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57
(선조 7)
연전연패
부산진이 함락 되기까지 입은 倭軍은 戰死 100 여 명, 부상 400 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항전도 거기까지 였다.
慶상 좌병사와 경상 좌수사는 왜군이 처들어오기도 전에 城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고, 경상 우수사 元均은 배를 바다 속에 가라앉히고 도망쳤다.
왜군은 실전적 전투경험에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情報와 전술전략까지 완벽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무기는 물론 훈련조차도 제대로 않된 烏合之卒의 조선군이 倭敵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釜山에 상륙한 5 萬의 왜군 선봉대는 세 갈레로 나뉘어 破竹之勢로 북상을 계속했다. 倭의 침략 소식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조정에 전해졌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宣祖는 유성룡, 신립, 이일 등을 주요 보직에 임명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토록 하였으나..
이 당시 조선의 방어체제는 제승방략제, 즉 각 고을의 군사가 약속한 장소에 모여 대군을 이룬 뒤, 중앙에서 보낸 장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慶尙감사 김수가 대구 들판에 각 고을의 군대를 모아 진을 치게 하였으나, 훈련 한 번 받아본 일이 없는 오합지졸의 군대는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해 巡邊使 이일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거의 와해되고 깃발만 나부끼는 형국이었다.
이일이라는 자는 적에 대한 기본적인 군사정보도 탐색할 줄 몰랐다.
적이 코앞에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다가 倭軍의 습격을 받고 저항 한번 못해 보고 군관 한 명과 노비 한 명을 데리고 도망쳐 신립장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당연히 몰살되었다.
申砬은 당시 조선 최고의 장군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인물로, 驥馬戰의 달인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조정은 신립이라면 왜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신립은 “敵이 많고 强하니 험준한 요새인 鳥嶺에서 적을 맞아 싸우자”는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驥兵戰을 선택했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맞섰으나, 그곳은 논밭이 많아 말이 달릴 수 없는 곳인데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비까지 내리니 기마병은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고, 이는 왜군 鳥銃부대의 쉬운 과녁이 되고 말았다. 조선 최강이라는 신립의 부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져갔고, 신립은 남한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배수진을 친 것은 지휘관의 결단이었으나, 전투에 敗함으로써 휘하의 병졸이 전멸당했던 당시, 자타가 공인하던 소위 名將이라는 신립의 최후는 이렇게 끝을 맺고 만다.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뜻 만 앞세우다 결국은 수많은 병사와 애꿎은 백성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