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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성범과 허 성주가 보고 싶어진다.
내 나이 70이 어느새 오고 말았다. 70에 들어서니 따분한 현재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미래와 지나온 날들 속에서의 일들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된다. 어제 저녁엔 아내와 식사를 하면서 귀엽기 짝이 없는 어린 손주들과 자식들 이야기를 하며 이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짧으면 1~20년, 길면 30년밖에는 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둘이서 눈시울을 적셨다. 아옹다옹 살았던 세월이 화살처럼 빨리 갔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일이 벌써 아쉬워졌나보다.
2003년의 일이다. 2002년 말에 성수동 2가1동 570-1번지 2층에 종소리교회라는 작은 예배 처를 개척하였다. 2003년 교회개척원년에 윤 상운 목사님께서 어느 불쌍한 가정을 소개하시며 인터넷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아, 같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으로 그 사람을 찾아 갔다. 기타를 잘 치고 교회음악 시스템을 잘 다루는 청년인데 아내는 가출하고 7살 아들과 5살 딸이 있는데 오도갈대가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난 동아건설에서 퇴직하고 무직으로 있었고 광진구 자양동588-14번지 동성주택307호에 거주하며 (지금은 번지가 없어지고 자양동591-13(자양강변길301) 하나플러스아파트가 들어 섬) 지하실 방 2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비어 있어서 그곳으로 이 가족을 유치하고 보살펴 주기로 하여 살림도구 등을 승용차 각그랜저(아이들 아빠 허 명조 소유)에 실고 이주를 시켰다.
예쁜 손자 손녀 같은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집 앞 뚝섬유원지 나무 그늘 밑을 찾아다니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던 기억들이 오늘에서야 더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그 뜨겁던 2003년의 여름 불현 듯 아이들이 불쌍하여 그 어머니를 찾아 연결을 시켜 주고 싶은 알량한 오지랖이 발동하여 그 해 그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답십리를 찾아 수소문해 집을 찾았고 아이들 외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하였으나 완강히 연결을 원하지 않아 아픈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 아이들이 오늘 따라 몹시 보고 싶어졌다. 이제는 거의 숙녀가 다 됐을 성주와 씩씩한 군인이 되었을 성범이가....
아이들 아빠는 정해진 일자리가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살 궁리를 한다지만 특별한 벌이가 없으니 생계유지비로 기십 만원씩 돈을 요청하였고 차량유지비로 50만원씩 몇 차례 돈을 요구하기도 하여 불쌍한 마음에 요구를 들어 주었고 그런 돈이 자그마치 2천여만 원이나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아이들 아빠를 통해 교회 드럼 시스템이 들어 설 수 있었고 그 아이들 아빠 친구를 통해 교회 인테리어를 값싸게 1천만 원에 할 수가 있었으니 나로서는 위의 2천만원보다 더 많은 걸 신세진 것 같은 깨달음을 요 몇 달 전에야 깨달을 수가 있어서 하나님께 원망한 걸 회개하고 감사한 기억이 난다. 하나님은 실로 실패 같은 것을 성공으로 이끄시고 성공 같은 것을 실패케 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으로 이끄심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엔 금전 문제가 얽혀 서로가 헤어지기로 하여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724-6, 3층303호에 보증금300만원, 월세35만 원짜리 방을 얻어 주고 그곳으로 이주를 시키고 우린 헤어졌다.
이런 슬픈 이야기가 있은 지 16년이 지났으니 아이들이 궁금하기도 하여 인터넷으로 아이들과 아빠 이름을 검색하여 겨우 2008년도 5월의 내역을 찾을 수 있었다. 살던 곳 작은 교회에 어린아이들이 입교하여 카페에 올려놓은 사진이 있었다. 교회를 수소문하여 연결하면 아이들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하여 수소문 하였으나 교회는 문을 닫았고 교회 담임목사님은 몇 년 전에 중국선교사로 나갔다는 연락을 받았고 아이들과 아이 아빠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올리지 않겠다.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결국 아이들이 보고 싶어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어 또 다음 시간을 예약해 본다. .~ 끝 ~
2019.5.29. 설 현도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