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해서 다른 글이나 이 카페에서도 종종 보았었는데요.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에 내용이 잘 정리가 된 것이 있어서 구분선 아래에 첨부합니다. 초신자나 교리를 잘 모르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불가해성
존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모가 어린아이를 대할 때 말하는 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했다. 즉 부모가 자신의 어린아이를 부를 때 "아기의 말”로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미천한 인간인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하나님을 완전히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하는 내재된 장벽이 존재한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시다. 바로 이것에 우리의 문제가 있다. 어떻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가? 중세 신학자들은 이후의 모든 신학오세연구를 위한 지배적인 격률이 되었던 어구, 곧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파악할 (또는 담을) 수 없다”라는 어구를 내걸었다. 무한한 대상이 유한한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이런 격률이 정통 기독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를 전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성" 교리다. 이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인간 이해를 초월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논의는 단지 신학적인 수다에 지나지 않고 기껏해야 우리는 미지의 신에 드려지는 제단소을 맡았을 뿐임을 시사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담고 있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지식이 부분적이고, 제한되고, 완전하거나 포괄적인 지식에 미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서 자신에 대해 주신 지식은 실제적이고 유용하다.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만, 유한한 존재는 결코 무한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보다 항상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성경은 이런 사실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루터는 하나님의 이런 두 측면을 감추어진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으로 언급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일부분은 우리 시야에서 감추어진 채로 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으로 그만큼 나아간다.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 p.689.
첫댓글 좋은 인용도 좋은 포스팅인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기독교강요 예정론에 나오는 불가해성
https://cafe.daum.net/1107/Y4cZ/33
네, 역시 다시 보아도 좋은 칼빈의 설명입니다.
저는 이번에 읽었는데요. 칼빈의 설명에 매우 공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 수는 있지만 다는 알지 못한다. 성도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포스팅에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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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교리를 알기 쉽게 잘 썼네요. 많은 공부가 됩니다. 감추어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에게 하듯 말씀하셨다는 내용들도 좋네요.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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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 올려 주셔서 저에게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