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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언과 건분
걸언은 말씀을 빌다. 권분은 스스로 자기의 능력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내가 말씀을 빈다라는 것은 묻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의지와 뜻을 알아보고 알게 하여 자신의 삶으로 살되, 남과 더불어 살게 하는 방식입니다.
권분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나누어 상대에게 상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보조하는 행위입니다. 걸언은 그래서 사회사업의 가치로 본다면 자주하려는 성질을 주로 하고 공생하는 성질을 불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권분은 공생하려는 성질을 주로하고 자주하려는 성질을 불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질은 가치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회사업의 핵심 기술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고 싶은 것이 사람의 고유의 성질이라고 봅니다. 사람의 고유의 성질은 여러 학자들이 이야기 했습니다.
맹자의 경우에는 사람의 성질은 기본적으로 좋아서 그 성질을 드러내려는 바가 있고, 순자는 사람의 성질은 남에게 의존하니, 이를 제어, 통제함으로서 사람을 사람답게 성장시키려고 하는 이론을 설파하였습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맹자와 순자는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걸언과 권분은 사회복지의 핵심기술이고, 그 방법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만 주어질 뿐이지 방법은 똑같습니다. 방법은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일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묻는다는 것은 당사자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요, 지역사회에 묻는다는 것은 지역사회 즉, 공동체가 나누려는 성질을 같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걸언차원서의 의논하고는 당사자가 자기의 현실과 주변 환경을 인식해서 자신의 일과 타인의 일을 구분하는데 있습니다. 의논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상대일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분차원에서의 의논하고는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고 주변의 어려움을 헤아려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큼의 일의 양, 또는 역할을 정하는 것이 권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부탁하기는 당사자에게 걸언한다함, 부탁한다고 함은 상대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 역량이 유용하게, 혹은 효율적으로 발현할 수 있도록 동기화 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대에게 부탁하는 것은 상대가 그럼직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 반응하여 상대는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분에서의 부탁하고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남에게 그 역량을 아무런 대가없이 주도록 하는 성질을 발현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권분과 걸언은 같은 방법을 쓴다. 즉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방법을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언과 권분의 출처는 목민심서에서 두고 있습니다. 걸언의 출처는 목민심서의 양로편에 나와 있고, 권분은 목민심서의 진황편에 나와 있습니다. 이 진황편은 애민육조의 사항입니다.
목민심서는 12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목마다 6개의 조항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애민육조는 복지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임(赴任)⋅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본문
복지소학 P 30 걸언
養老之禮, 必有乞言. 양로지례 필유걸언. 牧民心書 愛民六條 養老
노인을 봉양하는 예에는 반드시 걸언乞言이 있어야 합니다.
양로지래는 필유걸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목민심서 애민육조의 양로편 양로는 노인복지 정책에 관한 것입니다. 애민육조는 사회복지 제도이고 양로는 정책입니다. 애민육조에 대해서 공부를 해서 양로편이 있고 진황편이 있고 진궁편이 있고 또는 자유편이 있습니다. 자유는 자비로울 자(慈) 와 어리다 유(幼)입니다. 이는 아동복지입니다. 목민심서가 복지제도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해석을 하자면 양로 노인을 모시는데 있어 방법은 필유걸언, 반드시 걸언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걸언은 어떻게 예를 드는가 하면, 설날에 부모님께 절을 하고, 부모님은 덕담을 하십니다. 그렇게 가만히 윗사람의 말을 청하여 듣는 상태, 그 상태는 결국 묻는 것입니다. 어머님, 아버님,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세요라고 물으면, 가장 좋은 말씀을 가장 좋은 자세로 이야기를 해줄 것입니다. 묻기만 해도 그 사람은 가장 좋은 모습과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본문
걸언은 경로행사를 할 때 노인을 상석에 모셔서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의식인데, 이는 평소 그렇게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하던 禮의 연장일 겁니다. ‘어른다움’을 세워드리려는 뜻일 겁니다.
어른다움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어른답다고 할 때 자애로움이 있어야 어른다울 것입니다. 지혜로운 상태가 있어야 어른다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랑한 모습, 자존심이 있는 모습,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살아왔을 때 어른다움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른다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걸언입니다. 풀이한다면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일입니다. 물으니 지혜가 나오고 그 대답이 자상하고 품격이 있고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뒤로 가봅시다.
어른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생각을 해봅시다. 예를 들어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할 수 있고, 어른은 이래야 된다. 라고 할 수 있는 말을 해보세요.
심현준 전도사님 : 어른은 경륜을 통한 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른은 원만해야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에 대한 정의를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화이트헤드, 젊은 사람은 도전함이 있어야 하고, 장년은 위험하고 어른은 원만하다고 이야기 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른에 관한 격언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충년(沖年) : 10세
지학(志學) : 논어·위정편(爲政篇)의 '(十有五而志干學)'에서 유래하여, 열다섯 살이 된 나이를 뜻하는 말.
묘령(妙齡) : 20 안쪽의 젊은 나이. 妙年(묘년).
방년(芳年) : 여자의 스무 살 안팎의 꽃다운 나이.
약관(弱冠) : 남자의 스무 살. 또는, 스무 살 전후를 이르는 말. 弱年(약년).
이립(而立) : 논어의 '三十而立'에서 온 말로, 나이 '서른 살'을 이르는 말.
불혹(不惑) : 공자가 40세에 이르러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였다는 데서 '마흔 살'을 이르는 말.
지명(知命) : 논어 위정편(爲政篇)의 '五十而知天命'에서 나이 '쉰 살'을 이르는 말.
이순(耳順) : 논어의 六十而耳順에서 나온 말로 나이 '예순 살'을 이르는 말.
환갑(還甲) : '예순한 살'을 이르는 말. 華甲(화갑). 回甲(회갑).
진갑(進甲) : 환갑의 이듬해란 뜻으로 '예순두 살'을 이르는 말.
칠순(七旬) : 일흔 살
종심(從心) : 공자가 70세가 되어 (從心所欲 :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았으되) 불유구(不踰矩 : 법도에 어긋나지 않다) 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하여 '일흔 살'을 이르는 말.
고희(古稀) : 두보의 곡강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 70세를 이르는 말.
희수(喜壽) : 일흔일곱 살. '喜'자의 초서체가 '七十七'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한데서 유래.
팔순(八旬) : 여든 살.
미수(米壽) : '米'자를 풀면 '八十八'이 되는데서 '여든여덟 살'을 이르는 말.
구순(九旬) : 아흔 살.
졸수(卒壽) : 아흔 살
백수(白壽) : '百'에서 '一'을 빼면 '白'이 된다는데서 '아흔아홉 살'을 이르는 말.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서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떠나는 전 과정을 가장 진실하게 진술한 글이 있다. 바로 논어 위정편 제4장! 공자께서 스스로의 일생을 돌아보시고 자신의 학문 심화과정을 술회한 대단히 유명한 다시 말해 논어를 전혀 읽어보지 아니 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게 전달되는 인지도, 지명도 높은 인기 글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 살에 설 수 있었으며,(三十而立)
마흔 살이 되어 미혹함이 없었고,(四十而不惑)
쉰이 되어 천명을 알았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이 되어 귀가 순하게 되고,(六十而耳順)
일흔 살이 되어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라 하였다.
다듬어 설명을 덧붙이면 먼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라는 항목은 대단히 공자의 개인적 사정에 의한 출발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자께서는 70이 넘은 어버지 숙양흘(叔梁紇)과 겨우 16살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사이에 태어나 공자 나이 세살 적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그로인한 청상의 젊디젊은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와의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바가 아니었기로 당시로서도 상당히 늦은 요즘에 비추면 더욱 늦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리라-열다섯이 되어 겨우 학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5년 후 서른이 되어서야 공자는 겨우 설수 있었노라 술회 한다.
선다(立)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선다는 말 그자체로 걸음마를 그때 떼고는 그때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닐게 확실한 것이고 하면 무슨 뜻일까?
이는 입어례(立於禮), 부지례 무이립야(不知禮,無而立也)라는 말이 논어 요왈편 제3장에 있는 데, 이는 곧 “선다는 것은 예다, 예를 모른다는 것은 설 수 없다는 것”이니, 이립(而立)은 지례(知禮). 즉, 예를 아는 나이라는 얘기인 것이다.
예란, 각각의 개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과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모든 구체적 행동양식 및 제 사회제도의 통칭을 의미하는 일반적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 천성(天性)을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비례(非禮)면 보지도(勿視), 듣지도(勿聽), 말 하지도(勿言), 움직이도(勿動)말라” 하였다.
이쯤 되면 여지간한 경지가 아니면 이립(而立)이라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지경이니 공자나이 서른 전후에 이미 그를 따르는 제자가 수십, 수백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불혹(不惑)의 사십!
사십에 미혹함이 없다. 어떠한 유혹에도 빠짐이 흔들림이 없다는 말이다.
즉, 예(禮)를 알고 이를 실천하여 도(道)를 터득하고 그 도(道) 하늘의 도인 덕(德)을 밝히고 그 덕의 본질인 성(性)을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어떤 육체적 욕구와 예(禮)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이 해소되는 그런 경지 곧, 훗날 맹자가 말한 부동심(不動心)의 세계에 도달함을 말함이다.
하여, 불혹(不惑)이라 함은 곧, 득도의 경지이니……. 하여, “아침에 도 서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楣 夕死 可矣)하였으니……
공자님의 불혹의 경지는 우리네 사정과는 사뭇 다르다.
다음으로 오십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고…….하늘의 뜻, 참으로 어렵고 형이상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천명(天命)을 안다는 의미는 천성(天性)과 천리(天理)를 깨우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면 성(性)과 리(理)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성리(性理) “천명즉성(天命則性) 성즉리(性則理)” 바로 송대(宋代) 주자(朱子)를 위시한 숱한 선현들이 논구하고 고심한 바로 그 성리(性理)!
우리조선으로 들어와서는 더욱 더한 철학적 개념으로 한 단계 상승한 바로 그 조선 성리학(性理學)과 같은 맥락이니, 이에 대한 논구는 새삼스러이 말하지 아니하여도 조선500년의 역사와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을 위시한 수많은 선현들의 이기론(理氣論)과의 상관관계에 따른 철학적 형이상학의 논쟁- 아직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이다.
이러한 사정이고 보니, 그 누구도 공자께서 말씀하신 지천명(知天命)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음인가?
이제 육십이 되어,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하고, 육십에 귀가 순해지고…….귀가 순해지다니? 시쳇말로 웬 생뚱맞음인가?
이미 득도의 경지를 지나 천리를 안다는 지경에 이러러 에서 갑자기, 귀가 순해지다니…….
그렇다! 귀가 순해진다함은 이젠 천, 지, 인(天地人) 천하 만물의 그 모든, 그 어떤 소리를 들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무욕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어떤 욕심도 욕구도 초월한 경지,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누구에게도 거치적거림이 없는 자유인, 진정한의미의 대 자유인, 그 대 자유인이라면 아마 이런 경지에 이르렀음이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 칠십!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칠십이 되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 대로 하여도 법도에, 하늘의 법도에도 땅의 법도에도 사람의 법도에도 그 어느 법도에도 어긋남이 없다.......하였다.
왜냐면, 진정한 자유인 경지에 이미 도달하였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천지하물과 나와 일체가 되니, 마음 닿는 대로 몸 가는 대로 행하여도 천지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가히 불가에서 말하는 부처의 경지와 상응함인가?
이런 경지에 이름은 도가의 진인, 신선이나 불가의 부처이거나 모두 같은 경지이니, 도(道)가 통하면 그 경지는 어떤 형태로 접근하더라도 최종의 종착지는 같다는 뜻인 게다.
이와 같은 성인의 학문의 심화과정을 우리네 나잇살이로 표현하는 것 또한 성현을 본 받고자하는 지극한 성심에서 출발된 것이기에 즐겨 즐겨 사용하여 그 뜻을 한번이라도 더 새김이 옳다 하겠다.
(출처 : '논어 위정편 제4장')
KINFOLK 생식을 하는 것 거기에 노인에 대한 정의가 잇는데, 거기에 노인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는데, 노년이란, 젊은이들이 깐족거리는 곳이 아니다. 노인에 대한 위엄, 존엄을 생각하는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른다움을 세워드리는 일은 자신의뜻과 의지로 살아가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데, 절은 사람, 불쌍한 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노인이라는 말을 씁니다. 노인은 젊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세종대왕 때에도 어르신들을 상석에 모시고 걸언하고, 노인들을 위해서, 조선시대에는 평민이 먹는 밥상차림이 4찬입니다. 어른들에게는 보통 8찬에서 12찬까지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임금들은 보통 나라가 어려울 때는 4찬을 먹었다고 합니다. 경사가 있는 날이나, 풍년이면 8찬정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 어른다움
노인을 돕는다면, 사람다움뿐 아니라 어른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른답게 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해야 어른답다 할 수 있을까요?
어른다움은 ‘어른 구실 어른 노릇’ 하시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른으로서 무언가 이루시거나 해 주시거나 베푸시거나 가르쳐 주시거나 보살펴 주실 때 생기가 돌지 않습니까?
어른을 돕는다면 이것을 살려 드려야 합니다. 당신 복지를 이루는 데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른 구실 어른 노릇 하시게, 그로써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시고 그렇게 인정받으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젊은 사람을 걱정해서 베푸는 것입니다. 절은 사람을 걱정하니 염려하고 방도를 취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질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김장을 했다고 합시다. 김장을 해서 어머님 드세요. 이렇게 하는 것과 어머님 간좀 봐주세요 는 다릅니다. 김장의 완성은 어머니가 하는 것입니다.
김선녀 선생님 : 저희 시어머니가 뇌졸중이 있어서 기억을 잘 못하시는데, 명절 때 제가 고사리 무칠 때 무엇을 넣어야 하냐고 했더니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내가 약간 모자라는 듯하게 하면 걱정하고 챙겨주려고 합니다.
김선녀 선생님 : 밑에 있는 사람은 알아도 어르신에게 하시게끔 내버려 두는건가요?
하시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어머님 이렇게 하시는게 좋습니까? 어떻게 하시는게 좋겠습니까?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이나 힘을 주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는 것은 방임입니다. 어머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알던 모르든, 치매가 걸렸든 안걸렸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를 모시는데 귀감 될 수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희식 선생님의 똥꽃 이라는 책입니다. 그래서 똥을 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벽에 똥칠을 해도 아들은 그것을 꽃으로 보는 것입니다.
알아도 여쭈어야 하고, 어머니가 밥 먹을 줄 압니다. 밥을 드리는 것과 식사를 준비해도 될까요? 묻는 것은 다릅니다. 치매가 걸렸습니다. 밥을 또 달라고 합니다. 어머님 조금 전에 드셨는데 또 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알아도 여쭈어야하고 몰라도 여쭈어야 합니다. 모르면 더 정중히 여쭈어야합니다. 모르는데 내가 알아서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쭈어보다. 묻다가 걸언입니다.
본문
어른답게 살고 싶은 마음, 어른 구실 어른 노릇 하고 싶은 마음, 애정 욕구 자존 욕구, 그 뜻을 받들자는 겁니다. 자기 효능감, 자존심, 체면을살려 드리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한 정성으로 도와 드려도 그렇게 대상화하여 받기만 하는 신세가 버젓하기 어렵습니다.
11:41
마지막 문장에 묻지 않고 주게 되면, 해드리게 된다면 그 해드림에 대하여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해드림에 대해서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대상화라고 합니다.
내가 예를 들어 선녀씨를 이래라 저래라 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래라 저래라 해도 헤헤거릴 수 있습니다. 그게 대상화 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여쭈어보는 것, 걸언이중요합니다.
부모님을모시고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본인은 이탈리아, 부모님과 다른 사람은 유럽을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가족끼리 묻지도 않고 우리 유렵으로 결정했으니 가자고 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썩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생이 추진위원장인데, 언니 부모님도 그렇고 우리도 유럽을 가고 싶은데, 다음에 이탈리아를 가고, 이번에 유럽을 가는 것이 어떨까? 라고 한다면,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효능감, 내 존재의식을 보여주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것입니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본문
“더 살아서 뭐해” 이는 당신 생활조차 당신 뜻대로 주장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짜증 언짢음 답답함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당신 삶의 선택 통제권을 뺏긴 데서 오는저항 울화 분노 체념, 이런 심정의 표현입니다.
노인들의 더 살아서 뭐해, 더 한말인 죽어야지 그러한 말을 씁니다. 그 말은 자존심이 상했다. 화가 난다. 라는 뜻입니다. 네가 내 마음대로 못하게 하니깐 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어머님, 아버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물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묻는 것만 강조했는데, 어머님이나 부모님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 자식들은 제주도를 생각하는데, 크루즈를 가자고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마 이렇게 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이정도 법니다. 크루즈 여행을 한다면 1인당 천만원이 듭니다. 우리가 벌어서는 가기 어렵습니다. 아버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을 의논한다고 합니다. 의논하는 것의 본질은 역할을 분담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물음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해를 해서 이번에는 가족끼리 화목이중요하니 제주도를 가자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양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지, 내가 그동안여행하려고 벌어놓은 돈, 저축해놓은 돈이 있는데 이정도 되니 일본이라고 가자. 라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 결정대로 간다면, 자존감, 유용감, 자기효능감이 생기게 됩니다. 부탁하는 것은 자기유용감이나 효능감을 높여주는 일입니다.
본문
아니 어쩌면 이제 쓸모없다는 느낌, 어른 노릇은커녕 사람 구실도 못한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탄식에 더 가까운지 모릅니다. 더욱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해야 합니다. 살아 계시는 한 끝까지 당신을 돌보시고 남을 돌보시게 乞言해야 합니다. ‘사람 구실, 어른 노릇’ 하시게 걸언하고 걸언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살아서 뭐해?’ 이런 탄식을 예방 해소 완화하거나 늦출 수 있습니다. 돌봄과 거듦 당신 자식은 물론이고 짐승이나 식물까지도 긍휼히 여겨 돌보시는 행
위는 ‘어른 본능’에 가깝습니다. 이로써 당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시는, 이것이 노인일수록 절실한 自尊입니다. 노인의 자존은 곧 돌봄 본능의 행사입니다.
아까 노인은 두 가지를 한다고 했습니다. 걱정하는 것과 베푸는 것입니다. 걱정은 여기에서 여기서 궁휼이 여기다. 베푼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입니다. 영어해서는 FITY 연민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다. 그리고 돌보다는 care입니다. 연민은 왜 느끼냐면, 나도 그럴 것 같다는 예측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연민과 비슷한 단어가 동정입니다. 동정은 같을 동(同) 뜻 정(情)입니다. 뜻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민이라는 말, FITY 동정은 compassion com together을 의미합니다. passion은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같은 열정을 갖다가 동정입니다. 같은 마음을 푸르게 같다. 시리게 같다고 하는 것이 한문식 표현입니다. 영어식 표현은 뜨거움이고, 한문식은 차가움입니다.
본문
돌봄과 거듦
당신 자식은 물론이고 짐승이나 식물까지도 긍휼히 여겨 돌보시는 행위는 ‘어른 본능’에 가깝습니다. 이로써 당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당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시는, 이것이 노인일수록 절실한 自尊입니다. 노인의 자존은 곧 돌봄 본능의 행사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노인 돌봄 서비스니 노인 주간보호센터니 이렇게 노인을 돌본다 보호한다 하면 어떤 기분일까요? 혹 기저귀 차는 것처럼 수치스럽고 참담한 심정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래서 용어를 쓸 때도 방향을 잡고 쓸 필요가 있습니다. 노인주간보호센터, 향유센터나 여가센터, 라고 쓰는 것이 어떨까요? 노인들이 주체가 되어 여가를 누리는 센터입니다. 보호는 나는 불쌍하고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능력자가 나를 보호한다. 그럼 내 기분이 어떨까요? 그래서 요즘에는 용어를 이렇게 쓰는 경향이 있고, 문재인 정부가 복지요결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고아원이라고 쓴다면 기분이 좋지 않겠죠? 예를 들어서 장애인 중증장애인 시설이 있습니다. 시설 명칭을 ~~원이라고 붙입니다. 그런데 월평빌라 한다면 어떨까요? 월평빌라가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입니다. 삼성빌, 전주대학교 맞은편의 삼성보육원의 새 이름입니다. 적어도 보통사람들의 삶과 비슷하게, 혹은 같게 만들어 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복지를 하더라고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5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의 5가지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보이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복지 예를 들어서 삼성빌에 지역사회 후원자가 찾아가서 라면박스를 쌓고 사진을 찍으면 보이게 됩니다. 지역사회 우체국 아저씨들이 삼성빌에 방문을 해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면 안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떨까요? 우리가 여느 생활과 비슷하게 한다면 복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언니가 동생에게 용돈을 주면 복지인가요? 언니니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원자가 동생에게 2만원을 준다면 복지인가요? 그런데 후원자가 내 동생에게 돈을 준다면 돈 받는 아이의 모습은 보호를 받을만한, 능력이 없는 아이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니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연탄을 날라주었습니다. 할머니가 고마워서 홍시를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봉사자들이 어르신 드세요 하고 가면 기분이 안좋을 것입니다. 자기가 처참해 질 것입니다.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오고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홍시를 내놓은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도 다시 무엇인가를 줄 수 있도록 하는 상호성, 또는 호혜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풍습으로 남으면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당쓸기라는 풍속이 있습니다. 춘공기 봄이 되면 가난한 사람들은 식량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가난한사람의 주 부양자. 남자들은 빗자루를 들고 부잣집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묵묵히 마당을 씁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행색을 보고 쌀이 떨어졌구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다 쓸 무렵에 그곳에 쌀을 놓고 얼른 들어가 버립니다. 이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을 헤아려 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한 사람은 여름철 내내 가을까지 일을 해서 빌렸던 곡식을 반환하거나 최소한으로 되돌려줍니다. 그러니 마당 쓰는 것을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마당쓸기의 풍속을 본다면 도움의 주고받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나물들이 나옵니다. 그 나물을 여인들이 잘 따서 씻고 소쿠리에 한가득 가지고 부잣집 마님을 찾아갑니다. 부잣집 마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조미료인 된장을 줍니다.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합니다. 배려나 곡식을 주는 일이 보이지 않으니 복지요, 그냥 주는 것이 아닌 싱싱한 나물을 주었거나 갚거나 했기 때문에 비굴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었다면 그 사회는 우리가 원하는 복지사회가 아닌가요?
김선녀 선생님 : 어렸을 적에 옆집에서 수제비를 받아오면, 그릇을 줄때는 빈그릇으로 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형태, 서로 호자, 혜택을 준다. 그러한 성질 호혜성을 만드는 일이 우리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그러한 호혜성은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면 생깁니다.
두 번째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두루 스미게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복지가 복지관에 있거나 동사무소에 있는 것이 아닌 마을 내 구석구석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주는 꼴로 만들어 준다면 복지사회입니다.
세 번째는 보편적이게 했으면 좋겠다. 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라는 말로 상치시키면 됩니다.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서 옛날의 엘리베이터는 수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24층까지 있는데 24층에 사는 아이들이 그 버튼을 누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보통은 밑에 무엇인가를 두고 누를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로로 되어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든, 아이든 누를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만들 때 원래 그렇게 만들어서 누구나 다 쓸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봅니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텔레비전을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선녀씨와 셋이 봅니다.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럴 때 무한도전에 수화 프로그램과 자막을 깝니다. 그렇다면 청각장애인과 본인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설명을 해줍니다. 유재석이 정준하의 코를 손으로 쳤다. 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준하가 방문 앞에 서성인다. 등으로 표현을 해주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텔레비전을 무슨 버튼을 누르면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전화기도 할머니가 쓰는 것은 증폭장치가 있게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는 그렇게 나왔었습니다. 지금 설명을 안해서 그렇지 증폭되는 장치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나온다면, 누구나 다 똑같은 휴대폰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휴대폰에 라인이 그려진 것이 있습니다. 만지면 돌기가 돌아가면서 읽어줍니다. 만약 시계나 휴대폰에 돌기유도장치가 있다면 청각장애인도 텍스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게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복지를 universal welfare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보편적이랑은 다릅니다. 학자들의 보편적 복지는 소득, 고용, 생계등을 기준으로 해서 최소한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을 보장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진 상태를 보편적복지라고 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복지는 우리가 누리는 서비스, 상품, 제도 등를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평범하게 하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복지관에서 생일이 되면 불러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서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고, 선물을 주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괜찮습니까? 그렇게 해주는 것보다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생일을 치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묻고 의논하고 부탁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범하게입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선물주고 생일 축하해주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바탕을 이루는 복지입니다. 근본적으로 바탕을 이루는 복지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강점, 저력 탄력성 끊기 인내 지혜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강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강점을 활용해서 그 사람의 복지를 그 사람이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바탕을 이루는 복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사람다움
노인이라도 당신의 삶을 당신 뜻대로 하려 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시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받들어야 합니다. 살아 계시는 한 끝까지 사람다움을 지켜 드려야 합니다. 당신 삶의 ‘주인 노릇’ 하시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사람 구실, 어른노릇’ 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乞言해야 합니다.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인으로만 되어있는데, 어려운 사람, 약자, 아이들을 포함해서 같이 적용해봅직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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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가 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겠으나, 자칫 ‘당신의 인격적 사회적 생명은 끝났다.’는 사망 선고 또는 ‘이제 인공 복지로 대신하겠다.’는 연명 서비스개시 선언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자칫 당신의 인격적 생명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당사자의 인격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적 생명은 당사자를 주체인 것을 감안해서 설명하는 말이고, 사회적 생명은 당사자를 보는 주변 둘레사람들이 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 생명은 스스로 의식하는 인격, 자신의 뜻과 의지, 삶을 가진 생명체를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사회적 생명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중심으로 타인의 신뢰, 존경, 또는 타인이 해주는 명예와 관련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인격적 생명이라고 읽을지라도 인격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으로 나누어져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노인으로서의 사회적 생명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중 하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근육을 만드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멋있는 노인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노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유하게 거리낌 없이 할 수 없는 것을 놓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다면 인격적 생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으로부터 비춰지는 존재의식과 자신이 인식하는 존재의식의 차이가 인격적 사회적의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본문
이럴수록 당신이 주인 되어 누리는 당신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가족 친척 친구 선후배 동료 교우 이웃, 그렇게 평생 어울려 살아온 사람들과의관계 소통도 멀어집니다. 기껏해야 사회사업가 요양보호사 봉사자입니다. 그 대상자로서 애 같은 노릇 환자 노릇이나 하기 십상입니다. 사실상 인격적 사회적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아까는 생명이 나왔고 인격적 사회적 죽음, 인격적 죽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의 상실을 의미하지만, 사회적 죽음은 자기 존재에 대한 타인의 존재가치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본문
어설프고 힘들고 부족하고 불편하고 위험할지라도, 살아 계시는 한 끝까지 당신의 삶을 사시게 해야 합니다. 세련되고 쾌적하고 풍족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서비스로 연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 내용은 사실 두 가지 텍스트를 버무린 문장입니다. 한 가지는 일본 기자작가의 노인복지의 혁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연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인가를 두고, 일본이 노인복지가 잘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인복지에 대한의문이 든 것입니다. 깨끗한 침대, 편리한 기계, 친절한 요양보호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서비스를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웨덴, 호주를 방문하게 됩니다. 스웨덴에 갔더니 요양원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상황에서는 누워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디 있냐고 했더니 길거리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아이들과 일광욕을 하며 대화를 하고 있고, 동료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깨끗한 환경이 좋은가 아니면 살아있는한 손주를 보며 자연과 살아가는 노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인가?
그냥 똥싼다고 오줌을 싼다고 기저귀를 채울 것이 아니라, 최대한통제하며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일본의 학회 이름이 기저귀때기학회입니다. 노인복지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만든 학회입니다.
김선녀 선생님 : 폴란드가 노인복지가 좋다고 합니다. 거기는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탈시설화라고 해서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어린 유치원 아이들을 노인요양원에 방문을 해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어르신들이 아이들의 수업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잘 못만들 때 어르신들이 도와줍니다. 그러니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고, 아이들도 어르신들이 도와주니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두 번째 텍스트는 국화꽃향기라는 김하인 작가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때던지, 아니면 죽던지 해야 됩니다. 무엇을 결정할 것입니까? 여기서 여주인공은 엄마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거기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엄마로 살고 싶다.
본문
노인일수록 더욱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해야 합니다. 부탁하되 약해진만큼 거들어 드리면 됩니다. 당신의 일상생활과 당신의 인간관계를 이어 가시게 거들어야 합니다. 구차히 연명시키지 말고 당신의 삶을 사시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엄마로서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걸언의 텍스트는 정약용선생님의 애민육조 양로편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정약용선생님의 텍스트는 맹자에서 가져왔습니다. 목민심서를 본다면 내가 쓴 것의 근거, 맹자의 이루상편에 나온 것이라고 각주를 달아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선생님의 유배시간에 다룬 것입니다. 1813년도 목민심서를 1년 만에 씁니다.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러한 식으로 공부를 합니다. 그래서 누구와 함께 썼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루상편을 들여놓아서 걸언을 하여 양로지래는 필유걸언이라는 말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曾子養曾晳, 必有酒肉, 將徹 必請所與, 問有餘 必曰有. 曾晳死, 曾
元養曾子, 必有酒肉, 將徹 不請所與, 問有餘 曰亡矣, 將以復進也, 此所謂養口體者也. 若曾子則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可也.
증자양증석, 필유주육, 장철 필청소여, 문유여 필왈유. 증석사, 증원양증자, 필유주육, 장철 불청소여, 문유여 왈망의, 장이부진야, 차소위양구체자야. 약증자즉가위양지야. 사친약증자자가야. 孟子 離婁上19
증자는 아버지 증석을 봉양할 때에 항상 술과 고기를 올려 드렸습니다. 상을 물릴 때는 반드시 주실 곳이 있는지 여쭈었고, 남은 음식이 있는지 물으시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증석이 죽고 증원이 증자를 봉양할 때에도 언제나 술과 고기를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상을 물릴 때에 주실 곳이 있는지 여쭙지 않고, 남은음식이 있는지 물으시면 없다고 대답했으니, 다음에 다시 올려 드리려함이었습니다. 증원은 부모의 입과 몸을 봉양했고 증자는 부모의 뜻을 봉양했다 할 수 있으니 부모 봉양은 마땅히 증자처럼 해야 합니다.
맹자의 이루상편에 나와 있는 말을 본다면, 마지막 줄에 차소위양구체자야. 약증자즉가위양지야. 사친약증자자가야
위에 증원은 양구체 입과 몸을 살리는 일을 했고, 증자는 양지 뜻을 봉양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봉양하는 방법은 여쭈는 것입니다.
본문
제1막 : 아버지의 삶
제1막은 아버지가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인격’과 ‘관계’를 잃지 않고 여전히 주인 노릇 어른 노릇 하는 아버지의 삶을 보여 줍니다. 아들의 조연으로 인해 빛나는 아버지의 삶을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수발 받는 처지이지만 당신의 생활과 인간관계를 잃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활을 당신이 주관했고 당신의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어른 노릇’ 했습니다. 여전히 인격적 사회적 생명과 어른다움을 유지하는 진정한 ‘사람’이었고 ‘어른’이었습니다. 아들이 걸언했기 때문입니다. 걸언하여 養志 곧 아버지의 뜻 그 사람다움 어른다움을 세워 드린 겁니다. 당신 삶의 주인으로 사는 인격과 어울려 사는 관계 그 사람다움을 존중한 겁니다. 둘레 사람을 보살피는 노릇 그 어른다움을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이 책은 과학적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감탄할 정도로 논리적 구조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행간에 맞는 것이 대칭되어 있습니다. 인격적 죽음, 사회적죽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맨 마지막을 본다면 여전히 인격적 사회적 생명과 – 라고 나와 있고, 그리고 그것을 설명한 말이 당신의 삶의 주인으로 사는 인격과 어울려 사는 이것이 사회적입니다. 딱딱 행간을 맞추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은 음식을 아버지께서 주관하시게 했으니 이는 당신 삶의 주인으로 사는 인격을 존중한 겁니다. 상을 물릴 때에 주실 곳이 있는지 여쭈었으니 이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관계를 소중히 여긴 겁니다. 증자의 事親은 자신의 업적을 세우기보다 아버지의 삶을 세우는 일이었고 아버지의 관계와 어른 노릇 그 사람살이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생존 연명시키기보다 인격적이고 사회적이고 어른다운 생활을 영위하시게 거드는 事親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먼저 족보를 이야기 합니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고, 증자의 아버지 이름은 증석이고, 아들의 이름은 증원입니다. 증자가 아버지를 모실 때 식사로 모셨으니, 양자를 본다면 간머리가 붙어있습니다. 가운데는 임금 왕이 붙어있습니다. 미에는 먹을 식자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왕에서 음식을 대접함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손님을 모실 때 무엇을 드실지 생각을 합니다. 증자가 아버지 증식을 모실 떄 아버지 진지를 드실 때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 술을 준비해서 아들이갑니다. 아버님 진지잡수십시오. 하면 증석이 오냐 알았다고 합니다. 음식을 다 먹으니 증자는 남은음식을 어떻게 할까요? 라고 합니다. 그러니 고기는 뒷집에 가져다주고, 이 떡은 앞집에 가져다 주고, 막걸리는 마당쇠를 가져다주라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음식을 무릅니다. 그럼 남은 음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음식을 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증석이 죽고 증자가 봉양을 받을 때 일입니다. 아들은 음식을 찾아서 진자잡수시라하고 다 먹으니, 아들은 음식을 뺍니다. 그 차이입니다. 증자는 끝까지 물었고, 아들은 끝까지 묻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증자가 증석을 모실 떄 마당쇠 김씨 배씨는 증석을 어떻게 볼까요? 역시 어르신이라고 봅니다. 증원은 증자를 모실 때 아버지를 모심으로써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하나는 훌륭한 꼴, 하나는 비참한 꼴이 됩니다. 친구와의 관계도 없어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는 자기의 삶을 끝까지 살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본문 제 2막
제2막 : 아들의 일
제2막은 아들이 주인공으로 활약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음식으로 아버지를 봉양하는 아들의 효행을 보여 줍니다. 대상자 아버지의 조연으로 인해 빛나는 아들의 업적을 보여 줍니다. 아버지의 삶이나 사람살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남은 음식이 없다고 하여 아버지께서 당신의 식생활을 주관하시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아버지의 ‘인격’을 무시한 겁니다. 상을 물릴 때에 주실 곳이 있는지 여쭙지 않아 다른 사람과 나누시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아버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겁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당신의 일상생활과 인간관계를 잃었습니다. 수발받는 처지가 되자 당신의 생활을 당신이 주관하지 못하고 당신의 사회적 관계에서 어른 노릇은커녕 사람 구실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부양 대상자 돌봄 대상자 보호 대상자… 대상자였을 뿐입니다. 육체의 기력이 쇠했을 뿐 아니라 인격적 사회적 생명력도 상실한 사실상 식물인간 신세였습니다. 남이 해 주는 서비스에 종속하여 주는 대로 먹는 짐승같이 그저 생존 연명했을 뿐입니다.
아들 증원이 걸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養口體 곧 아버지의 입과 몸만 봉양한 겁니다. 당신 삶의 주인으로 사는 인격과 어울려 사는 관계그 사람다움을 존중하지 않은 겁니다. 둘레 사람을 보살피는 노릇 그 어른다움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겁니다.
증원의 事親은 아버지의 삶을 세우거나 아버지의 관계와 어른 노릇 그사람살이를 세우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인격적이고 사회적이고 어른다운 생활을 영위하시게 거들기보다 배부르고 등 따습게 생존 연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증원의 봉양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알아서 모실 테니 가만히 계세요. 편안하고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해 드릴 테니 아무 말씀 마시고 그저 해 드리는 대로 받으세요. 사람 구실, 어른 노릇, 그런 수고 이제 내려놓으세요.” 어른 대접은커녕 사람 취급도 아닙니다.
이 양지를 한다는 것, 뜻을 밝히는 것은 걸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원의 사치는 아버지의 삶을 세우거나, 그 사람살이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친자는 어버이 친자가 됩니다. 하나는 가까울 친 어버이 친자가 있습니다. 이 친자가 일 사 자에 친하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부를때도 이 친자를 부릅니다. 모친께서는 사친께서는 이러한 말을 씁니다. 이 친자는 어버이 친자라고도 합니다. 가까울 친과 어버이 친자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뜻을 사회복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내게 걱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까운 사람의 도움으로 내가 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기가 있다고 합시다. 아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가까운 사람, 부모님이 있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가까움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 복지 대상자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없다. 소외된 자. 두 번째는 어버이 친자인데, 어버이가 보통 해야 될 직무는 무엇일가요? 보살피는 일입니다. 걱정하고 보살피는 일이 어버이 친자입니다.
親 어버이 친자에 볼 견자, 가까워지려면 보아야 합니다. 볼 견자에 나무 목, 설립이 있습니다. 나무위에 서서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고사가 있습니다. 시골에 아들과 어머니가 사는데, 나무를 해서 숯을 만들어서 장터에 팝니다. 아들이 나무를 베어서 숲을 만들어서 팔려고 하니, 아들이 안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서서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살필 친자입니다.
걸언 했다 안했다. 사람은 스스로 사는 존재, 자기 의지대로 사는 존재입니다. 의지가 없으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끝까지 사람답게 살려는 뜻을 받들어야 사람을 돕는 일, 즉 양지복지입니다. 그래서 알아도 물어야 하고, 몰라도 물어야 합니다. 뜻을 알기 위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배부로고 등 따뜻하고, 편안하고, 재미있게 살지라도 뜻을 버리면 금수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생존 연명케 하는 일은 금수를 사육하는 일, 양구체 복지입니다.
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是謂能養, 至於犬馬皆能有養, 不敬何以別乎?
자유문효, 자왈 금지효자시위능양, 지어견마개능유양, 불경하이별호? 論語 爲政
요즘의 孝는 잘 부양하는 것이라는데, 개나 말도 다 그렇게 기르니 공경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공경한다 함은 사람다움을 존중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돕는다는 말입니다. 어른다움을 존중하여 어른을 어른답게 돕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다움을 생각지 않으면 어찌 사람을 사람답게 도울 것이며, 사람답게 돕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을 돕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른다움을 생각지 않으면 어찌 어른을 어른답게 도울 것이며, 어른답게 돕지 않는다면 어찌 ‘어른’을 돕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犬馬之養, 개나 말 돌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乞言해야 합니다. 노인이 사람답고 어른답게 사시게 하는 길은 乞言에 있습니다. 살아 계
시는 한 끝까지 ‘당신의 삶’을 사시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시며 ‘어른
노릇’ 하시게, 必有乞言! 반드시 乞言해야 합니다. 乞言은 노인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갖추어야 할 禮입니다. 모든 대상자
에게 적용할 보편적 사회사업 방법입니다. 사람을 돕는 사회사업이라
면 마땅히 걸언해야 합니다. 걸언하지 않고 돕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우민 취급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민복지로 빠질 위험이 크고 결국 우민화사업 되기 쉽습니다.
한덕연선생님의 표현은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기입니다. 걸언이라고 하는 것을 정약용은 어떻게 표현을 했을까요? 걸언의 결과를 3가지로 축약했습니다. 첫 번째는 효 두 번째는 공경하다. 세 번째는 사랑하다입니다. 한문으로는 효 제 자입니다.
효는 부모님께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공경은 어른들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는 아이들이나 불쌍한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면 됩니다. 걸언, 효제자야 라고 합니다. 이것을 주례할 때 이것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건, 둘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있어야 할 것은 건강과 서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신뢰가 있으면 똥으로 약을 만들든, 약으로 똥을 만들든 거기서 새로운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내가 부모님이 계실 때는 효를,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른들에게 공경을, 어르신들이 없으면 자식들에게 사랑을 배풀어야 합니다. 또한 어려운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방식은 걸언으로 해야합니다.
부모님께 묻고 부탁하고 의논하니, 어른다움이 형성되는 것이고, 어른들에게도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니, 기회를 주게 됩니다. 세 번째 방식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기는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내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지켜집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을 독립된 인격적 사회적 존재로 본 것입니다. 그래야 아이답게, 사람답게, 어른답게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렵고 불쌍한 사람에게 묻고 의논하고 부탁하고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들지 아니하고,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성장하되 내 것을 나누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