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2)
지난 7월 초에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었다. 마침 미국의 「산타크루즈」에 갈 일이 있는데 작가의 고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산타크루즈」에서 작가가 살았던 「살리나스」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다. 그동안 몇 차례 「산타크루즈」를 방문했는데 주로 풍광이 뛰어난 「몬테레이」만을 찾았었다. 무엇보다 최고의 명문 골프장이 있는 「페블비치」 지역과 「싸이프러스」 나무가 장관인 「17마일 드라이브 코스」숲길, 그리고 태평양의 파도를 이겨낸 바위와 모래사장, 각 종 바다 생물과 철새 떼의 울름소리, 미국에서도 최고의 주거지로 이름난 저택이 즐비한 일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일대는 태평양의 파도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해안선을 따라 아름답게 우거진 숲이 장관을 이룬다. 더구나 주변의 풍부한 해산물과 연중 내내 온화한 기후는 최고의 주거지로 손꼽힌다. 특히 한 여름에도 해변에서 가까운 지역의 기온이 높지 않다. 밤새 바다의 수증기가 해무(海霧)를 만들어 그 폭이 상당한데 주로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다. 이 해무가 끼는 지역은 한 낮의 햇빛이 차단되어 우리의 봄이나 초가을 날씨와도 같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해무는 그 지역을 벗어나면 기온이 급상승한다. 그래서 특히 해안가에 근접한 지역일수록 풍광도 멋있고 기온도 온화하여 집값조차 비싼 편이다.
이번에는 「몬테레이」와 가까운 곳에 있는 「살리나스」를 찾았다. 작가의 고향인 「살리나스」는 노벨상 수상작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와 『에덴의 동쪽(EAST OF EDEN)』 등의 배경이 된 곳이다. 먼저 「존 스타인벡」의 생가(生家)에 들렸다. 상당히 잘 보존된 집으로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곳이다. 지금은 레스토랑으로 점심시간에만 식사가 제공된다. 구석구석에 작가와 관련된 사진과 소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근무하는 봉사자가 안내와 설명을 해준다. 작가의 가족사진을 포함한 애용하던 개인 용품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지하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이곳에도 각 종 유년기의 자료와 어린 시절에 사용하던 침대까지 보존되어 있다. 세 번 결혼한 그에게는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THOMAS STEINBECK)도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어서 정부가 주관하여 인근에 조성한 국가기념관(NATIONAL STEINBECK CENTER)을 찾아보았다. 유료입장인 이곳에도 그가 남긴 유산과 일생 및 작품을 조망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가 살아 있다. 전시실 입구에 연필과 노트를 들고 있는 동상이 반겨준다. 평시 연필로 집필했던 작가의 애용연필은 기념품으로 판매된다. 주로 작품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쉽게 작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6개의 「SET」로 구성된 기념관은 거의 모든 작품이 시대적 배경과 함께 사진 자료로 뒷받침되어 있었다.
『분노의 포도』는 물론이고 『RED PONY』와 『Cannery Row(통조림 공장 골목)』등도 작품별로 세부적인 설명이 되어 있다. 누구라도 작품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한 중앙에는 스스로가 최고의 작품이라 일컬은 말년의 작품인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최고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원죄와 그 무거운 짐을 벗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내 평생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들어있다.’라는 작가의 말이 흥미롭다. 영화로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추억의 명화로 알려졌는데, 당시 청춘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이 출현한 영화의 장면이 연속해서 상영되고 있다. 소품으로 쓰였던 자동차가 아직도 멋진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더구나 둘째 아들이 베트남 전에 참전했는데 당시 「존슨」 대통령이 이들 부자와 만난 자료도 있다. 전쟁에 대한 개입의 명분이 악화되던 시기에 노벨상 수상작가의 아들의 참전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별도의 공간에는 작가의 「Arts & Culture Gallery」가 마련되어 다수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1962년 노벨상 수상식에서 행한 연설도 반복해서 나오고, 말년에 애완용 개(Charley,찰리)를 데리고 4개월가량 미국의 전역을 여행했던 당시의 차량(트럭을 개조한 캠핑카)도 보존되어 있다. 그는 그 차량을 『동키호테』에 나오는 말의 이름인 「Rocinante」라고 명명하였다. 그가 편한 도로를 피해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트럭을 타고 찾아다닌 곳은 미국의 관광지나 대도시가 아니라 뒷골목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희망을 간직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미국인의 바탕에 흐르는 감정과 고민을 길 위에서 적었다. 이를 『찰리와의 여행(존 스타인벡의 아메리카를 찾아서)』이란 책으로 출간하여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
스타인벡은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게 아니고 여행이 사람을 데리고 간다’라는 문장을 남기며 여행을 끝냈다. 거주하던 뉴욕 주를 떠나 미국 본토를 탐험하면서 그는 미국과 미국인, 그리고 스러져가는 전통과 획일화되는 문명의 미국을 보았다.
「몬테레이」는 『Cannery Row(통조림 공장 골목)』를 쓴 주 무대다. 당시에 이곳은 정어리 떼가 많이 잡혀 이를 가공하는 통조림 공장이 즐비하였다. 글을 쓰며 파도를 마주했던 바닷가 오두막집은 북적이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다. 당시에 번창하던 통조림 공장은 사라지고, 그 건물의 흔적만 남아 식당이 늘어선 먹자골목이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족관(AQUARIUM)이 들어섰다. 길거리 입구의 전봇대에는 「스타인벡」의 얼굴이 ‘커리커처’로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어 작가와의 연계를 말해 준다. 미국인이 존경하는 작가에 대한 예우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흉상 하나가 어렴풋이 잊혀져가는 대작가의 명성을 조용히 줄을 잇는 방문객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흉상 아래에는 『Cannery Row』의 첫 문장이 새겨져 있다.
“캘리포니아 주 몬테레이의 캐너리 로는 시(詩)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텔지어의 꿈이다. 캐너리 로는 모여 있는 동시에 흩어진 곳이고, 함석과 쇠와 녹과 쪼개진 나무이고, 잘게 부서진 보도와 잡초가 무성한 나대지(裸垈地)와 고물 수집상이고,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 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는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이다.....”
이 문장의 내용을 통해서 당시 이 지역의 전반적인 모습과 분위기를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의 전혀 다른 풍경에 대한 사실 비교를 통해 이 일대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갖게 될 것이다. 나아가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배후에는 대형 조형물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환영하는 이 지역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가의 친구였던 「애드 리캣(Ed Ricketts)」의 해양생물 연구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 고장 소시민들의 유쾌하고 즐거운 일상을 표현한 것이다. 해양 생물을 손에 쥐고 있는 주인공, 낚시를 하는 중국인, 포커를 즐기는 4명의 주민, 두 명의 여인 등 8명이 생생한 표정으로 살아 움직인다. 발아래 개구리들의 이동과 여자포주(抱主)와 아가씨의 표정까지 생생한데 작가는 맨 윗부분에서 이들을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처럼 위대한 작가가 남긴 유산은 영원히 후대에게 보이지 않는 큰 영향을 끼친다. 후대에게 절로 고향을 사랑하고 나아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미국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는 많지만 작가가 활동했던 「몬테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그 어느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과거 멕시코 인들이 해안을 따라 올라오다가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개척을 시작했다고 한다. 「페블비치」 지역도 훌륭하지만 그 하단부에 있는 「POINT LOBOS STATE RESERVE」 지역의 그림 같은 광경도 뛰어나다. 이보다 조금 더 밑에 있는 「빅서(BIG SUR)」 지역도 「몬테레이만 국립해양생물 보호구역」에 속한다. 깎아지른 모습의 해식애(海蝕崖)와 바위투성이의 해안이 장엄한 자연미를 자아내는 세계적인 명소이다.
역시 빼어난 자연환경은 누구에게나 산뜻한 영감을 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통영 앞바다의 「욕지도」 해안가를 비롯한 아름다운 명소가 많아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다만 타국에 비해 규모도 작고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은 면이 있기는 하다. 주변의 자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소시민도 실망할 일은 아니다. 평상시 오가면서 자신만의 희열을 느끼는 소소한 기쁨이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어떤 형태로던지 표현하고 수용함으로써 스스로가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자연과 합일하는 마음의 자세가 우선인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예술 문화인에 대한 따뜻한 지원과 성원이 절실하다. 그들을 보호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곧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며 자긍심을 계승하는 일이다. ‘선진국의 힘은 곧 문화에서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고향인 「살리나스」가 작가를 마켓팅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된 사례를 활용해야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활동적이고 즉각 행동에 옮기는 스타일임에 반해 「존 스타인벡」은 매우 조용하고 은둔적인 편이었다. 그가 하층민의 생활을 그린 『분노의 포도』를 발표하자 마치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세력들은 그를 ‘빨갱이’라고 호칭하며 감시하기도 하였다. FBI의 「후버」국장이 대표적이었다고 하는데 작가는 아예 삼림 감시원으로 일하며 세간의 관심을 멀리하기도 하였다.
어느 사회든지 사회적 약자를 감싸고 옹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과도 같은 대국에서도 그랬거니와 우리 경우는 일상화되어 있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현재도 그런 종류의 무지한 압력과 몰이해는 인간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부단한 사회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정도를 벗어난 극한의 이념대결은 사회와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 언제나 서로가 경청하고 존중하며 대승적인 차원에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공동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2023.8.17.작성/9.6.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