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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하나님을 찾고 구하라
Text Mt 6,24-34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1. 인도양 모리스셔 무인도에 도도새가 살았습니다. 아무런 천적이 없는 환경 가운데서 크게 번식했습니다. 안전하고 평안한 그 섬에서 도도새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몸이 25kg까지 불어나, 날지 못하고, 뒤뚱거리며 느릿느릿 걷는 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에 포르투갈의 큰 함정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그 섬에 좌초됐습니다. 표류하는 동안 비상식량이 떨어져서 1주일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던 선원들에게 날지도 재빠르지도 않던 그 도도새는 하늘이 내려준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결국 1689년에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예전보다 풍요로운 세상에서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고 세상의 놀이에 푹 빠진 인생들은 비계가 차서 뛰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하는 영적 도도새가 되어, 온갖 죄를 범하며 마귀의 종과 노예로 일생을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아, 일장춘몽 같은 세상에서의 삶은 순식간에 끝이 나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불타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세상 재미와 재물에만 정신이 팔려, 불 심판과 종말이 오는 것도 모르는 채, 심판의 길로 나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시49,20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생의 삶을 오로지 세상에서의 행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신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라’는 말씀을 전할 터인데, 은혜를 받으셔서, 설 명절이 되어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과도 사랑이 넉넉하게 가득한 마음과 믿음으로 서로 용서하고 위로하며 순식간에 끝날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로 다짐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예수님은 성도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두 주인으로 ‘하나님과 재물’을 말씀하셨습니다.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재물을 삶의 최고 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을 ‘맘모니즘’(Mammonism)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맘모니즘을 말씀하시면서 부연하신 것을 보면, 사람이 재물을 주인으로 여기는 이유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입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고 마셔야 하며, 질 높은 삶을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생태계는 모두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나운 맹수도 먹는 것으로 길을 들이고 먹이가 끊기면 어떤 맹수도 도태되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생존 문제 앞에서는 모든 종류의 주의와 주장들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 누구도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을 입을까?’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전한 생존을 위해서 옷은 필요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서도 옷이 필요합니다. 또한 인간은 넓은 의미에서의 옷이라 할 수 있는 집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옷과 집을 날개로 비유하는 것은 신분의 상징이 된다는 뜻도 있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때문에 삶의 만족도에 있어서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이 문제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식주 문제로 싸우고 속이며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재물이고 재물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비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재물에 무관심하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재물에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종(主從)을 확실히 정하라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동등하게 대접한다는 것인데 동등하게 대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이 인생살이에 필수적이라 하더라도, '둘 다 중요해'라면서 가다 보면 결국에는 돈을 주인으로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포인트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확실하게 섬기는 기본 태도를 확립하라는 말씀입니다. 정경에 들지 않은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두 마리의 말을 동시에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동시에 구부릴 수 없다. 한 종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은 공경하고, 다른 한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 하나님과 재물 중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확실히 하지 않고, '난 둘 다 챙길래' 하다가는 필연 재물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재물을 챙기지 않고 인간이 어떻게 삽니까? 다만 처음부터 확실히 정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어중간하게 둘 다 추구한다고 했다가는 결국 재물 한쪽에 쏠려서 비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말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확정하면 재물을 추구하되 하나님이 허락하는 안에서만 추구하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재물도 신앙심을 마비시키거나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는 상태로 취할 수 있다는 겁니다. 먹을 거, 마실 거, 입을 거 등, 의식주 문제에 매달려야만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오판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만 구하면, 나머지 것도 하나님이 챙겨주십니다. 재물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고 살 수 있는 길입니다.
3. 둘째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구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데 있어 제일 큰 걸림돌이 ‘염려’라고 알려주시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26-3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와, 28-30절,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는 말씀에서, 성도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귀한 존재인 것을 모르거나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염려를 왜 너희가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또한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에서는 염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고, 32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에서는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그 필요성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염려의 어원적 의미는 ‘갈라놓다. 쪼갠다.’의 의미로서 마음을 갈라놓고 쪼갠다는 뜻입니다. 인격을 분열시키고, 잠을 못 자게 하고, 몸이 마르게 하고, 깊은 갈등과 고민에 빠지게 하여 집중력을 잃게 하고, 삶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한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런 염려는 건강에 해가 오고, 가정과 인간관계에 해가 오며, 영적 생활에 해가 옵니다.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성도에게 염려는, 말 그대로, 백해무익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자녀로 삼은 성도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귀한 존재라고 알려주십니다. 성도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 표현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 ‘자녀’, ‘종’, ‘제자’, ‘친구’, ‘신부’ 등입니다. 성도를 백성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신다는 것이고, 자녀라 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보호하신다는 것이며, 종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라 함은 하나님께서 스승이 되셔서 일일이 가르쳐주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친구라 함은 감추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주신다는 뜻이며, 신부라 함은 책임져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백성이요 자녀이며 종이고 제자이며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부입니다. 그렇게 귀한 존재임을 안다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염려가 된다면 그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되시고 왕이 되시며, 주인이시고 스승이시며, 친구이시고 신랑이신 주님께서는 인생에게 재물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그 필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고 찾고 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시145,18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 하였고, 대하15,2에는,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의 뜻 알기를 힘쓰고 그 뜻을 따라 살기에 힘쓰는 것이 해야 할 일이고 지혜로운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은혜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4. 하나님을 구하며 사는 삶은 33-34절 말씀처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는 세상이 누리는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편하게 살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길 원합니다. 이를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사용된 축복이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도 엉터리이지만 신앙적으로도 엉터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바른 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의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이 더 좋은 곳입니다만 은혜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광야’가 더 좋은 곳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 누리는 것이 우선이지만 광야에서는 주시는 하나님을 더 간절히 앙망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서는 더 많은 것을 항상 원하지만, 광야에서는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에 더 집중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며 사는 삶이 풍요로울 수도 있고 빈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풍요로움과 빈곤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한 성도의 행복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가나안에서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하기에 행복하지 못하지만, 광야에서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요, 그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필요한 만큼 채우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기쁨은 가나안식 기쁨입니까? 광야식 기쁨입니까? 당신의 행복은 하나님 때문입니까?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것들 때문입니까?
여러분, 세상의 평안과 행복보다 하나님 그분을 구하십시오. 나의 관심을 행복에서 하나님으로 바꾸십시오. 선한 목자이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것을 마음으로 느끼려 하십시오. 1년 365일, 설날부터 섣달그믐 날까지 날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들도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샘물처럼 하나님께서 필요한 대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45,22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바라기로 살듯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십시오. 오늘도 그렇게 살고 내일도 오늘처럼 사십시오. 1년 365일 동안도 그렇게 사는 겁니다. 더 발전하고 더 잘 되며 더 성장하여 더 복되게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