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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7. 15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그해 7월, 부산 구덕구장(1일)·광주구장(3일)·서울 동대문구장(4일)에서 사상 첫 프로야구 올스타전이 막을 올렸다. 그리고 ‘별들의 잔치’의 첫걸음을 기념하듯, ‘꽃 중의 꽃’ 만루 홈런이 터져 나왔다. 당시 롯데 선수였던 김용희 SK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 후 올스타전은 매년 7월 프로야구의 휴식기에 찾아오는 ‘잔치’가 됐다.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들이 모이고, 승패에 연연할 필요도 없는 진짜 축제다. 이대호가 1번 타자로 나서고, 류현진이 번트를 대는 장면을 1년 중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이다. 2016년 프로야구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아 과거 올스타전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명장면들을 돌이켜 봤다.
# 올스타전, 어떻게 시작됐나
올스타전은 야구와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그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1933년 미국 시카고시 당국이 경제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국 박람회(World‘s Fair)를 유치한 게 발단이었다. 에드 켈리 당시 시카고 시장은 “이 시기에 맞춰 큰 스포츠 이벤트를 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시카고 트리뷴지와 상의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시카고 트리뷴 체육부장인 아치 워드가 ‘올스타전’이라는 이벤트의 얼개를 짰다.
결국 그해 7월 6일 시카고에서 사상 첫 올스타전이 열렸다.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 코미스키 파크를 놓고 동전 던지기를 해 화이트삭스가 이겼다. 이 이벤트를 고안한 워드는 “적자가 나면 내 봉급에서 제하라”고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결과는 관중 4만 7595명이 들어찬 폭풍 흥행.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가 아메리칸리그의 첫 승리를 이끌었다.
이보다 더 훈훈한 ‘설’도 하나 있다. 한 어린이 야구팬이 시카고 트리뷴에 “최고 타자 베이브 루스와 최고 투수 칼 허벨(뉴욕 자이언츠)의 맞대결을 꼭 보고 싶다”는 글을 보내면서 올스타전의 아이디어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당시 아메리칸리그 선수와 내셔널리그 선수의 맞대결을 볼 수 있는 무대는 월드시리즈가 유일했다. 양대 리그 스타플레이어들이 서로 맞붙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이 무척 많았다. 그 꿈이 올스타전을 통해 이뤄졌다.
이후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도 훗날 메이저리그와 같은 방식의 올스타전을 도입했다. 일본은 양대 리그 체제가 확립된 1951년부터 시작했고, 한국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올스타전이 열렸다.
# ‘미스터 올스타’ 상품 변천사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올스타전. 그 가운데서도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는 ‘미스터 올스타’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앞서 언급한 김용희 SK 감독이 바로 프로야구 원년 미스터 올스타 출신이다. 김 감독을 포함해 역대 미스터 올스타는 롯데 출신이 가장 많다. 김 감독이 1982년과 1984년, 박정태가 1998∼1999년, 정수근이 2004년과 2007년, 이대호가 2005년과 2008년에 두 번씩 수상했다. 또 전준우가 2013년, 강민호가 2015년에 각각 MVP로 뽑혔다.
첫 17년간 미스터 올스타의 부상은 승용차였다. 실업야구 시절 올스타 MVP는 파이오니아 전축을 받아갔다. 확실히 프로야구라 부상의 ‘급’이 달랐다. 승용차가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선수들이 탐낼 만한 선물이었다. 김용희 감독은 1982년에 ‘맵시나’를 받았고, 1984년에 맵시나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맵시’를 얻었다. 새한자동차가 생산한 차종이었다.
당연히 ‘한 턱’을 내야 했다. 김 감독은 “경기 후 고깃집에서 동·서군 감독님과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모두 모여 회식을 했다. 그때 돈으로 100만 원하고도 수십만 원이 더 나왔던 것 같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이 먹어도 고기값이 어마어마할 텐데, 건장하고 먹성 좋은 야구선수들이 모였으니 금액이 컸다. 경기 후 차를 인수하기는 했어도, 제세공과금에 회식비를 고려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사실상 내 돈 주고 차를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6개 구단 선수들이 모두 가족처럼 정을 나누면서 끈끈했던 그때 그 회식이 그립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차종은 초창기 소형차를 거쳐 중형차로 점점 커졌다. 그해 새로 출시된 차나 가장 인기 있는 차가 선택됐다. 그러나 1998년 삼성 SM5를 마지막으로 승용차는 잠시 MVP 부상에서 사라졌다. 1999년부터는 ‘금’이 귀했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미스터 올스타에게 750g 상당의 골든볼이나 골든배트를 줬다. 2002년에는 아예 상금 1000만 원으로 바뀌었다. 2005년부터는 1000만 원에 대형 TV까지 얹어줬다. 추억 속의 자동차 부상이 부활한 것은 2009년부터다. 주로 KIA 자동차가 협찬했다. 포르테, K5, 뉴소렌토 등이 미스터 올스타의 품에 안겼다. 선수들은 올스타전이 끝난 후 이 승용차를 어떻게 집까지 운반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 홈런 레이스의 추억들
▲ 2006년 홈런레이스에서 홈런 1개 치고 쑥스럽게 우승했던 이택근은 2007년 올스타전 사상 첫 그라운드 홈런을 만들어 냈다. / 임준선 기자
홈런 레이스는 올스타전의 번외 행사다. 그러나 화제성으로는 본 경기를 능가한다. 각 팀의 대표 거포들이 출전해 오직 ‘누가 타구를 펜스 밖으로 더 많이 넘기느냐’를 두고 대결을 펼친다. 배팅볼을 던져줄 상대도 출전 선수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주로 올스타전에 함께 출전한 친한 동료에게 부탁하지만, 의욕적인 선수는 아예 팀에서 배팅볼을 전문으로 던져주던 구단 직원을 대동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많이 나온다. 시애틀 이대호는 롯데 시절인 2009년 올스타전에서 위력을 뽐냈다. 홈런 레이스 결승에서 타구 5개를 담장 밖으로 넘겨 ‘홈런 킹’에 등극했다. 그런데 5개 중 무려 4개가 장외홈런이었다. 당시 장소는 지금은 사라진 광주 무등경기장 야구장. 사직구장을 주 무대로 활약했던 거포에게는 무등구장이 아담하게 느껴진 듯하다.
이대호는 예선에서도 홈런 6개를 쳐 출전 선수 7명 가운데 1위로 결승에 올랐다. 이때 장외로 날아간 이대호의 타구가 근처에 주차된 승합차 유리창을 강타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차주인은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던 KBS 2TV <천하무적 야구단> 출연진인 가수 김창렬의 매니저. 식전 행사에 참가하러 광주를 찾았던 김창렬 일행은 다행히 이 상황을 즐거운 해프닝으로 받아들였다. 유사 상황을 대비해 미리 보험에 가입해 둔 KBO가 수리비 전액을 부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한화 김태균도 2012년 올스타전에서 무시무시한 능력을 뽐냈다. 예선에서 무려 14개를 쳤고, 결승에서도 6개를 넘겼다. 경쟁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특히 예선에서는 타구 8개를 연속으로 펜스 밖으로 날렸다. 이미 레이스를 끝낸 선수들은 기가 죽었고,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선수들은 “난 그냥 기권하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풍경도 펼쳐졌다.
반대로 2006년에는 당시 현대 소속이던 이택근(넥센)이 결승에서 삼성 양준혁과 맞붙었지만, 아웃카운트 10개가 올라가는 동안 딱 1개의 홈런을 치고 우승했다. 경쟁자인 양준혁은 아예 하나도 치지 못했다. 역대 홈런레이스 최소 기록으로 쑥스러운 1위. 그해에는 예선전도 싱거웠다. 이택근의 4개가 가장 많은 홈런수였다. 시원한 홈런 퍼레이드를 기대했던 팬들은 아쉬워했다.
# 올스타전을 수놓은 명장면과 에피소드들
올스타전에서는 정규시즌 경기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 여럿 나온다. 다양한 기록과 기상천외한 에피소드가 쏟아지는 무대다. 2000년대 후반부터 국가대표 좌완 원투펀치로 군림했던 LA 다저스 류현진과 SK 김광현은 2010년 올스타전에서 최초로 맞붙었다. 한화 소속이던 류현진은 웨스턴리그, 김광현은 이스턴리그 선발 투수로 각각 나섰다. 결과는 김광현이 0.1이닝 6실점, 류현진이 1이닝 3실점. 팬들이 기대했던 성적은 아니다. 그래도 두 투수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으며 올스타전의 여유를 즐겼다. 둘은 이듬해 시범경기에서 한 차례 다시 맞붙었을 뿐, 이후 정식 경기 선발 투수로 맞대결한 적이 없다.
롯데 전준우는 역대 최초로 1·2군 올스타전 MVP를 석권한 진기록의 주인공이다. 전준우는 신인이던 2008년 퓨처스 올스타전에서 만루 홈런을 포함해 3타수 3안타(1홈런)를 기록했다. 당당하게 2군에서 MVP에 올랐다. 이후 2010년부터 1군 무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2011년에는 처음으로 1군 올스타전에 베스트 멤버로 출전했다. 그리고 2013년 올스타전에서 4타수 3안타(1홈런) 2타점 1도루로 맹활약해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 유효표 62표 가운데 58표를 얻은 ‘만장일치급’ 활약이었다.
2006년 홈런레이스에서 쑥스럽게 우승했던 이택근은 2007년에 올스타전 사상 첫 그라운드 홈런을 만들어 냈다. 0-1로 뒤진 5회 1사 3루서 우익수 쪽으로 향하는 큰 타구를 날렸다. 그러나 이때 상대 우익수 박한이(삼성)가 조명탑의 불빛 때문에 타구 방향을 놓쳤다. 공은 펜스 앞까지 데굴데굴 굴러갔고, 이택근은 전력질주했다. 3루 베이스코치였던 김재박 LG 감독이 ‘스톱’ 사인을 냈지만, 계속 홈까지 뛰었다. 결국 극적으로 세이프. 이택근은 “정규시즌이었다면 코치의 사인을 보고 멈췄겠지만, 올스타전이라 재미로 뛰었다”고 했다. 이때 경기를 중계한 박노준 당시 SBS 해설위원이 ‘인사이드파크 홈런’을 실수로 “인사이드파크 호텔!”이라고 외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화 레전드 투수 구대성은 2000년 올스타전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하나를 남겼다. 올스타전을 2경기로 나눠서 치르던 시절, 제주에서 열린 2차전에서 벌어진 일이다. 경기 마지막 투수였던 구대성은 소속팀이 4-3으로 앞선 9회말 2사 만루 홍성흔 타석에서 갑자기 폭투 2개를 범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4-5로 역전패를 당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는 순간, 아쉬워하기는커녕 뜻 모를 미소를 짓는 구대성의 표정이 중계 화면에 포착됐다.
이 웃음을 두고 야구팬들과 선수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홍성흔의 끝내기 안타 기회를 봉쇄해 당시 한화 동료였던 송지만을 올스타전 MVP로 만들려는 작전이었다’ 등의 해석이 뒤따랐다. 이 때문에 최근 한 방송사는 호주 야구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 가고 있는 구대성에게 직접 그때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허무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진짜 이유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졌다.
배영은 / 일간스포츠 기자
일요신문 [제1262호]
올스타전에서 은퇴한 선수들
-’코리안 특급‘ 박찬호, 김경문과 배터리 ’특급 이벤트‘
은퇴식을 치르고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는 행운은 많은 선수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프로야구 스타들이 모이는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이 마련된다면 더 그렇다. 전 구단 감독과 선수가 인정하는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여야 가능한 일이다.
첫 번째 사례는 ‘홈런왕’ 장종훈이었다. 2005년 6월 한화 장종훈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자 KBO는 그해 올스타전에 특별 초청 선수로 초빙했다. 장종훈이 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공식 은퇴 무대를 마련했다.
▲ 2014년 7월 18일 광주 KIA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 경기에서 이날 은퇴식을 가진 박찬호가 시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때 뜻하지 않은 해프닝도 벌어졌다. 서군이 5-6으로 뒤진 9회 2사 1·2루. 타석에 선 조인성이 초구에 볼을 고른 순간, 김재박 당시 현대 감독이 갑자기 달려 나와 선수 교체를 요청했다. 장종훈을 출전시키는 것을 깜빡 했던 것이다. 올스타전 출전 선수 명단에는 초청 선수인 장종훈의 이름이 없었던 게 화근이었다. 만약 조인성이 초구를 쳐서 아웃됐다면, 장종훈은 타석에 서지 못하고 경기가 종료될 뻔했다.
가까스로 장종훈이 대타로 투입됐다. 장종훈은 상대 마지막 투수 정재훈(두산)과 맞서 2루수 땅볼을 쳤다. 현역 마지막 타석이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직후 후배들의 뜨거운 헹가래를 받으며 유니폼을 벗었다.
2014년 올스타전에선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퇴식이 열렸다. 박찬호는 2012시즌을 마지막으로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진 현역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후 고향팀 한화와 박찬호의 스케줄이 잘 맞지 않아 번번이 은퇴식이 무산됐다. 결국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KBO에 건의해 올스타전을 추진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시간은 1년밖에 안 되지만, KBO도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이름을 날리고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박찬호의 상징성을 인정했다.
박찬호는 이날 한화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 시구를 했다. 공주고 선배인 김경문 NC 감독이 직접 포수석에 앉아 공을 받았다. 두 선후배는 뜨거운 포옹을 나눴고, 9개 구단의 후배 선수들이 박찬호의 곁으로 와 악수를 나누고 헹가래를 쳤다.
지난해에는 ‘코끼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응용 전 한화 감독이 사령탑 은퇴식을 치렀다. 역대 한국 프로야구 감독 최다승(통산 1567승)과 한국시리즈 최다 우승(10회)이라는 위업을 남긴 선배 감독을 위해 후배 감독들이 뜻을 모았다. 김 감독이 시구를 하고, 애제자였던 선동열 전 KIA 감독이 포수로 앉았다. 노감독이 던진 공은 마지막 순간까지 힘 있게 제자의 미트에 꽂혔다.
김 감독은 이날 나눔 올스타 감독으로 1이닝 동안 명예 지휘봉을 잡았다. 카리스마로 무장했지만, 해학이 담긴 유머로도 잘 알려졌던 김 감독이다. 1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상대팀 최형우(삼성)가 내야 안타로 세이프되자 그라운드로 걸어 나왔다. 현역 때처럼 심판에게 ‘항의’를 하고, 심판 합의판정 요청을 했다. 올스타전에는 합의 판정 제도가 없다. 심판들에게 “감독이 그것도 모르시냐”며 핀잔만 들었다. 그러나 돌아서는 김 감독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거장이 더그아웃에서 남긴 마지막 웃음이었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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