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摩訶止觀 의 체계와 교설내용
김 종 두(혜명)
차 례 | |||
Ⅰ. 들어가는 말 Ⅱ. 구성과 개요 Ⅲ. 止觀의 대체적인 뜻(大意章) 1. 큰 마음을 일으킴(發大心) 2. 큰 행을 닦음(修大行) | Ⅳ. 止觀의 이름을 풀이함(釋名章) Ⅴ. 止觀의 體相(體相章) Ⅵ. 止觀에 속하는 法(攝法章) Ⅶ. 止觀의 偏僻과 圓滿(偏圓章) Ⅷ. 맺음말 |
Ⅰ. 들어가는 말
중국 南北朝 시대의 불교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해야 하는 불교의 본령을 잊고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치우침은 天台大師 智顗(538~597)에 이르러 그 편향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여 중국불교사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왔다. 이론과 실천, 교리와 수행의 敎觀二門으로 구성된 천태불교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취지로 완성된 것이 法華經의 교상을 설한 法華玄義와 法華文句이며 법화경의 觀心을 설한 마하지관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마하지관이 天台大師의 여러 저술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大師의 교학사상이 敎相과 觀心의 두 문을 마치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갖춘 종합적인 교학이라는 평가를 하는 사상적 계기도 마하지관이 제시하는 교학적 세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하지관은 실천을 통해야만 알게 되는 佛道의 성격을 뚜렷이 제시하고 거기에 정비된 행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것에 의해 체득되는 實相의 경지의 내적 구조도 명쾌하게 논술해 보이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일상의 어느 경계에서나 철저하게 止觀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상세한 수행의 자습서이다. 또 한편으로는 온갖 경계와 그것을 다스리는 처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佛法의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이처럼 마하지관은 당시의 온갖 잘못된 불교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서 설해진 동시에 훗날의 수행자와 지도자들을 위하여 강설된 법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용의 번쇄함에도 불구하고 훗날까지 佛道修行의 가장 완전한 규범이 될 수 있도록 내용에 완벽성을 추구한 것이라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마하지관을 통하여 그 체계와 교설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마하지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단 方便과 正修章의 구체적 설명은 다음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Ⅱ. 구성과 개요
마하지관의 구성은 五略十廣이라고 한다. 마하지관의 전체는 다음 十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십광으로 부른다. 이 점에 관하여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지금부터 앞으로 글을 열되 十장으로 할 것이다.
첫째는 大意
둘째는 釋名
셋째는 體相
넷째는 攝法
다섯째는 偏圓
여섯째는 方便
일곱째는 正觀
여덟째는 果報
아홉째는 起敎
열째는 旨歸이다.
十은 이것이 數가 方正한 것으로서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처음은 바로 기대함이 궁극에 있음을 나타내고 나중에는 바로 宗旨에 돌아서서 궁극에 도달하니 처음은 훌륭하게 하고 나중을 아름답게 한다. 대체로 十章 가운데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第1大意章
第2釋名章
第3體相章
第4攝法章
第5偏圓章
第6方便章
第7正觀章
第8果報章
第9起敎章
第10旨歸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0장으로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으며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게 설해 마치려고 章을 구성했다고 한다. 제1대의장에서는 槪略, 전체를 명시하고 제10지귀장에서는 불도수행의 문제가 다다르는 이유를 명시하고 시종일관 자기의 마음을 관하는 一大事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제1대의장에서 마하지관에서 설하고 있는 것의 전체를 보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5節을 세우고 있다. 이것이 五略이라 불리는 제1대의장의 구성이다. 이 부분에 관해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다.
해석한다면 그 열 가지 章을 푸는 것인데 처음은 大意를 풀이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머니에 묶어 넣은 것이고 처음의 것을 머리에 두고 끝의 것도 떠받았으니 의미가 넓어서 보기가 어렵다. 지금 잡아내면 다섯 가지가 되는데 말하자면
發大心,
修大行,
感大果,
裂大網,
歸大處이다.
라고 하고 있다. 마하지관의 교설내용은 너무나 갈래가 많고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므로 전체의 교설내용을 살펴보고 총괄하기 위하여 第1節發大心 第2節修大行 第3節感大果 第4節裂大網 第5節歸大處의 5節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1대의장에서 보여진 發心․修行․感果․裂網․歸處의 오략의 교설내용은 全10장(十廣)의 내용을 조망하고 예고한 것이고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중복하고 있다는 뜻이다. 발심의 단의 처음에 ‘오략을 일으켜서 십광을 나타낸다.’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다.
오략은 다만 십광인 것이다. 처음의 다섯 장은 다만 이것이 보리심의 한 가지 뜻일 따름이고 방편과 正觀은 다만 이것이 네 가지 삼매일 뿐이다. 과보의 하나의 장은 단지 違順을 밝힌 것인데 어그러지면 바로 2변의 과보가 있고 따르면 바로 수승하고도 오묘한 과보가 있다. 교를 일으키는 하나의 장은 자기의 마음을 굴려서 남을 이익되게 하되 혹은 부처님의 몸을 이루어서 權을 베풀어서 진실을 나타내거나 혹은 九界의 像을 이루고 점차와 원돈을 對揚하여 점차 원돈을 홍통한다. 지귀의 장은 똑같이 大處인 비밀장속에 귀결되는 것이니 따라서 略說이나 廣說이 뜻이 같음을 알아야 한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제1대의장에서 약설된 5절의 내용은 마하지관의 전 10장의 내용에 되풀이되어 있다는 뜻이다. 표를 통해서 오략과 십광간의 연관적 구조를 살펴보겠다. 먼저 본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제5장은 止觀의 개념의 뜻이고
제6장~제7장은 止觀의 實修이며(곧 四種三昧)
제8장은 止觀의 성과를 설한 것이며
제9장은 止觀의 응용이고
제10장은 止觀의 귀결이다.
(略 說) | (廣說) | |||||||||
1.(發大心) 열가지 틀린 생각(十非心)을 예시하면서 四諦나 四弘誓願 혹은 六卽(理卽, 名字卽, 觀行卽, 相似卽, 分眞卽, 究竟卽) 등의 교설을 매개로 삼아 생각을 바르게 하며 卽空,卽假,卽中의 止觀의 구극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 2장(釋名) | |||||||||
止觀에 相待, 絶對의 개념을 적용하여 相待止觀과 絶對止觀을 세우고 있음. | ||||||||||
3장(體相) | ||||||||||
體眞止, 方便隨緣止, 息二邊分別止의 三止와 從假入空觀, 從空入假觀, 中道第一義觀의 三觀에 대하여 논하고 그리하여 次第의 三止三觀을 不次第의 三止三觀 즉 圓頓止觀(一心三觀)으로 결론지음. | ||||||||||
4장(攝法) | ||||||||||
止觀에 만유가 포함되며 止觀에서 일체가 만들어 진다는 것을 논한다. | ||||||||||
5장(偏圓) | ||||||||||
교리에 大小라든지 불완전한 것과 완전한 것(半滿),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偏圓), 점진적인 것과 頓極的인 것(漸頓), 假인것과 진실한 것(權實) 등의 차이가 있으며 그것에 따라서 止觀에도 차이가 있다. | ||||||||||
2.(修大行) 修大行에서는 身, 口, 意 세가지에 관하여 止觀 실천법을 실천한다. 그것은 常坐, 常行, 半行半坐, 非行非坐이다. | 6장(方便) | |||||||||
6장은 止觀實修를 위한 예비적 보조적 수단(방편)으로써 다섯가지 五行을 밝힌다. 具五緣, 呵五欲, 棄五蓋, 調五事, 行五法이다. 합쳐서 二十五方便이라 한다. | ||||||||||
3.(感大果) 止觀의 성과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 | 7장(正修) | |||||||||
‘正修’에 이르러 본격적인 止觀實修를 설명한다. 보는것(能觀), 즉 자기 쪽에 서서 열가지(十乘), 보이는 것(所觀) 즉 대상 쪽에서 열가지(十境)가 밝혀지며 합하여 ‘十乘十境’이라 말한다. 十境 각각에 十乘觀法이 행하여지므로 百法成乘이라고도 한다. | ||||||||||
4.(裂大網) 止觀의 달성에 의해 세간의 미혹이라는 그물이 파열되는 것을 말함. 5.(歸大處) 止觀이 귀착하여야 할 곳을 밝힘 | ||||||||||
8장(果報) | ||||||||||
9장(起敎) | 설해지지 않음 | |||||||||
10장(旨歸) | ||||||||||
표에서 살펴본 것처럼 十大章 속에 제6방편장의 이십오방편과 제7정수장의 사종삼매 등이 사종삼매의 外儀와
상응함과 동시에 제1대의장을 서두로 하는 전5장이 바로 발심을 위한 기초로 설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십대장 중 제6의 方便 제7의 正修2장이 오략 중 제2의 수대행의 1항에 해당하고
마하지관 10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제8의 과보 제9의 기교 제10의 지귀의 후3장은 不說인 채로 남겨져 있다.
이 후3장만이 아니라 제7의 정수장의 십경 중의 후3장에 대한 십승관법도 또한 불설인 채로 남겨져 있다.
따라서 하안거가 끝나서 강설되지 않았다고 하는 최후의 3장 즉 제8과보장 제9기교장 제10지귀장의 내용은
오략의 제3절감대과 제4절열대망 제5절귀대처 속에 설해져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 강설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십경의 최후의 增上慢境, 二乘境, 菩薩境의 三境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 앞의 諸境의 교설 내용 속에 관계되어 설해져 있으므로 이들 三境에서 어떠한 것이 설해졌는가를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후의 三境 후의 3장이 설해지지 않았으므로 마하지관은 미완성의 책이라는 인상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지의가 의도한 것은 마하지관 속에서 충분히 설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Ⅲ. 止觀의 대체적인 뜻(大意章)
마하지관의 과제는 發心과 修行의 해명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불교를 알고
어떻게 실천해 갈 수 있는가와 그 가능성을 구명하는 것이 마하지관의 목표이다.
제1) 대의장에서는
(1) 發心
(2) 修行
(3) 感果
(4) 裂網
(5) 歸處의
오략으로 마하지관의 전체의 구도를 알 수 있다는 뜻이지만 오략의 중점이 발심과 수행의 2절에 있다는 것은 분량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일목요연하다. 후3절에 대해서는 그 行方에 그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에 불과하다. 혹은 그러한 통찰로서 발심과 수행이 이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발심과 수행의 문제는
感果,
裂網,
歸處라는 位層에서 재점검되고 재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지관의 문제는 자연히 발심과 수행에 집약되어진다.
1. 큰 마음을 일으킴(發大心)
발대심에서는 마하지관의 발심의 語義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유명한 설이다. 여기서는 菩提(깨달음의 지혜)를 道로 번역하고 質多(헤아려 아는 마음)를 心으로 번역하며 菩提心을 道心으로 번역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사상에 중요한 語義이지만 지의의 外敎비판의 입장에서 이러한 語義는 융합적인 입장에서 보다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道心이라는 번역이 사용되었다고 알 수 있다. 제7정수장에 들어가면 사종삼매의 두 번째로 ‘眞正한 菩提心을 발한다.’ ‘자비의 마음을 일으킨다.’라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부처의 깨달음의 마음 즉 道心은 智慧의 마음임과 동시에 자비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hṛdaya의 語義를 汚栗馱(草木의 마음), 矣栗馱(積聚하는 精要라는 뜻의 마음)라는 2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도 언어학적으로는 의미를 갖추지 못하는 것인데 이것도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지의의 이와 같은 해석은 悉檀(siddhānta)에 관한 예가 유명하다. 그렇지만 慧思는 이 말을 ‘모두에게 베푼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지의도 이 해석에 기초해서 인용하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실단은 성취된(siddha), 究極의 것(anta)이라는 뜻이고 모두에게 베푼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불교언어의 독자적인 해석아래서 천태교학의 교화론이 보편화되었다고 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고 誤讀誤解라고 할 수 있는 어원해석이 오히려 중국불교로서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苦諦로 그릇된 발심의 現狀을 보이고 이어서 바른 발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四諦로 발심의 여러 가지 相異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四弘誓願에 의해 行願의 입장에서 그 是非를 재점검하고 최후에 六卽으로 수행의 初, 中, 後에 일관된 발심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2. 큰 행을 닦음(修大行)
수대행에서는 발심이 수행의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을 밝히고 수행방법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를 설명한다. 수행방법은 身, 口, 意 세 가지에 관하여 止觀 실천법을 설명한다. 이것은
常坐,
常行,
半行半坐,
非行非坐의 네 가지 삼매이다.
이 사종삼매라는 수행법의 체계도 지의가 창안한 것이다. 隋天台智者大師別傳에는 지의의 유언으로서
‘바라제목차는 너희의 스승이며 내가 항상 설한 사종삼매는 너희를 밝게 인도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觀心論에 문인 智晞(556~627)과 智郞에게 ‘사종삼매를 닦는 것이 참된 무생인을 얻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또한 灌頂의 觀心論疏에서 전체의 약 4분의 1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 지의와 門弟 사이에서 얼마만큼 사종삼매를 중시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이처럼 사종삼매는 지의의 수행체계였다. 4종의 분류는 앉는 것과 걷는다는 2종의 행동양식을 주로해서 오로지 앉는 수행법과 오로지 걷는 수행법, 앉는 것과 걷는 것을 절충한 수행법, 앉는 것과 걷는 것에 제한이 없이 모든 행동양식에 적용되는 수행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처럼 4종의 수행방법에 의해서 똑같이 삼매가 얻어지는 것이다. 삼매를 調直定으로 규정하고 뒤틀린 것을 고르고 바르게 하는 선정이라고 하였다. 大智度論은 삼매의 뜻을 ‘마음을 잘 한 곳에 머물러 두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삼매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마음을 각자가 현전 당면한 법계의 한 곳에 머물게 하여 산란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다. 특히 行, 住, 坐, 臥에서 坐를 제일로 중요시하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4종의 삼매의 수행법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겠다.
먼저 常坐三昧는
文殊所說經․文殊問經의 두 般若經에 의하여 설명되며 一行三昧라고도 부른다.
90일간 一佛을 향하여 오로지 가부좌로 앉아서(身業), 침묵으로 일관하며(口業), 오로지 한결같이 법계를 염한다(意業). 단 피로, 질병, 수마가 닥칠 때는 佛名을 稱할 수도 있다.
常行三昧는
般舟三昧經에 의한 것으로 ‘佛立三昧’라고도 한다. 定中에 능히 시방현재불이 그의 앞에 서 있음을 본다. 눈 밝은 사람이 맑은 날 밤 하늘의 별을 보듯 부처님의 숫자 또한 이와 같다고 본다. 그런 까닭에 불립삼매라고 한다. 장엄도량에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90일간 行旋하며(身業), 稱名하거나 걸음마다 소리마다 생각마다 오직 아미타불에게 있다고 念한다(口業). 그리고 자신과 아미타불은 平等一切라고 觀한다(意業). 이 常行三昧法은 후세의 정토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半行半坐三昧는
方等多羅尼經이나 법화경에 의해 7일간 또는 21일을 1주기로 설정하여 때로는 行道하고 坐禪 예배하는 수행방법으로 方等三昧나 法華三昧라고도 한다. 몸으로는 住, 臥를 제한하여 半行半坐로 수행함인데 方等三昧는 大方等陀羅尼經에 기초해서 설정되어진 行法이다. 이 경은 摩訶袒持陀羅尼의 因緣․功德․修懺의 방법을 서술한 것으로 10종의 다라니를 들고 이 다라니는 12신주의 名字로 이것을 외우면 魔의 장애를 없애고 善根을 증진시키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지의는 마하단지다라니를 大秘要遮惡持善이라고 해석하는 것에서도 이 삼매를 닦는 목적이 다라니의 공덕에 의해서 십악오역의 악업을 멸하고 선업을 증장시키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法華三昧는 법화경에 따라 10가지 방법이 설명된다.
그것은
嚴淨道場,
淨身,
三業供養,
請佛,
禮佛,
六根懺悔,
遶旋,
誦經,
坐禪,
證相등이다. 입으로 다라니를 외우거나 법화경을 읽어 예배 참회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止觀하는 방법은 實相觀과 歷史觀을 통해 번뇌를 누르고 선근을 많게하는 일에 마음을 두어 罪福無住를 觀照하거나 惑, 業, 苦 세 가지 그대로가 法身 반야해탈의 三德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항상 안락한 세계에 유희 할 수 있다고 한다.
非行非坐三昧는
위의 세 가지 정해진 행위외에 行, 住, 坐, 臥 언제나 행하는 삼매이다. 慧思禪師는 ‘隨自意三昧’라고 하며
大品般若經에는 ‘覺意三昧’라고 하였다. 전자는 마음이 일어나는 즉 삼매를 닦는 것(意起卽修三昧)이고 후자는 마음이 나아가는 곳을 모두 깨달아 알아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意之趣向皆覺識明了)이라는 뜻이다.
방법으로 心性에 의지하는 것의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諸經觀이다. 請觀音經등 관음경전을 염송하거나 관음보살을 念하는 것이다.
둘째는 三性觀이다. 心에는 善, 惡, 無記의 세 경우가 있는데 각 경우에 四運心에 따라서 反照하여
바로 그곳에 中道實相을 요달한다.
이와 같이 4종의 삼매행법이 행동양식위에서 각각 身의 開와 遮, 口의 說과 黙, 意의 止와 觀으로 설해져 있다.
특히 意의 止와 觀의 설명은 동작과 發聲등의 행법을 어떻게 마음의 문제로 주체화해가는 가에 대해
그 적용예를 보인 것이고 觀心釋에 해당하는 중요한 것이다.
수대행의 단에서 사종삼매를 설하고 그 수행법을 개별적으로 상세하게 설하는 이유는 발대심의 뒤를 계승해서 불도수행에 들어가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수행법이 있지만 그 전체의 像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4종에 섭수된 개개의 수행법은 모두 佛法의 세계를 바로 觀할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종삼매는 모두 불도수행으로서 충분한 것이고 어느 수행법을 선택해도 불도수행으로서 완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하지관의 수행론으로서는 제6방편장의 五事를 조절하는 단에서
調身,
調息,
調心이 설해져 있다. 그리고 제7정수지관장에서 먼저 端坐해서 바르게 觀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처럼
4종 가운데서도 상좌삼매에 중심이 놓여져 있고 수행방법을 좌선의 一行에 집약하고 있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하지관은 후에 禪定境과 諸見境에서 현저하게 좌선의 불도수행으로서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하려는 의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비행비좌삼매도 포함된다.
Ⅳ. 止觀의 이름을 풀이함(釋名章)
마하지관의 제2장 ‘止觀의 이름을 풀이하는 釋名’에서는 止觀이라는 말의 의미를 네 부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相對的인 의미,
둘째는 絶對的인 의미,
셋째는 止觀의 異名,
넷째는 三德에 통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먼저 相對止觀에 대해서는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止와 觀에 대해서 각각 세 가지로 이렇게 말한다. 止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으니 息止의 뜻․
停止의 뜻․對不止止의 뜻이다. 먼저 息의 뜻은 모든 나쁜 覺觀이나 망념의 생각과 상념을 멈추거나 끊는 것이다.
停의 뜻은 마음이 진리의 이치를 반연하여 생각을 지금 이 자리에 매고 머물러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 가운데 ‘끊음’은 타파하는 대상(所破)에 나아가 이름한 것이며 ‘머무름’은 끊는 주체(能止)에 나아가 이름한 것이다. 對不止止의 뜻은 나머지 둘과 이름은 비슷하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진리의 이치(諦理)를 맞추어서 말한 것이다. 無明이 곧 法性이고 法性이 곧 無明이므로 無明은 그침(止)도 아니고 그치지 않음(不止)도 아니지만 無明을 불러 그치지 않음(不止)이라고 한다. 法性도 역시 그침(止)도 아니고 그치지 않음(不止)도 아니면서 그침(止)라고 부른다. 이것은 無明의 그치지 않음(不止)에 상대하여 法性을 그침(止)이라 한다. 이것을 ‘그치지 않음에 상대한 그침’이라 한다.
觀에도 역시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꿰뚫는다는 뜻의 貫穿義이니 예리한 지혜로 번뇌를 꿰뚫고 없앤다는 것이다.
둘째는 보아 통달한다는 뜻의 觀達義이니 觀하는 지혜가 통달되어 眞如에 계합하는 것이다.
셋째는 觀하지 않음에 상대한 觀이라는 뜻의 對不觀觀이니 無明이 곧 法性이고 法性이 곧 無明이므로
無明은 觀도 아니고 不觀도 아니지만 無明을 불러 不觀이라고 한다.
法性도 역시 觀도 아니고 不觀도 아니면서 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無明의 不觀에 상대하여 法性을 觀이라 한다. 이것을 ‘觀하지 않음에 상대한 觀’이라 한다.
셋 가운데 앞의 두 가지 뜻은 각각 대상 경계와 관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이름 붙인 것이다.
다음은 圓頓의 실천법인 絶待止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것은 앞의 세 가지 相對止觀을 가로로 파하고 다음에는 세로로 파하는 것이다.
가로로 파할 때에는
自性․
他性․
共性․
無因性의 四句에 대해 불합리한 점을 설하고
세로로 파할 때에는
生生․
生不生․
不生生․
不生不生의 四句에 대해서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설한다.
이와 같이 絶待止觀은 가로와 세로의 모든 상대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思議를 뛰어넘고
惑․業․苦의 三道를 뛰어넘으며 敎․觀․證을 뛰어넘고 있으므로
이것을 ‘有爲를 초월한 止觀’이고 ‘생사가 끊어진 止觀’이며
‘不思議止觀’이고 ‘無生止觀’이며 ‘一大事止觀’이라고 한다.
허공을 작은 하늘과 비교하여 크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絶待止觀도 상대하여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오직 하나의 法界일 뿐이다. 진실의 지혜를 개발하면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은 끊기고 끊김도 바로 또 다시 끊긴다고 한다. 그리고 마하지관에서는 성자의 경지인 絶待止觀을 과연 초심자가 어떻게 행할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한다. 여기에 대하여 지의는 육즉의 뜻으로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지금 육즉으로써 견주어 보면 초심자도 잃는 것도 없고 성인의 경지에서도 넘치는 바가 없다라고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육즉은 모든 존재 자체가 곧 中道實相이라는 理卽으로부터 부처의 경계인 究竟卽까지의 여섯 계위이다. 육즉에 의하면 초심자라 하더라도 그 자리가 곧 實相이므로(理卽) 감히 다가갈 수 없는 바가 아니며(無所失) 또 수행이 깊어진 경우라도 자신의 위치를 육즉을 기준으로 점검할 수 있으므로 아만심을 내거나 잘못된 실천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無所濫). 이와 같이 육즉은 초심자를 포함한 모든 수행자가 圓敎의 이치에 따라서 실천할 수 있도록 설한 지의의 독특한 圓敎 법문이다.
다음은 다른 이름을 회통함(會異)이다. 여기에서는 여러 경전에서
나오는 표현 가운데 絶待止觀에 거두어지는 것을 밝힌다.
止觀의 다른 이름은
멀리 여의다(遠離)․
주하지 않음(不住)․
집착하지 않음(不著)․
無爲․寂滅․분별하지 않음(不分別)․
禪定․버림(棄)․
제거함(除)․
희사함(捨)등이 모두 止의 다른 이름이고
知見․明識․眼覺․智慧․환하게 비추어 나타내는 照了․비추어 통달함인 鑒達 등은 모두 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止觀의 다른 이름도 이미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미 絶大이고 不可思議하다.
지의는 이렇게 경전의 예를 들어서 絶待止觀은 모든 경전에 공통적으로 설해진 궁극의 가르침
바로 그것임을 보였다.
또한 止와 觀은 서로 합해진다고 한다.
즉 止는 또한 觀이라 이름하고
또한 不止라 이름한다.
觀도 역시 止라 이름하고
또한 不觀이라 이름한다.
바로 앞에서 풀이한 이름이나 뜻과 같다고 하면서
止와 觀은 본래 하나라고 하고 있다.
다음은 三德에 통한다는 通三德이다.
여기에서는 止觀의 실천에 이미 여래의 세 가지 德이 갖춰있음을 밝힌다.
三德(法身, 般若, 解脫)에 통한다는 것은
止는 斷滅이니 斷滅은 해탈과 통한다.
觀은 智慧로서 반야에 통한다.
止와 觀이 같은 것은 捨相이라 하므로 法身에 통한다.
즉 止는 奢摩他이고 觀은 毘婆舍那이다.
奢摩他와 毘婆舍那가 같은 까닭에 憂畢叉(捨相)라는 구조가 三德이라는 것이다.
이 후에 4개의 문답을 통해서 그 의미를 다시 분명하게 하고 있다.
Ⅴ. 止觀의 體相(體相章)
마하지관의 제3장 ‘止觀의 體相을 해석함’에는 天台止觀의 중요한 개념들이 설해져 있다.
대강 네 가지로 그 체의 理法이 깊고도 유현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석존에 의해서 설해져 있는 敎法이 많은 까닭에 相으로써 나타내는 敎相이다.
둘째는 理法에 들어가는 門이 같지 않으니 따라서 눈의 지혜로써 나타내는 眼智이다.
셋째는 그 진리에 方便과 眞實이 있으니 境界로써 나타내는 境界이다.
넷째는 사람에는 차이와 같음이 있으므로 得失로써 나타낸다는 得失이다.
먼저 敎相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圓敎의 止觀으로서 體眞止,
方便隨緣止,
息二邊分別止의 三止와
從假入空觀,
從空入假觀,
中道第一義觀의 三觀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서 一心三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체진지는 모든 존재가 인연화합으로 생겼으므로 空을 체득해서 眞諦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自性 즉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진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직접 체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 자성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은 허깨비와 같다. 즉 모양은 보이지만 그 성품은 비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체진지는 모든 존재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체득해서 그 존재에 관련된 망상을 그치는 것이다. 그리고 체진지의 낱말을 풀이하면 ‘體’는 존재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체득하는 것이고 ‘眞’은 체득한 결과 망상을 그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인연이 假合되어 幻化으로 되니 그 성품이 虛妄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를 體라 이름한다.
반연하여 생긴 망상은 공을 얻으면 그치는 것인데 공이 바로 진실이므로 이를 체진지라고 말한다.
방편수연지는 세간에 들어가 방편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앞의 체진지에서 모든 존재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체득해서 망상을 그치고 방편수연지에서는 한 차원 더 올라가서 체진지에서 체득한 것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적용한다. 이것이 假에 들어감이다. 그리고 방편수연지의 낱말을 풀이해 보겠다. ‘方便’은 체진지에서 空을 체득했지만 이 空도 초월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즉 空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空을 方便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隨緣’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즉 같은 말이라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약도 되고 병도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空을 가르칠 때 이 空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는 중생에게 전해주면 전보다 발전하기는커녕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이 경우에는 약이 오히려 병이 된다. 이렇게 같은 가르침이라도 사람에 따라 병도 되고 약도 됨을 잘 알아서 그때그때 상황과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止’는 俗諦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즉 체진지가 眞諦에 마음을 두는 것이라면 방편수연지는 俗諦에 마음을 머무르는 것이다. 그래야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眞諦에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세간을 초월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보살이 假에 들어가서 직접 실천에 옮기고 空을 空이 아니라고 알기 때문에 方便이라고 말한다. 또한 약과 병을 잘 분별하므로 隨緣이라 말하며 마음을 俗諦 가운데 편안히 하는 것이므로 止라 이름한다.
식이변분별지는 空과 假에 대한 분별을 그치는 것이다. 방편수연지가 현실세계에서 空에 의지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라면 식이변분별지는 방편수연지에서 현실세계에 집착할 우려가 있으므로 그 조차도 넘어서자는 것이다. 그리고 방편수연지가 空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 것이라면 식이변분별지는 假에 대한 집착을 경계한 것이다. 이렇게 식이변분별지는 空과 假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식이변분별지는 俗이 俗 아님을 알므로(속에 집착하지 않아) 俗에 마음의 번뇌가 없어지고 또한 俗아님도 얻을 수 없음을 알므로 空에 마음의 번뇌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俗과 空의 두 가지 치우침이 사라지는 것이다.
三止의 이름은 경전이나 논전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三觀을 비추어 바라보고 지의가 창안했다고 한다.
또한 앞의 석명장에서 말한
止息․
停止․
對不止止와 貫穿․
觀達․
對不觀觀은 이 체상장에서 말한 뜻과 표현은 비슷하지만 의미내용은 다르다고 말한다
석명장의 세가지 모습은 一諦를 보이는 것이지만 이 세가지 모습은 空․假․中의 三諦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 세운 三止의 모습은 그대로 三諦이며 나아가 하나의 止에 앞서 말한
止息․
停止
․對不止止의 뜻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체진지의 경우 空의 뜻을 체득하여 망상이 모두 쉬면 止息의 뜻이고 마음을 이치에 매어 인연화합의 뜻을 알면
停止이며 이러한 이치가 곧 진리이며 本源이니 실로 止나 止아님이 없으므로 이것은 不止止의 뜻이 된다.
마찬가지로 방편수연지에도 식이변분별지에도 이 세 가지 모습이 포함되어 있고 각각 空․假․中의 三諦인 동시에 止에 세 가지 모습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다음에 三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지의는 瓔珞經의 三觀說에 대하여 초기 강설 때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마하지관에서는 세 가지 觀으로서 종가입공관․종공입가관․中道第一義諦觀을 말한다.
종가입공관은 현실세계인 假를 초월하여 空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세계인 假는 俗諦에 속하고
진리세계인 空은 眞諦에 속한다. 이는 俗諦를 잘 관찰하여 眞諦의 空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二諦觀이라 한다. 이 내용에 대하여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假를 觀해서 空에 들어가 空의 진리를 보는 것이다. 能(주관)과 所(객관)를 합쳐서 논하고
空의 진리를 알았을 때 자연히 假의 참모습도 드러나게 되므로 二諦觀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하지관에서는 二諦觀의 의미를 다른 平等觀이나 中道第一義諦觀의 의미와 비교하면서 그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그 후에 8종의 문답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4번째 문답에서는 ‘諦’는 ‘法性’과 같은 뜻이고 5번째 문답에서는 ‘涅槃’과 6번째 문답에서는 ‘無漏’와 7번째 문답에서는 ‘無生’과 같은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8번째 문답에서는 假觀에서 空觀에 들어가는데 반드시 假觀을 파하고 空觀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리고 四句로서 답하고 있다. 즉 파하지 않고 들어감, 파하고 들어감, 파하고 들어가지 않음, 파하지 않고 들어가지 않음인데 나아가서는 三十六句가 있다고 한다.
종공입가관은 空을 체득해서 그것을 현실세계에 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세계인 假를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假에 뛰어든다. 이것을 假가 空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平等觀이라고 한다. 이 종공입가관의 낱말을 풀이해 보겠다. ‘從空’은 空을 절대적으로 보지 않고 임시로 수용한다는 것이고 ‘入假’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보살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空과 空하지 않음을 알아서 方便으로 假에 나아가므로 ‘空으로부터(從空)’라고 하고
약과 병을 분별하여 틀림이 없으므로 ‘假에 들어감(入假)’이라 한다.
그리고 平等觀이라 말함은 종가입공관에 비교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中道第一義諦觀은 처음의 觀으로 空을 쓰고 나중의 觀에서 假를 쓰는 것은 모두 方便이지만
中道에 들어가면 능히 이 二諦를 동시에 비추게 됨을 말한다.
종가입공관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치열한 구도의식은 있지만 세간을 구제하려는 의지는 적다.
그리고 종공입가관에서는 진리를 깨달아 세간에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지만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심을 스스로 제어하기 곤란할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다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앞의 두 觀을 方便의 길로 삼아 中道를 깨닫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을 살펴보겠다.
종가입공관은 假의 空함을 아는 것이니 이것은 생사의 空함이다.
그리고 종공입가관은 空도 空함을 아는 것이니 이것은 열반의 空함이다.
중도제일의관은 곧 이 두 가지 극단을 뛰어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앞의 두 觀을 방편의 길로 해서 中道를 깨닫는 것이다.
이 후에 2개의 문답이 있는데 三觀의 境位가 분명하게 되어 있다.
Ⅵ. 止觀에 속하는 法(攝法章)
마하지관의 제4장 攝法에서는 止觀이라는 말에 諸法이 속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止觀의 간략한 한마디 말 가운데에 모든 부처님의 敎法이 속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止는 王三昧(禪定)이고 觀은 般若(智慧)의 뜻이라고 하며 다시 그 法을 여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일체의 이법(理)을 포함하고
둘째는 일체의 미혹(惑)을 포함하며
셋째는 일체 지혜(智)를 포함하고
넷째는 일체 수행(行)을 포함하며
다섯째는 일체 위계(位)를 포함하고
여섯째는 일체의 교(敎)를 포함한다.
이 여섯 관점에 대해서 어느 課題도 모두 止觀이라는 語義에 포함되는 것을 해설하고 있다.
첫째로 일체의 이법을 섭수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것은 이미 제3장 ‘止觀의 體相을 해석함’에서
상세하게 설한 것과 중복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확인한다는 뜻에서 설명은 생략하고 있다.
둘째로 일체의 미혹을 섭수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 이것은 順觀의 十二因緣을 설하고 그것을
煩惱道․
業道․
苦道라는 三道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을 病이라고 말하며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藥을 알아야 하는데 그 약은 從假入空의 止觀이라고 한다.
다시 대승의 가르침에는 習氣의 번뇌를 말하고 이것을 三界 밖의 무명이라 하므로
여기에 대승의 十二因緣의 해석이 성립한다. 여기에 無漏의 경계 속의 네 가지 障인
緣障․
相障․
生障․
壞障이 생긴다.
緣障은 煩惱道이고
相障은 業道이며
生障과 壞障은 苦道라고 한다. 이처럼 三道가 되므로
삼계 밖에도 十二因緣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이후는 모두 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이 무명의 惑은 入假와 入中의 두 觀으로 대치되어 지는 것이다. 二乘과 通敎의 보살이 三界 내의 미혹을 다 끊어버렸더라도 假觀이나 中道觀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三界 밖에 태어났어도 假觀을 닦아 塵沙惑을 파해야 된다고 한다. 別敎와 圓敎의 사람은 中道觀을 닦아 三界 밖의 三道를 대치하여 무명을 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셋째로 止觀이 일체 지혜를 섭수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것도 前章에서 眼智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 중복되므로 생략하고 있다.
넷째로 止觀이 일체의 수행을 섭수 한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앞의 智解에 의해서 수행을 전개해 가는 것이다. 이 수행에는 두 가지가 있다. 慧의 行(正行)과 行의 行(助行)이다. 그리고 三藏敎․通敎․別敎․圓敎의 行相을 보이고 있다. 이어서 根本四禪․四空處定․四無量心․九想․八念․十想․八背捨․九次第定․師子奮迅三昧․超越三昧․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八正道․四諦․十六行․四弘誓願․十八不共法․四無畏․三三昧․三解脫門․六度․九種大禪․百八三昧․十八空․十喩․五百陀羅尼 등의 모든 慧의 行, 行의 行이 止와 觀에 포함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로 일체의 위계를 섭수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藏敎의 七賢․七聖의 四沙門果의 위계, 二十七賢聖의 위계 등은 析空觀에 포함된다. 通敎의 三乘에 공통하는 十地의 위계는 八地까지 모두 入空의 止觀에 섭수된다. 만일 종공입가관에서 歷別의 수행을 하여 깨침을 얻지 못하였다면 三十心의 미혹을 항복받는 위계를 이룬다. 즉 空觀과 假觀의 두 가지가 섭수하는 것으로 된다. 만일 깨침을 얻으면 三道를 파하고서 十地의 위계를 이룬다. 즉 中道觀에 포함되거나 혹은 假觀이 섭수하는 바가 된다. 圓敎의 육즉․四十二位는 中道觀에 포함된다. 仁王般若經의 十五忍의 위계에서 十四忍의 반야는 因의 위계, 十五의 妙覺은 果의 위계이다. 그렇지만 모두 中道觀에 섭수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고 있다. 즉 대승의 經論에서 수행의 地位를 밝히는 의미를 묻는다. 中論에서 설한 ‘외도의 사람들처럼 세간의 因果를 파한다면 즉 금세니 내세니 하는 길은 없을 것이며 출세의 인과를 파한다면 바로 三寶니, 四諦니, 四沙門果니 하는 것은 없으리라’라는 主旨의 교설에 기초해서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四敎에 미치는 것과 같은 얕고 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섯째로 일체의 敎를 섭수한다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먼저 世間이나 出世間이나 名字는 모두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세간의 가르침에는 六師外道가 설한 것처럼 惡한 가르침이 있고 儒敎의 가르침처럼 善한 가르침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출세간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부처님은 方便으로서 微塵속에 갖춰져 있는 大經卷을 내어서 보이고 널리 중생을 이익케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래의 걸림이 없으신 지혜의 經卷이 구족되어 중생의 몸 속에 있는데도 뒤집혀진 생각이 이를 덮어서 믿지 않고 보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八聖道를 수행하여 일체의 虛妄을 파하여 자기의 지혜가 여래와 같음을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여섯 가지 관점에서의 課題가 모두 止觀에 섭수되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실은 하나의 이법이
일체의 이법, 일체의 미혹, 일체의 지혜, 일체의 수행, 일체의 위계, 일체의 교를 섭수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미혹이 일체의 이법, 지혜, 수행, 위계, 교를 섭수한다. 또한 하나의 가르침이 그 속에 일체의 가르침을 섭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체의 이법, 미혹, 지혜, 수행, 위계를 섭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Ⅶ. 止觀의 偏僻과 圓滿(偏圓章)
마하지관의 제5장 偏圓에서는 止觀의 偏僻과 圓滿을 밝히고 있다.
즉 前章에서 止觀의 語義에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거두어지는 것을 설한 것이다.
다음으로 止觀에 거두어지는 여러 종류의 가르침에 대해서
大와 小,
共과 不共,
權과 實,
思議와 不思議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편벽한 것과 원만한 것을 가려낼 수 있다. 그래서 이 章이 설해진 것이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大乘과 小乘을 밝히고
둘째는 半과 滿을 밝히며
세 번째는 偏僻과 圓滿을 밝히고
네 번째로는 漸과 頓을 밝히며
다섯째는 權과 實을 밝힌다.
첫째로 大와 小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大乘의 가르침과 小乘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승에서는 지혜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다만 析法의 生滅의 止觀을 닦고서 色心을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外道의 그릇된 分析에 의해서 常見(有의 見)․斷見(無의 見)에 떨어지는 것을 바른 분석법에 의해 身心의 道理를 분석하고 어떠한 것도 인연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지혜가 깊고 예리하며 불생불멸의 體法의 止觀을 수행하고 모든 것이 空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 차이는 大乘의 體法은 三藏敎와 달라서 三藏敎의 止觀은 이름은 假이면서 또한 法은 實인 것으로 實을 분석하여 空하게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기둥을 파하여 空하게 하는 것과도 같다. 대승의 止觀은 名實이 함께 假이면서 自相이 空하여 원래부터 虛寂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三藏敎에서 分析의 止觀은 마음을 따라 身心을 觀하는 事의 觀이고 진실한 理法을 획득하지 못한 일면이 있지만 대승에서 體解의 止觀은 理智에 따라 色心을 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體解의 止觀은 三藏敎의 가르침에 고집하는 그릇된 생각을 空理에 의해서 깨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圓敎와 같은 諸種의 대승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도 空理에 의해서 깨트릴 수 있다고 한다.
둘째로 半과 滿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半은 九部經의 법을 밝힌 것이고 滿은 十二部經의 법을 밝힌 것이다. 涅槃經이 滿의 가르침이고 나머지는 半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종래의 생각을 비판하고 菩提流支가 설한 三藏의 가르침은 半, 般若經 등의 大乘의 가르침은 滿이라고 하는 說을 지적한다. 그리고 半․滿은 大․小의 뜻과 같고 析法이 半, 體法이 滿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셋째로 偏과 圓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章名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前과 後를 나누는 鍵槪念으로서 사용되어 있다. 偏은 偏僻을 뜻하고 圓은 圓滿을 뜻한다. 앞의 小와 半의 두 말이 狹義라면 偏의 語義는 廣義의 뜻이 있다고 한다. 즉 偏의 語義는 小에서 大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析法의 止觀을 小乘과 半字에 국한시키므로 析法이 大乘에 통한다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偏의 語義를 사용하면 三藏敎에서 別敎의 止觀까지의 전체를 가리킬 수가 있고 圓의 語義에 의해서 그것과는 다른 圓敎의 止觀을 名指할 수가 있어서 편리하다고 한다.
넷째로 漸과 頓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漸은 次第를 뜻하고 얕은 곳에서 깊은 곳에 이른다는 뜻이며 頓은 頓足이나 頓極을 뜻한다. 그리고 頓과 漸은 앞의 偏과 圓의 뜻과 같다고 한다. 앞의 三敎의 止觀은 모두 漸이고 圓敎의 止觀만이 頓이다. 즉 三藏敎와 通敎의 止觀은 漸이고 頓의 뜻은 없으니 단지 偏의 진실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圓敎의 止觀은 頓이고 漸은 아니고 커다란 진실된 바른 道를 행하며 邊에 卽하면서도 中道이다.
別敎의 止觀은 漸이면서도 頓이다. 初心에서 中道를 알기 때문에 頓이고 方便에 의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漸이다. 앞의 두 가지 觀은 그 修因 속에 敎․行․證의 人이 있고 證果 위에는 다만 그 敎가 있을 뿐이며 行․證의 人은 없다고 한다(有敎無人․果頭無人). 왜냐하면 寂滅의 열반에 들어가서 空에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에 충분한 부처님의 자격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別敎는 修因 속에 敎․行․證의 人이 있지만 證果에 관련시킨다면 다만 그 敎가 있을 뿐이고 行․證의 人이 없다.
왜냐하면 무명을 파하여 初地에 오를 때 그것은 이미 圓敎의 初住에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실제는 別敎의 初地 이상의 人이 없다는 것이 된다. 圓敎에서는 修因 속에서의 敎․行․證의 人은 相應의 證果를 얻는 것이 되고
證果의 人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앞의 三敎의 止觀의 敎․行․證의 人이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면 圓敎를 모르는 것이니 圓敎의 止觀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漸을 열어서 頓을 開顯하면 모두 圓敎의 止觀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모두 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漸에 있어서 頓이라고 하는 道理이다. 물론 漸에서 頓으로 들어가는 쪽은 일정하지 않고 여러 경우가 상정되지만 그것을 毒이 나타나는 모습(毒發不定)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漸敎의 漸의 뜻은 圓敎의 漸의 뜻과 다르지만 圓敎의 漸의 뜻과도 중복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漸敎의 圓의 뜻은 圓敎의 圓의 뜻과는 단연코 다른 것이다. 漸敎의 漸의 뜻은 圓敎의 漸의 뜻이 되는 것이 있어도 漸敎의 圓의 뜻은 임시로 건립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앞의 三敎의 證果는 결코 圓敎의 妙覺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승의 小는 대승의 小가 아니지만 대승의 小가 될 수 있는 것이고 소승의 大는 대승의 大가 아니고 대승의 大로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半과 滿, 偏과 圓에서도 마찬가지지만 權과 實에 관해서만 보면 權敎의 方便은 진실교의 方便이 아니지만 진실교의 方便이 될 수가 있고 權敎의 진실은 진실교의 진실이 아니고 또한 진실교의 진실로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마하지관이 일관되게
絶待․
不思議․
妙의 止觀을 행하는 것에 의해서
처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충분히 현실화된다는 것을
이와 같은 語義를 밝히는 것에 의해서 보여준 것이다.
이 후에 涅槃經이 여러 곳에서 설한 五味喩에 대해서
三藏敎의 漸敎의 圓意,
通敎의 漸敎의 圓意,
別敎의 漸敎의 圓意,
圓敎의 漸敎의 圓意를 觀心의 해석으로서 나타내 보이고
圓敎에서 처음 理와 敎와 行과 證의 충분한 이해가 성립하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다섯째로 權과 實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權은 權謀로서 거짓된 계략의 뜻이고
잠시 사용하고는 폐하여 버리는 것이다. 實은 實錄으로서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고
구경의 宗旨의 歸結이라고 한다.
權을 나타내 보이는 데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法華玄義에서 연꽃의 세 가지 비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진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權를 시설한 것이고
權을 열어서 진실을 나타낼 수가 있기 때문이며
權을 폐하여서 진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의도에서 圓頓의 一實의 止觀을 밝히기 위하여
三藏敎․
通敎․
別敎의 3종의 權의 止觀을 나타내 보인 것이고
權을 열어서 實을 나타내어
權도 實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權을 폐하고 實을 나타내며
權이 폐하여져도 實은 보존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Ⅷ. 맺음말
이상으로 마하지관의 체계와 교설내용에 대해 총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마하지관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의 경지가 아무리 뛰어나고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명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상누각과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禪宗에서 대체로 이론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소한 자기의 수행이 완성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교학의 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평범한 수행자가 조그마한 경지를 얻고서 쉽게 만족해버리는 것에 대한 경책과 또한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러서는 佛法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마하지관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觀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논리적인 정합성을 추구하고 있어서 오히려 번쇄하다는 느낌을 지니게 한다. 그렇지만 남종선사상이 지니고 있는 초논리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신비주의화 내지 관념화라는 비판의 범주에서 멀찌감치 빗겨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논리의 전거를 대승의 경론에서 광범위하게 찾고 있으며 관법으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의 서원사상을 止觀에 잘 용해시키고 있다. 따라서 止觀이 곧 구체적인 보살행의 발판이 되며 또한 보살행이 실증적인 止觀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敎觀을 잘 융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하지관 체계와 교설내용은 禪觀思想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당시까지 중국선은 오로지 禪관계의 경전이나 논서에 의해 禪觀을 닦았을 뿐이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새로이 조직한 예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梁대에 보리달마의 도래가 있었고 또 지의 당시 경론을 떠나 구체적인 禪法을 내고자 한 흔적도 있지만 웅대한 敎相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불교 전체의 止觀法門을 집대성하고 조직한 인물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