어 보는가. 노동계급의 혁명의식을 조직하고 동원하면 해결할 문제를 왜 외국돈에 의존하려고 하는가. 자기 검토를 하라」고 하더랍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을 시켜서 「反黨反革命(반당반혁명)분자를 축출하라」는 시위를 벌이게 했으니 흥남비료공장 현대화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흥남비료공장은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年産 5만t까지 떨어졌습니다. 북한 식량난의 근본 원인은 비료 부족이었습니다. 1990년대 말에 金達玄이 자살한 것도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金大中이 巨額의 선물을 바쳤다』
고위급 탈북자 A씨는 金正日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이 바로 북한경제를 망친 主犯이라면서 金大中과 盧武鉉 두 사람은 『비자금을 보태 주고 그 비자금을 보호해 주려는 민족의 반역자이다』라고 격분했다.
『2000년 6월 金大中-金正日 회담 직후 평양에서 중앙부서 부부장급 이상을 모아서 당 선전부가 강연을 했습니다. 요지는 金大中이 흰 깃발을 들고 거액의 선물을 바쳐서 이뤄진 것이 평양회담이란 것이었습니다.
강연자는 햇볕정책은 이번 회담으로써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金大中이 북한체제를 존중하고 평화공존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엘리트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金大中이 金正日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나갔을 것이라고 지금도 아쉬워합니다. 평양회담 직전에 엘리트층 안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A씨는 黨·정부·군대의 고위직에 올랐던 김달현·연형묵·강성산·현철해·오극렬 같은 혁명 2세대 그룹이 그래도 비판의식과 「애국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 김달현·연형묵·강성산 등 혁명 2세대는 「金正日이 해외로 자금을 빼돌려 북한경제가 망가지고 있는 실상」을 金日成에게 直訴(직소)하여 金正日이 경제문제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총리 출신인 강성산이 그 惡役을 맡았다. 비로소 金日成은 경제파탄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는 黨 회의에서 金正日을 향해 화를 내면서 『이제부터는 내가 경제를 다루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金正日의 해외 비자금 문제를 제기했고, 金正日은 그 돈이 조국통일사업 등에 잘 쓰이고 있다고 변명하는 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金日成의 죽음과 스위스 비자금 관계
金日成은 金正日과의 후계자 경쟁에서 져 僻地(벽지)에 내려가 있던 동생 金英柱(김영주) 前 노동당 조직부장을 불러올려 부주석으로 앉혔다. 1992년 金日成의 80회 생일잔치 때 성격이 급한 金英柱는 金正日을 가리키면서 험한 말도 했다고 한다. 1994년 들어 한국의 安企部(안기부)도 북한권력층 내부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金日成이 前面에 나오고 金正日이 실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金正日은 권력의 실무부서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아버지를 감시下에 놓고 있었다.
1994년 7월 말로 예정되었던 남북 頂上회담은 父子 갈등을 깊게 만들었다. 金日成은 金泳三 대통령을 만나 경제지원을 받을 생각이었고 서울 答訪(답방) 가능성까지 검토했지만 金正日은 반대했다. 1994년 7월8일 묘향산 별장에서 金日成이 심장마비로 죽었을 때 그 곁에는 주치의사도, 수입해 온 심장소생器機도 없었다.
고위급 탈북자 A씨는 『金正日이 金日成을 죽였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나 죽음을 유도했거나 방치했다는 의심은 많이 간다』고 했다. 金正日은 金日成이 죽자 한때 아버지 편에 붙으려고 했던 간부들을 숙청했다. 상당수는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되었다. 金日成이 죽음으로써 혁명 2세대의 꿈은 사라졌다. 김일성 父子의 갈등과 수상한 죽음을 부른 것도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金正日의 비자금이었다.
이틀 동안 A씨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기자는 「金正日의 비자금」이야말로 북한 비극의 진짜 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비자금 구조를 파괴하려는 부시의 對北 금융제재가 타협 없이 진행된다면 金正日은 실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A씨는 이렇게 말했다.
『對北 금융제재를 부른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은 오랫동안 북한 무역의 창구였습니다. 이 은행만 북한사람들이 가져온 달러를 출처를 묻지 않고 받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짜 달러 유통, 범죄자금 세탁을 하게 된 것인데 이 은행도 북한 돈을 취급하여 그동안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요사이 무역일꾼들의 불만이 대단합니다. 金正日 때문에 정상적인 무역이 지장을 받고 있는데다가 金正日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북한은 모든 기관, 심지어 군부대까지도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서 무역회사를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데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金正日은 초조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찬스입니다』
『대포동 2호 발사실험은 성공한 것』
A씨는 덧붙였다.
『金正日이 미국과 직접 담판을 하면 금융제재 해제와 평화협정 체결을 조건으로 핵무기 포기를 포함한 상당한 양보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는 데만 신경을 쓰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입니다.
문제는 그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하더라도 실제로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란 점이에요. 그렇다면 미국이 속지 않을 것이고 美北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신용이 떨어진 지도자의 비극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판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軍需(군수), 과학기술 계통에 밝은 이 고위급 탈북자 A씨는 金正日의 미사일 발사 도발에 대해서 아주 흥미 있는 분석을 했다. 대포동 2호가 발사된 지 40초 뒤에 공중폭발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金正日은 이 대포동 2호를 미국을 향하여 쏠 만큼 무모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1998년 시험에서 대포동 2호는 3단계까지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번에 실험하고 싶었던 것은 1단계 로켓의 추진력을 증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단계 몸통에 엔진을 추가하여 쏜 것인데, 이 추진력을 시험하는 데는 발사 후 40초면 충분합니다. 2, 3단계 분리 시험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어장치도 달지 않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번 실험은 절대로 실패작이 아닙니다』
『SS-22 미사일 실험했을 것』
지난 7월5일 북한 미사일 발사 사실을 발표하는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 |
A씨는 또 다른 첩보를 내놓았다. 발사된 여섯 발의 추정 노동 미사일과 추정 스커드 미사일 중 하나는 북한식 SS-22 중거리 미사일이란 것이다. 북한 군부는 노동 미사일보다도 스커드 미사일을 좋아한다. 노동 미사일을 쏘는 데는 연료주입이나 充電(충전)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발각되기도 쉽기 때문이다.
2000년 무렵부터 북한 과학원은 SS-22 미사일 모방 설계를 완성해 試製品을 만들었고, A씨는 그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미사일은 물론 핵무기 운반용이다. SS-22는 스커드 미사일보다 사정거리는 길고(약 900km) 적중도가 높다. 북한이 폐기된 SS-22 설계도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SS-22는 1979년에 소련이 SS-12 중거리 미사일을 대체하면서 배치한 신형 미사일에 서방 측이 붙인 이름이다. SS-22는 스커드 B형을 개량한 것이고, 같은 發射車臺(발사차대)를 쓴다. 소련은 이 미사일을 소련 영토에 배치하고서도 西유럽의 대부분을 사정거리 안에 두었다. 연료는 고체, 길이는 12.4m, 무게는 9700kg, 장착하는 핵탄두는 500kg이다. 미국과 소련은 1987년에 사정거리가 500~5500km인 핵탄두 장착용 미사일을 서로 폐기하기로 합의하여 2년 안에 실행했다. 소련은 1989년 7월25일에 SS-22를 최종적으로 폐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SS-22가 쿠바로 밀반출되었다는 미확인 소문이 돈 적이 있다. 이번 미사일 발사 도발에서 가장 정확한 정보수집 능력을 보여 준 일본은 발사 직후부터 「신형 스커드」가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방위청 장관은 지난 7월8일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서 『스커드 미사일의 능력을 높여 노동 미사일에 가까운 비거리를 가진 신형 스커드를 시험한 것이 아닌가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A씨의 주장대로 SS-22 미사일 시험발사가 성공했다면, 이는 金正日이 한국과 일본을 위협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무기를 하나 더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SS-22의 사정거리라면 일본의 중부지방까지 포함된다. A씨는 북한 과학자들이 아직 믿을 수 있는 핵폭탄을 만들지 못했고,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을 정도인 500kg까지 소형화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으나 성공했다고 金正日에게 허위보고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진정한 사회주의자와 손잡아야』
A씨는 『북한 정권 내부에 反김정일 개혁세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그는 『그 개혁세력이 자유민주주의자이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고 주문했다. 김달현·연형묵 등 혁명 2세대로 대표되었던 이들은, 金正日이 사회주의를 파괴한 자이므로 사회주의를 再建(재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金正日은 사회주의자의 허울을 쓰고 金氏王朝를 통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해외로 빼돌린 자금이 專制왕국에서 이뤄진 일이라면 좋다 이겁니다. 왕족들이야 별도의 경제권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자는 사회주의를 자칭하면서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金正日은 권력을 세습하고, 배급경제를 망쳐 주민들을 굶겨 죽임으로써 북조선의 사회주의를 스스로 파괴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애국심이 있는 북한의 진짜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김씨왕조를 타도해야 합니다. 한반도의 左右가 같이 金正日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것은 善과 惡의 싸움이 아니라 악마와의 싸움입니다』
고위급 탈북자 A씨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2000년의 6·15 회담을 보고 평양의 양심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代는 이렇게 살다가 가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푸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부시의 금융제재가 들어가니 그들도 다시 희망을 가질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金正日을 압박해 주는 것이 이들 사회주의자를 격려해 주는 일입니다.
외부의 金正日 압박이 강해지고 金正日이 수습하지 못한다면 궁정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먼저 金正日 가족內에서 叛旗(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개혁주의자들이 합세하면 金正日에게 경제관리권을 내놓으라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金正日이 경제권을 내놓으면 그것이 몰락의 시초가 되겠지요. 그런 뒤에 鄧小平식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북한체제의 목표가 對南적화가 아니라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될 때 비로소 남북관계가 개선될 것이고, 이때엔 한국이 주도하는 남북연방제도 가능할 것입니다. 金正日을 상대로 연방제를 한다니까 반대가 많겠지만 시장주의를 지향하는 애국적 사회주의자를 상대로 한 연방제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북한 체제의 실권을 잡고 있는 그룹은 김일성대학 출신으로서 金正日의 선후배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金正日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친다. 혁명 2세대는 그래도 동구권 유학 경험이 있고 사회주의적 열정도 있어 「金大출신」과는 다르다고 한다.
『왜 한국은 新羅처럼 하지 못합니까?』
고위급 탈북자 A씨는 『최근 고구려史를 읽고 있는데 멸망기가 지금의 북한하고 너무나 비슷한 데 놀랐다』고 말했다.
『金正日이 연개소문과 너무 닮았어요. 포악하여 民心(민심)을 잃고, 최강국인 唐(당), 미국과 대결하는 모습도 비슷하고요. 작은 나라는 최강대국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왜 싸우는 길을 찾습니까. 그래서 고구려가 망했고, 북한도 망해 가지 않습니까?
철부지들은 연개소문이 唐과 싸운 일은 잘한 것이라고 보는 모양인데, 그때 인민들이 얼마나 전쟁에 시달렸습니까? 民心은 唐이 쳐들어와서 연개소문을 타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돌았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그렇게 시달리는 인민들을 동원하여 千里長城(천리장성)까지 쌓았습니다. 외교를 잘 하면 되는데 그런 바보짓을 한 것입니다.
지금 金正日이 미국을 敵으로 만들어놓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게 허무한 천리장성을 쌓는 일 아닙니까?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이 분열하여 한 아들은 唐으로 달아났고 결국은 唐軍을 안내하여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중국은 金正日의 장남 正男이를 관리하면서 북한內의 혼란에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탈북자 A씨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북한은 망해 가는 고구려인데 왜 대한민국은 新羅처럼 행동하지 못합니까?』
목숨을 건 외교로써 羅唐(나당)연합을 만든 金春秋(태종무열왕), 兵權(병권)을 쥔 제2인자로서 네 왕을 모시면서 삼국통일을 무력으로 뒷받침한 金庾信(김유신), 對唐결전으로써 민족통일을 완수한 文武王 같은 인물을 그리는 말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런 영웅들의 출현보다도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뿌리 깊게 내리는 작업을 통해서 통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는 자유의 나무가 巨木이 될 때 북한을 그늘 속으로 품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